강 형사가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방태산은 워낙 여자를 좋아하고 무책임한 짓을 많이 하는 사람이니까⋯
추 경감이 동의를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가장해서 누군가가 죽였을지 모릅니다.
다른 유류물은 없었나?
정사를 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책상 위에서 체모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방태산의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여자의 것으로 추측된답니다. 혈액형은 A형, 그러니까 A형 여자와 책상 위에서 정사를 벌였다는 뜻이죠. 지문도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대조해 본 결과 방태산 자신의 것이 가장 많고 방 총무, 미스 권, 오명자 등의 것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신원을 밝힐 수 없는 지문이 맥주병과 냉장고 문 등에서 몇 개 나왔습니다. 혈액형은 AB형인데 오명자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A형입니다. 미스 권은 O형, 방태산도 O형, 방 총무는 B형이었습니다.
여자 지문이었나?
그걸 알 수가 없지요. 그 지문은 변형의 일종인데 보통 사 람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형태라고 합니다.
그 외의 것은?
치명상은 어느 자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목과 가슴 등 상반신을 찔린 곳이 스물한 군데였습니다. 그야말로 난자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원한에 의한 살인이거나 아니면 서툰 사람의 솜씨로 보입니다. 칼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과도 같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있었다고 했지?
추 경감이 마침 들어온 초어 매운탕을 입으로 후후 불며 떠먹었다.
예, 방태산의 왼손에 머리카락이 몇 올 쥐여 있었습니다. 꽤 긴 것으로 보아 여자의 머리칼 같았습니다. 혈액형은 A형.
그렇다면 방태산을 찌른 사람의 머리칼이라고 해석된단 말인가? 오명자의 혈액형이 A형이라고 했지?
예.
추 경감은 고개를 흔들었다.
여자와 정사 중일 때 누군가가 덤벼 찌를 수도 있고 죽인 뒤 위장을 할 수도 있지.
그 외 발자국은 여러 개가 섞여 있어 특별한 것을 찾을 수 는 없었습니다. 참, 땅바닥과 방태산의 피묻은 런닝셔츠에서 이상한 성분을 발견했습니다. 마늘의 미세한 분말 입자와 활석 분말을 검출했습니다.
활석?
예, 우리가 어릴 때 담벼락에 낙서를 하던 석필이라는 돌의 가루 말입니다. 그리고 마늘⋯
“그게 뭘까?”
“글쎄입니다. 어디 석재 공장이나 공예품 공장에 갔다 왔을까요?”
“한 병만 더 할까?”
추 경감이 빈 소주병을 기울이다가 강 형사를 쳐다보았다. 벌써 두 병이나 비워 두 사람은 얼큰한 상태였다.
“딱 한 병만 더 하죠.”
그들이 다시 세 병째의 소주를 시작하며 수사회의가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방태산을 죽인 범인은 여자가 아닐까요?”
“그렇게 건강한 남자가 여자하고 붙어 일대일로 싸우다 당한단 말이야? 말도 안되지.”
추 경감이 손을 흔들었다. 그 손은 벌써 술에 취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전번 정필대 사건과 유사한 점은 없나?”
“그쪽은 권총을 사용했고 이쪽은 칼을 사용했다는 점이 다릅니다만, 벌거벗고 죽었다든지 같은 13선거구의 출마 예상자였다든지 하는 것은 같습니다.”
“지문이라든지 혈액흔 같은 감식결과를 좀 비교해 보라구.”
“제 생각엔 아무래도 정치적 음모의 결과일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방태산이 살았을 때ㅇ의 동태를 새로 알아보게. 그리고 강력한 “세 후보 중 아직 살아 있는 차주호를 잘 감시해야 해. 아니, 그 사람이 당할 수도 있어.”
“그들은 그날 밤 결국 소주 다섯 병을 비우고 엉망이 되어서야 집으로 갔다.”
19. 여자의 원한
추 경감은 강 형사를 대동하고 신지혜의 자취 아파트를 찾아갔다. 미리 전화를 하고 가진 않았지만 그녀는 대낮인데도 집에 있었다.
“웬일로 낮에도 집에 계십니까?”
추 경감이 강 형사를 소개한 뒤 물었다.
“돈이 안 드니까요.”
신지혜의 대답은 간단하고 차가왔다.
“정필대 씨와는 어떤 관계지요?”
강 형사가 추 경감을 제치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했다.
“왜 묻죠? 그건 내 사생활인데요.”
“정필대 씨가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강 형사가 위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신지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별 풋내기 형사도 다 보겠다는 표정이었다.
“신문에는 모두 자살로 나와 있다고 하던데⋯”
“정필대 씨가 죽었다는 것을 어디서 들었지요?”
“어떤 친구한테서요. 그 친구 이름까지 대야 하나요?”
“아, 됐습니다.”
추 경감이 강 형사의 질문을 제지하고 나섰다. 신지혜가 계속 빗나간 답변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정필대 씨의 사건을 타살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의자 중의 한 사람으로 죽은 방태산 씨도 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태산씨마저 피살체로 발견된 것입니다. 헌데 오명자 씨의 증언에 따르면 신지혜 씨는 정필대 씨와 가까운 사이였던것 같군요. 게다가 내게 와서 조사를 해 달라고까지 부탁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결국 죽고 말았으니.”
“신지혜 씨는 이번 사건들과 밀접한 관계들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 협조하는 뜻에서 정필대 씨와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추경감의 정중한 부탁이 지혜를 움직인 것 같았다.
“예,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말씀드리지요. 먼저 정용대라는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정필대 씨의 형으로⋯”
“공화상사 사장이지요.”
추 경감이 지혜의 말을 되받았다.
“공화상사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소비재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순수익 면에서는 국내 50대 기업에 들어가는 무역회사랍니다. 제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공화상사의 도움 덕택이었습니다. 기업 PR정책의 일환을 이용한 셈이지요. 학교 재단으로 오는 장학금을 타서 미국에 갈 수 있었던 거지요.”
“잠깐만, 신지혜 씨의 전공은 무엇입니까?”
“국제경영입니다. 보통 무역학과라고 하지요. 전에도 말씀드렸을 텐데⋯ 차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때야 신지혜는 두 사람이 자기집에 온 손님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예의를 차렸다.
“괜찮습니다. 우린 곧 가야 하니까요.”
추 경감이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면 유학을 마친 후에는 공화상사에 들어가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장학금인 셈이니까요. 기업이 번 돈을 투자하는 것이지 그 어떤 조건이 붙는 돈은 아닙니다.”
신지혜가 설명하였다.
“그럼 기업으로서는 남는 게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광고 효과가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장학금을 대 준 학교에 발언권이 세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업의 혜택을 받은 학생은 다른 기업과 동일한 조건에서 직장을 선택하게 될 때 그 기업을 선택하게 됩니다.
교수가 되더라도 그 기업으로 우수한 학생을 보내게 됩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린 것이 꼭 그렇다는 뜻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경향이 크다는 것이지요. 기업이 학교에 장학금을 대 주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득이라는 것도 많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형사니까 저보다도 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을 줄 압니다만⋯”
그렇다. 강형사는 신지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많은 살인이 돈과 관계 없이 일어나는가를 그도 신물이 나도록 보아 왔던 것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군요. 정필대 씨와의 관계에 대해서 물으셨지요. 그 이야기는 미국 시카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신지혜가 잠깐 눈을 감고 있다가 시카고 생활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시카고의 날씨는 항상 음산했다. 스모그 현상도 늘 심하여 도심으로만 나오면 콱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신지혜는 꾸욱 그런 환경을 참아내고 있었다. 여기서 박사 학위만 따낸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은 끝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시카고의 우중충한 날씨마저 잊게 하였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은 모든 준비가 끝나 있는 상태였다.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직접 쓰는 것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그녀에게는 졸업과 동시에 강의를 맡을 수 있는 기회까지 주어져 있었다. 아직은 그 모든 것이 1년 후의 일이 될 것이었지만 그녀는 미국에 온 이래 지금처럼 일이 잘 풀려 나간 적이 없었다.
그것은 또한 정필대라는 사내의 등장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막대한 기부금을 내고 정치학과 대학원에 들어온 한국인이었다. 서로 드문 한국인들끼리 만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고, 알고 보니 그는 신지혜의 장학금을 대어 주는 공화상사 사장의 동생이었던 것이다. 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정필대와 처음 만나던 때는 신지혜에게 있어서 큰 고비를 맞았던 때였다.
동생이 죽은 지 3년 만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던 것이다. 만리타향 이국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정필대밖에 없었다. 둘은 함께 귀국했다.
그러나 정필대는 이때까지도 자신이 총각이라고 거짓말을 했고 물론 자신의 집에는 연락도 하지 않은 채 귀국하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신지혜는 모진 결심을 안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결심이었다. 그런데 박사 학위 논문 심사가 진행되던 중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귀국한 그녀는 정말 넋이 빠진 듯했다. 그리고 방태산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불타올랐다. 거기에 정필대에 대해서도 약간의 원망이 생겼다. 그녀는 어머니라도 살아생전에 결혼식을 올리자고 그를 그렇게 졸라대었지만 그가 늘 미적미적한 태도로 결혼을 유보해 왔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자살했다고 하던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강 형사가 다시 이야기의 흐름에 끼어들었다.
“방태산 때문이었지요.”
신지혜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예?”
“미혜는 방태산의 애를 가졌더랬어요. 그런데 방태산이 동생을 버린 거지요. 그 충격으로 자살한 거예요. 그렇게 무책임하고 낯 두꺼운 남자들이 이 나라에는 아직도 얼마든지 있지요”
신지혜는 전혀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으며 말했다.
“그럼 방태산 씨는 신지혜 씨 집안의 큰 원수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아무튼 순서대로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면 어떻게 된 영문인 줄 알게 되실 테니까. 나는 이번에 정착을 위해 귀국했을 때 까지도 정필대 씨가 유부남인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신지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이는 선거가 임박해서 당에서 자신을 부른다고 나보다 조금 일찍 귀국했어요. 그런데 제가 한 달 전 막 귀국을 하고 나서였습니다. 얼핏 서점을 지니다가 보니까 국회로 뛰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잡지가 있더군요. 그 잡지를 사서 보았지요. 서울 제13지역구에 정필대 씨가 나온다는 기사가 실려 있더군요.”
“방태산 씨도 있었겠지요?”
강 형사가 물었다.
“물론이지요.”
신지혜는 더욱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거기에 부인 송희 여사와의 사이에 1남 1녀라고 적혀 있었던 거예요. 나는 그 때야 멍청하게 눈을 뜨고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정필대 씨를 찾아갔나요?”
“뭐 하게요? 미국에서의 일은 미국에서의 일. 구질구질하게 그런 것을 따져서 무얼 합니까?”
“그럼 저를 찾아온 것은 무슨 까닭이었습니까?”
추 경감이 물었다.
“아, 그건 제가 정보를 하나 입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필대 씨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정보였지요. 모르는 사이라면야 모르겠지만 피차 아는 사이에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고 그렇다고 정필대 씨를 만나서 이러저러 하니 그만두어라 하고 말하기도 싫고 해서 추경감님을 만났던 거지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신지혜 씨는 그때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추 경감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지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그는 나의 원수예요. 다른 사람 손에 죽어선 안 돼요.”
“그런데 하필이면 저를 택했습니까?”
“강력계에 계시고 또 가장 유능한 분이라는 평을 익히 들은 바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건 지난번에도 말씀드린 줄 아는데요?”
“왜 정필대 씨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지요?”
“저로서는 그를 두 번 만난다는 것이 별로 내키지를 않더군요. 공연히 만났다가 구설수에라도 오르면 이곳에서 제 생활은 모두 깨지고 말 것 아닙니까? 정치가들에게는 언제나 사회의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데 특히나 선거 때에 그런 일이 생기면 저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되지 않겠어요?”
“네, 좋습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사건이 나기 전에 방태산 씨를 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신지혜는 간단하게 빨리 대답했다.
[작가소개] 이상우;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
이상우 작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