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이상우의 정치 추리 소설-악녀시대] 10
[연재-이상우의 정치 추리 소설-악녀시대] 10
  • 온라인뉴스팀
  • 입력 2021-04-30 16:41
  • 승인 2021.04.30 17:01
  • 호수 1409
  • 2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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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해. 우린 이제 빨리 도망쳐야 돼. 그 놈들에게 금방 소식이 들어갈 거야.”
“그 놈들이라니? 주 마담은 이제 포기했을 거야.”
“ 주마담 따위를 가리키는 게 아냐.”

형주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정자를 연안 부두로 끌고 나갔다.
“표는 끊었어. 목포행, 2시 출발이야.”
“어머머, 자기 마음대로야. 그럼 30분밖에 없잖아?”

“바쁜 것이 우리를 구할 수 있어.”
바쁜 것이 그들을 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30분 후 그들은 목포행 여객선 위에 있었다.
“어휴, 형주 씨, 너무 춥다.”

갑판에 나와 있던 정자는 형주에게 어리광 부리듯이 말했다.
“그럼 들어갈까?”
“싫어. 냄새나고 어지럽단 말야.”
“그럼 어떡하라고?”
형주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꼭 안아주면 되지.”
정자가 방긋 웃었다.
“뭐?”
“뭐 어때? 우린 신혼 부부잖아. 자기, 벌써 잊은 것은 아니겠지.”
“잊기는?”

형주는 정자를 꼭 품 안에 안았다. 주위에서 힐끗힐끗 쳐다보는 눈길도 있었지만 둘 다 아랑곳하지 않았다.
“형주 씨, 우리를 쫓는 사람이 누구야? 형주씨가 갖고 있는 돈은 누구 돈이고? 사실은 나 쓰면서도 겁나. 형주 씨, 은행이라도 하나 턴 것 아냐? 은행돈은 번호 추적이 가능해서 함부로 쓰면 금방 잡힌대.”
형주는 그 말에 웃었다.

“걱정 마. 이 돈은 추적해도 경찰에는 알릴 수 없는 돈이야. 정치한다는 골빈 놈들이 불법적으로 쓰려던 돈이야. 어차피 술값으로 없어지거나 비누, 치약으로 둔갑해서 유권자라는 사람들한테 공짜로 뿌릴 돈이었으니까 절대로 경찰에는 알리지 못해.”

“정치 자금이란 것이구나.”
정자가 제법 유식한 말을 했다.
“쉿! 조용히 이야기해. 나는 운반책이었어. 그런데 기회가 온 거였지. 내가 갖고 있는 가방에는 현금으로 8천만 원이 들어 있다고. 하지만 이 정도 돈이 없다고 붙을 놈 떨어지고 떨어질 놈이 붙겠어?”

“그럼 우리를 쫓는다는 것은⋯”
“그래 내가 있던 조직이지. 뽕식구들이지.”
형주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정자는 그의 품에서 약간 떨고 있었다. 뽕식구란 히로뽕 밀매조직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잔혹하고 끈질기다는 것을 그녀는 여러 사람들한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바보. 걱정 마. 안심 폭 놓으란 말야.”
형주가 웃으며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포근한 손길이라고 그녀는 느꼈다.
“내가 알기로 우리 식구들은 인천과 부산 두 곳으로 뽕을 들여오거든.”
“그렇다면 우리가 이 배 탄 걸 알았을지도 모르잖아?”
정자가 불안한 얼굴로 형주를 쳐다보았다.

“아마 우리가 내릴 목적지도 알지 모르지.”
“바보야. 그럼 어떡해?”
정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걱정 말라니깐. 다 생각한 거니까.”

형주는 정자의 어깨를 다시 다독이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우리는 목포에서 내릴 게 아냐. 이 배는 중간에 군산에서 멈춘다고. 우리는 거기서 내리는 거야. 그다음에는 거기서 남원으로 갈 거야.”
“남원? 왜 하필이면 남원이지?”

조금은 안심이 된 목소리로 정자가 물었다.
“남원에 혹시 아는 사람 있어?”
“아니, 전혀 모르는 곳이에요.”
“하지만 나는 조금 아는 바가 있지.”

형주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거센 바람에 불이 잘 붙지 않았 다. 정자가 두 손으로 그의 라이타를 감싸 주며 물었다.
“거기 친척이라도 있어?”
“아니, 나도 아는 사람은 전혀 없어.”

“그런데 왜 그리로 가는 거야?”
“그래야 우릴 못 찾을 테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거기 춘향이하고 이몽룡이가 만났던 동네거든.”

“뭐예요? 그럼 자긴 이몽룡이고 난 춘향이가 되는 거야?”
정자가 이번에는 웃었다. 형주는 변덕스러운 그녀가 더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바다로 숨는 게 아냐. 수풀 속으로 숨는 거라고. 바다는 한눈에 다 보이지만 숲은 바로 앞도 안 보이거든.”

한편 형주가 뽕식구라고 말하는 조직은  그때서야 형주의 행방을 알아냈다.
“형님, 쌍검의 행방을 알았습니다.”
곰보가 최장배에게 달려왔다.

최장배는 미상동의 용궁 살롱에 있다가 곰보의 말을 듣고 벌떡 일어섰다.
“그곳이 어디야?”
“인천입니다. 그리고 목포로 가는 배를 탔다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좋아. 수고했어. 그리고 그년도 같이 있었겠지?”
“정자 말입니까?”
“그래.”

“물론이지요.”
“좋아.”
최장배가 좋아하고 소리친 순간이었다. 살롱의 문이 벌컥 열렸다.
“최장배, 꼼짝 마라!”
“억, 형님 피하십시오.”

곰보가 고함을 쳤다. 그러나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경찰관들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최장배는 곧 팔을 꺾인 채 끌려 나왔다.
“왜 이러십니까?”

최장배는 몸을 뒤틀며 반항했다.
“최장배 씨, 당신을 박철호 살인범으로 체포합니다.”
강형사가 잔뜩 비꼬는 어투로 말했다.
“뭐, 뭐야? 말도 안 돼!”

최장배는 큰소리를 쳤지만 어투에는 불안감이 잔뜩 배어 있었다.
“자네는 현장에 너무나 중요한 증거를 남겨 놓았어. 그것 때문에 들통이 나고 만 거야.”
“중요한 증거?”

최장배는 얼떨결에 강 형사의 말을 따라 했다.
“그렇지. 바로 면도칼이야. 박철호와 자네가 쓰는 면도칼은 종류가 달라. 자네가 쓰는 면도칼은 양날 면도칼이지만 박철호가 쓰는 면도칼은 한 날짜리란 말야. 그걸 몰랐던 모양이지. 아무려면 자살하려는 친구가 한 통이나 남아 있는 면도칼을 두고 새로 면도칼 하나를 달랑 사서 자살하는 데 쓸 것 같나?”
그 말에 최장배는 고개를 숙이고 낮게 욕을 내뱉고 말았다.

“뿐만이 아니지. 우리는 그 앞 구멍가게에서 자네가 범행에 사용한 면도칼을 구입하였다는 것도, 그 앞 약국에서 수면제를 구입한 것도 모두 알고 있어.”
최장배는 묵묵부답이었다.
“이 친구는 어떻게 할까요?”
곰보를 붙잡고 있는 순경이 물었다.

“공무집행방해와 범인도주 및 은폐에 협력하였으니 끌고 가.”
곰보의 연행으로 수풀 속의 두 사람은 아직도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정자와 형주는 위기일발에서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구조가 된 셈이었다.
“자기 우리 처음 만났을때 생각나?”

정자가 형주의 품에 어깨를 묻은 채 말했다. 옆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가 별꼴 다 본다는 듯이 두 사람을 쳐다보며 입을 삐죽 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할아버지도 헛기침을 하며 곱지 않은 눈으로 그들을 흘겨 보고 있었다.
그러나 형주와 정자는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형주가 오른손으로 정자의 유방을 감싸 쥐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요것이 제일 탐났거든⋯”
형주가 그녀의 유방을 애무하면서 말했다.
“요것만 탐낸 거야?”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 요것도⋯”

이번에는 형주가 그녀의 사타구니에 슬그머니 손을 집어 넣었다.
“어흠. 어흠”
맞은편에 있던 노인의 헛기침 소리가 더 커졌다.
그러나 정자와 형주의 장난은 그치지 않았다.
“요것도 탐났었지.”

형주의 손이 들어 가서는 안 될 곳으로 계속 들어갔다.
“아이⋯아이⋯”
정자가 간지러운 소리를 했다.
“말세다. 말세.”

이번에는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놈들. 너희들은 밤낮도 모르느냐? 여기가 너희들 안방인 줄 아느냐?”
노인이 마침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15. 비오는 날의 밀담

방태산의 선거 사무실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정필대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신문들은 일단 그렇게 추정했다) 말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천우신조의 기회가  아닌가 하고 방태산은 생각했다.
표를 얻기 위해 하루 종일 선거구를 누비던 운동원들은 거의 돌아가고 각 지역 책임자인 활동장들만 남았다.

열두 명 중 세 명은 볼 일이 있어 먼저 나가고 아홉 명이 남아 있었다. 활동장은 아니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사무실을 정리하고 가는 오명자도 남아 있었다.
“모두 주목!”

방태산이 위엄을 갖추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턱을 집어넣는 자세로 일어서면서 말했다.
“오늘도 활동장 여러분 수고가 많았다. 우리는 반드시 이기고 만다. 여러분이 주워 모은 한표 한표가 이 사람을 의정 단상에 세우고 말 것이다. 나는 햇볕에 시커멓게 탄 너희들 얼굴이 자랑스럽다!”

방태산의 억양이 차츰 높아지면서 억센 입에서 침이 튀기 시작했다.
“이건 아무나 못하는 일이라. 너희들이나 내처럼 피로 뭉친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라. 이번 선거는 벌써 우리가 이긴기나 마찬가지 징조가 막 나타난다 이거야. 우리 13구에서 출마한다고 소문낸 모씨도 사라졌고⋯”

방태산은 그렇게 말하다가 잠시 말을 끊고 고개를 갸웃했다.
“마, 내가 그 사람이 죽었다고 좋아하는 건 추호도 아이다. 선량한 상대자로 싸우다 먼저 간 사람한테 본인은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가 없지 않은지라⋯”
“킥킥⋯”

뒤에 서 있던 젊은 활동장의 참다 못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거 머냐? 심각한 말 하는데 웃고 그러면 못 써.”
“죄송합니다.”
“이상 끝. 오늘은 이만 해산이다. 오명자 여사만 남고 다 가거라.”
그래서 선거 사무실의 하루는 마무리되어 갔다.

활동장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한잔씩 하러 나가고 어수선하고 텅빈 사무실에는 방태산과 오명자만이 남았다.
오명자는 방태산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흩어진 집기를 바로 놓는 등 부지런히 실내 정리를 했다. 그러나 방태산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기의 종아리며 히프를 쳐다보고 앉아 있으리란 짐작은 하고 있었다.
오 명자가 실내를 거의 정리했을 때였다.

“오여사, 그만하고 고마 이리 오시지요.”
방태산이 소파에 앉아 걸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털이 숭숭 나서 흉물스러운 다리를 낮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뒤로 비스듬히 자빠진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일 고마하고 일로 오라니까.”

오명자가 들은 척도 아니하자 방태산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의 욕정에 더러워진 시선이 오명자의 전신을 송충이처럼 스물 스물 기어가는 것 같은 것을 느꼈다.

오명자는 아무 말 않고 방태산 앞에 와서 가만히 섰다.
“위원장님,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오명자는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말을 꺼냈다.
“커피? 그만둬라. 그 썩은 물 먹으면 잠만 안 온다. 우리 속 시원한 맥주 한잔 하자.”

방태산이 일어서서 칸막이를 해 놓은 위원장실로 들어갔다. 거기엔 사무용 책상 하나가 가운데 버티고 있고 그 앞에 고가구 점에서 사온 응접 세트가 놓여 있었다. 밖의 응접 세트는 비닐로 커버를 했지만 이 방의 것은 그래도 레쟈로 커버를 한 것이 었다. 새것일 때는 값깨나 나갈 쇼파 같았다.

방태산은 옆에 있는 조그만 냉장고를 열고 맥주 한 병과 컵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오 여사, 이리 들어와. 아무도 보는 사람 없어. 우리 맥주 한잔 하면서 오늘 일 마무리짓자.”

그는 책상 모서리에 맥주병을 탁탁 쳐서 뚜껑을 열며 말했다.
“빨리!”
오명자가 자기 자의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위원장실로 들어갔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방태산이 이렇게 나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자, 한 잔 받아라.”
“제가⋯”
오명자가 술병을 받으려고 했다.
“오여사가 먼저 한 잔 해라. 레디 파스토란 거 나도 안다.”
오명자는  하는 수 없이 맥주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두 사람은 금세 맥주 한 병을 비웠다.

오명자가 한 잔을 두고 씨름하는 사이 방태산은 나머지를 다 비웠다.
“오 여사, 요새 잘 안 보이던데 뭐 걱정거리 있나?”
방태산이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오명자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니에요.”

오명자는 혹시 이 능구렁이가 자기 뒷 조사를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챈 것이나 아닐까 해서 찔끔했다.
“걱정거리 없으면 다행이다. 요새 며칠 못 봤더니 더 이쁘졌다 이거야.”
방태산이 손으로 오명자의 볼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가 얼굴을 돌리자 이번엔 그가 벌떡 일어나 옆에 와서 앉았다.
“요거 때문에 내 미치겠네.”

방태산은 오명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술 냄새 나는 입을 그녀의 입술에 덮쳤다.

“으음......”

오명자가 고개를 돌려 그의 돌연한 공격을 피하려고 했다. [계속]

[작가소개]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온라인뉴스팀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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