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제3의 살인
언제나처럼 추 경감이 살인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강 형사와 다른 요원들이 초동 수사를 거의 끝냈을 무렵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놈의 13선거구에 마귀가 붙었나?
출마하려는 사람들은 왜 다 죽어?
추 경감이 큰 소리로 떠들면서 들어섰다. 늦게 온 자기 체면을 가루려는 순진한 속셈이 다 내다보여 강 형사는 킥 웃기만 했다.
제13선거구의 보수당 출마 예상자인 방태산이 갑자기 죽었다. 아니, 죽었다기보다는 더 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자기 사무실에서 어느 날 새벽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방태산은 어수선한 선거 사무실 구석에 있는 위원장실이라는 곳의 소파 위에서 거의 벗은 채로 죽어 있었다.
옷은 벗어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아랫도리는 완전히 나체에다 위에는 런닝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서부터 목과 가슴으로 수십 군데 칼로 난자당해 처참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시체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누구야?
추 경감이 강 형사를 보고 물었다.
방총무라고, 이 사무실의 사무장 비슷한 청년입니다. 죽은
방태산의 7촌 동생인가⋯
7촌 동생이 어딨어?
아니, 6촌 동생인가 하는 사람이죠. 옳지 저기 있군요. 방 총무.
강 형사가 그를 불렀다. 체구가 당당하고 두터운 목이 운동선수 출신같이 다부지게 보였다.
당신이 방 총무요?
추 경감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는 추경감의 아래 위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별볼일 없게 생긴 중늙은이가 왜 땅땅거리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거 미안합니다. 형님의 죽음에는 심심한 애도를 표합니다. 범인을 빨리 잡기 위한 것이니 협조해 주십시오.
강 형사가 기분 나빠 하는 방 총무의 표정을 읽고 얼버무렸다.
방 총무가 여기 나온 것이 몇 시쯤이 었나요?
추 경감이 팸플리트가 흩어져 지저분한 탁자 위에 엉덩이를 걸치면서 물었다.
오늘 새벽 5시쯤입니다. 저는 늘 그때 나와서 오늘 할 일의 스케줄을 짜거든요.
그때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시겠습니까?
제가 들어왔을 때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빌딩 현관에만 경비원 한 사람이 꾸벅꾸벅 졸고 있더군요.
이 집은 그 경비원이 있는 현관 말고는 드나드는 곳이 없습니까?
추 경감이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계단을 통해 밑의 지하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현관을 거치지 않아도 되지요. 지하에는 이발소, 다방, 라면집 등이 있지요.
거기서 밖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까?
물론이죠.
계속 이야기해 보시죠.
추 경감이 다시 재촉했다.
저는 경비원의 인사를 받으며 걸어서 2층 사무실로 왔지요. 문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잠그나요?
이번엔 강형사가 메모를 하면서 물었다.
거의 그렇습니다. 열쇠는 저와 형님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실로 들어섰더니 불이 켜져 있더군요. 사무실은 텅 빈 채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제 책상에 가서 앉아 책상 서랍을 열었지요. 그러다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습니다. 목 뒤가 섬득한 것 같은 감을 느끼고 돌아다보았지요. 위원장실 문이 반쯤 열려 있고 사람의 맨발이 조금 보였어요. 나는 깜짝 놀라 그곳으로 뛰어가 보았지요. 그랬더니 아 글쎄⋯
방 총무는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주전자를 들고 꼭지째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서요?
추경감이 위원장실 쪽을 힐끗 쳐다보며 재촉했다.
형님은 소파 위로 한쪽 다리를 걸치고 머리는 땅바닥에 떨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체의 절반쯤이 소파에 얹혀 있었습니다. 위에 입은 소매 없는 런닝셔츠는 피에 젖어 아예 붉은색 내의 같았습니다. 밑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았어요. 나는 즉각 살인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너무 놀라 다리가 덜덜 떨리고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방 안 모양은 어땠나요?
정신이 없어 자세히 보진 못했습니다만 좀 어지러운 것 같았습니다.
소파가 제자리에 있지 않고 탁자 위의 컵이 깨졌어요. 전화기도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난 걸 보면 격투 같은 것이 있었다고 보아야지요.
강 형사가 보층 설명을 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살인 현장은 손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왜 그런 생각을 했나요?
텔레비전에서 수사 드라마 같은 걸 보면 그렇더군요. 그래서 전 112에 전화를 걸고 현관의 경비원한테 알렸지요.
방 총무의 말은 거짓이 없는 것 같았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추 경감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형님은 누가 살해한 것 같습니까?
예? 제가 그걸 알면 형사반장 하지 이러고 있겠습니까?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추 경감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뭔가 짚이는 데가 있지 않을까요?
형님이 이번 선거에 당선될 것이란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형님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방 총무의 말에도 무슨 뜻이 숨어 있는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정치적인 라이벌의 이름만 대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어젯밤에 늦게까지 같이 있었던 사람은 누구누구입니까?
추 경감이 다시 물었다.
글쎄요. 활동장들이 나가고 나면 제가 그날 일에 대해 보고를 하고⋯
그날 일이란?
예, 뭐 실탄 나간 것, 득표 성과 등이죠. 그리고 나면 대개 오 여사나 미스 권이 이곳 정리를 하고 나가죠.
방태산이 실내를 생각난 듯이 둘러보았다.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방태산의 얼굴을 인쇄한 선전지며 선거공약을 쓴 벽보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전혀 정리를 하지 않았군요. 오 여사가 게으름을 피운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일 보십시오.
그쯤에서 추 경감은 방총무를 풀어 주었다.
수사본부를 어디에 차렸나?
예, 이곳 관할서입니다. 옆에 있는 여관방 두 개를 빌려 요원들이 우선 쓰기로 했습니다.
강 형사가 손가락으로 창 너머 보이는 여관 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관에 방태산이 쓰던 방이 있습니다.
아니, 이곳에 사무실이 있는데 그곳 여관은 왜 쓰나?
가끔 쉬기도 하고 은밀한 손님을 만날 때 쓴답니다.
은밀한 손님?
추 경감이 코웃음을 쳤다.
저쪽 빌려 놓은 여관으로 오명자라는 여자를 좀 데리고 오게.
추 경감이 밖으로 앞장서서 나갔다.
온돌방 여관에 오명자가 강 형사를 따라 들어왔다. 겁에 질려 굳은 표정의 오명자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이었지만 어딘가 조금 천하게 섹시한 분위기가 풍겼다.
간단히 몇 가지만 묻겠습니다. 아시는 대로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오명자는 다소곳이 꿇어앉아 고개만 끄덕였다.
편히 앉아요.
추 경감이 굳은 그녀의 표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말했다. 오명자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리를 옆으로 포개 놓느라고 치마가 걷혀 올라가고 하얀 허벅지의 속살이 잠깐 강형사 눈에 들어왔다. 강 형사는 안 보는 척하며 흘금흘금 그것을 훔쳐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방태산씨 선거 사무실 일을 했습니까?
한 달 반쯤 되었습니다.
무슨 일을 했나요?
관내에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표를 찍어 달라는 말을 하고 다녔지요.
방태산 씨와는 처음에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 동네 사는 사람이 여기 활동장으로 있는데, 그 사람이 소개를 해서 일당 운동원으로 들어왔어요.
방태산 씨와 개인적으로 만난 일이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솔직히 말씀해 주셔야 범인을 잡습니다.
예.
자세히 좀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까?
일 끝나고 나서 내가 청소할 때 가끔 맥주 한잔 같이 마신 일이 있어요.
특별히 일당을 더 주신 일은?
아이구 아저씨도, 그 사람이 얼마나 소금인데요.
맥주만 마셨나요?
추 경감이 아픈 곳을 찔렀다.
오명자는 눈만 두리번거릴 뿐 대답을 얼른 하지 않았다.
남편은 아주머니가 이곳에 나간다는 것을 압니까?
예, 하지만 방태산 위원장님이 누군가는 모릅니다.
무슨 뜻이죠?
저어, 저희 남편 만나신 건 아니죠?
오명자는 갑자기 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걱정 말아요. 방태산과 맥주 마셨다는 이야기 안 할 테니까.
강 형사가 안심을 시켰다.
어젯밤 이야기를 좀 해 주시겠습니까?
추 경감이 물었다.
다 끝난 뒤에 정리하고 집에 갔습니다.
몇 시에 갔습니까?
여덟 시쯤 갔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현관 경비실서 확인했습니다.
강 형사가 보충 설명을 했다.
사무실이 하나도 정리되어 있지 않던데요?
예?
오명자가 약간 당황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제가 책상 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오명자는 한참 머뭇거리다 말을 계속했다.
위원장님이 불러서 그 방으로 갔지요. 그랬더니 냉장고에서 맥주병을 꺼내서 한 잔 마시자고 하더군요. 저는 술을 잘 못하는데 자꾸 권하는 바람에 한 잔 마시고......
한 잔입니까?
모르겠어요. 몇잔 마신 것 같아요. 그래서 어지러워 청소를 못하고 그냥 집으로 갔습니다.
술만 마셨나요?
추 경감이 오명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예.
한참 머뭇거리던 오명자가 모기 소리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누가 오지는 않았나요?
아뇨.
오명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여관 여주인이 쥬스 석 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됐습니다. 자, 한 잔씩 드시죠.
강 형사가 쥬스 글라스를 권했다. 세 사람은 말없이 쥬스를 마시며 각각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이제 가도 좋습니다.
오명자가 절을 꾸벅하고 일어서서 나갔다.
그 쥬스 글라스에서 오명자 지문을 떠 놓도록.
꽤 거짓말을 하는군요.
강 형사가 쥬스 잔을 손수건으로 감싸 간수하면서 말했다.
내가 여자라도 그렇게밖에는 얘기하지 않겠어.
추 경감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18. 책상 위의 정사
늦가을 해가 뉘엿해지자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강 형사, 출출하지?
추 경감이 앞섶이 다 닳은 갈색 점퍼를 걸치며 물었다. 한잔하겠느냐는 뜻이었다.
좋죠.
강 형사가 뒤적이던 수사 기록을 덮으며 일어섰다.
뭐가 좋아?
석촌 호숫가 포장마차 집 어떻습니까? 부글부글 끓는 냄비에서 오뎅 한 꼭지 척 말아들고 쐬주 한 잔 기울이는 맛이야말로⋯
강 형사가 침까지 삼키며 말했다.
쯧쯧쯧.
추 경감이 혀를 차자 강 형사는 뜻을 알지 못해 멍청하게 서 있었다.
자네는 아무래도 서민층을 벗어나긴 글렀어. 좀 스케일 크게 놀 수 없나?
예? 아 그것 좋죠. 제가 잘 아는 아가씨가 요즘 서초동에 새로 룸살롱을 열었다고 하는데⋯
쯧쯧쯧. 좀 색다른 멋을 찾아봐.
추 경감이 앞장서서 나갔다. 두 사람은 강 형사가 운전하는 낡은 프레스토를 탔다.
영동교 밑의 한강 공원 선착장으로 가지.
예?
왜?
아니, 이런 쌀쌀한 날씨에 거긴 왜 갑니까?
자네는 겨울 바다의 멋도 모르나? 지금 한겨울은 아니지만 쓸쓸한 가을의 한강 유원지. 사람들 발길은 뚝 끊어지고 라면봉지만 낙엽처럼 뒹구는 강변. 추억도 낙엽인양⋯
반장님, 됐습니다, 됐어요. 그건 제가 습작으로 쓴 시인데 언제 보셨어요?
자네 그 수사기록부 뒤에 써 놓았더군. 마흔이 내일 모렌데 아직도 문학 청년이야?
헤헤헤⋯
두 사람은 모처럼 가슴 후련하게 웃었다.
사건이 풀리지 않아 매일처럼 머리를 싸매고 이곳저곳을 뒤지며 다녔다. 오늘은 발상의 전환이란 것을 하기 위해 추 경감이 찾아낸 곳이 쓸쓸한 선착장 횟집이었다.
강물 위에 덜렁 떠 있는 횟집은 그야말로 썰렁했다. 창 밖에 서는 움퍽 줄어든 한강물이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질펀한 수면 위에는 어둠을 뚫고 쏟아진 총총한 별빛이 반짝였다.
어때? 텅빈 선착장. 동양화의 여백 같은 멋이 있잖아?
추 경감이 소주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넣으며 말했다.
야, 우리 반장님 다시 보았습니다. 그런 멋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동양화의 여백, 참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어허, 너무 아부할 건 없어. 수사 잡지에 난 누구의 수필 속에 나온 말이니까.
두 사람은 거기서 수사회의를 시작했다. 두 사람만 참석한 것이니까 회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의견 교환을 늘 그렇게 했다.
그래, 감식 기록부터 검토하지.
추 경감의 말을 따라 강 형사가 늘 들고 다니는 수사기록부를 펄쳤다. 수사기록부라기보다는 강 형사 개인의 메모 책이었다.
런닝셔츠는 입고 아랫도리는 벗고 있었다는 것은 여자와 정사를 벌이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사무실에서 정사를 벌일 만한 여자라면 근방의 유흥음식점 아가씨들이거나 선거 운동원 중의 누구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가령 오명자라든지⋯
[작가소개]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
이상우 작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