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허 새삼스럽게 와 이러는 거야.
슬프다기보다는 분노와 비애가 범벅된 기분이었다
“내가 당신을 너무 버려 두었던가 봐.”
추 경감은 여자의 유방을 입술로 간지렵혔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내의 육체를 발견한 것 같았다. 그가 정사를 치르며 아내의 몸 구석구석을 이렇게 밝은 곳에서 볼 수 있었던 기억은 없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여성다운 부드러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의 정사는 짧았다. 그러나 아내는 만족한 표정이었다. 부끄러운 듯 돌아 앉아 재빨리 옷을 챙겨 입고 부엌으로 도망가다시피 가버렸다.
추 경감은 아내가 삶아 준 국수를 두 사발이나 비우고 아랫목에 비스듬히 누워 다시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아내가 삶아준 국수는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던 그 맛이 제법 났다. 학교에서 허기진 배로 집에 들어서면 언제나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아 주던 어머니 가 “얘야, 오늘 국수 삶아 줄까?” 하고 다정하게 묻고는 했다.
전쟁통이라 밀가루도 구하기 힘든 부산 피난 시절. 밀을 껍질도 벗기지 않고 제분을 해 누르스름한 국수였었다. 마당 겸 길에 놓은 풍로 위의 냄비에서 푹 삶은 국수를 건져 찬물에 씻은 다음, 널찍한 사발에 수북이 담고 멸치 국물을 끼얹었다. 푸른 애호박 삶은 것을 숭숭 썰어 얹고 간장을 찔끔 두른 그 국수가 그렇게 구수할 수 없었다.
추 경감이 혼자 빙긋이 웃으며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을 때였다.
“아빠, 우리 코미디 봐요. 텔레비 돌릴래요.”
어느새 왔는지 나미가 방 안에 들어오며 떼를 썼다. 추 경감은 그들의 대낮 사랑을 나미가 훔쳐본 것이나 아닐까 하고 겁이 덜컹 났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미국 방송을 틀어 놓고 슈퍼볼 경기를 보았다.
“코미디는 무슨 코미디야. 지금 막 시작한 경긴데⋯”
추 경감은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틈만 나면 미국의 슈퍼볼 시리즈를 보기 때문에 각 팀의 성적이나 스타의 기록까지 훤한, 별난 취미를 가진 추 경감이었다.
“아니, 영어도 제대로 모르시면서 밤낮 그놈의 철모 쓴 애들 싸움만 봐요. 나미 보게 좀 돌려요.”
곁에서 책을 읽던 아내가 딸 편을 들었다.
“영어도 모른다고?”
“그렇죠 뭐.”
“예스는 예이고, 노우는 아니오이고, 와이프는 마누라고, 프래틀러는 수다장이⋯”
“뭐라구요? 나 기가 막혀.”
아내는 더 상대하기 싫은 듯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
“아이, 아빠!”
그러나 나미는 포기하지 않고 졸랐다.
“밖에도 텔레비전 있잖아.”
“피이, 요새 그런 구닥다리 흑백을 누가 본대요. 더구나 지 맘 내켜야 나오는 화면인데.”
“그럼 내가 나가서 볼까?”
“아빠, 그러지 말고 우리 텔레비전 하나 더 사요. 저것도 이젠 낡아서 엉망이잖아요. 요즘 웬만한 집엔 모두 두 대 세대씩 있어요.”
“얘야, 그런 소리 마라. 너희 아빠 봉급이 얼만데 새 텔레비전을 또 사니?”
밖에서 안 듣는 척하던 아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다 같은 경찰관이고 다 같은 경감인데 아무개 집엔 자가용까지 있더라는 말을 가끔 하는 아내였다. 그러나 추 경감이 그러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딩동.”
그때였다. 누군가가 초인종을 울렸다.
“네, 나가요.”
나미도 핑계 김에 나가버렸다. 추 경감은 다시 느긋한 기분으로 담배를 꺼내 물고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화면을 즐겼다.
“여보, 손님 오셨어요.”
문 밖 거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 경감은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났다. 바지만 입고 위에는 런닝셔츠 바람인 그는 쉐터 하나를 꺼내 입고 마지못해 거실로 나섰다. 거실엔 뜻밖의 인물이 와 있었다.
“아니, 당신은?”
추 경감은 눈이 둥그래졌다. 거기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송희, 아니 정필대의 아내를 자처하고 그의 뒷조사를 부탁하러 왔던 그 여자였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경감님.”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여자로서는 비교적 큰 키에 긴 목, 그리고 검고 치렁치렁한 생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쉽게 표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약간은 우울한 듯 하면서도 하얀 얼굴이 미인 측에 든다고 할 수 있었다.
“거기 좀 앉으시요.”
그 여자가 잿빛 바바리코트를 벗어 얌전하게 갠 뒤 옆에 놓으면서 앉았다.
“경감님, 죄송합니다. 경감님을 속인 일을 용서하십시요.”
그녀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제 이름은 지혜라고 합니다. 신지혜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어흠, 어흠.”
추 경감은 헛기침을 두어 번하고는 점잖게 말을 했다.
“그럴 사정이 있었습니다. 정필대 씨는 그때 누군가가 죽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예? 누가 정필대 씨를 죽이려 했습니까?”
추 경감이 또 한 번 놀라며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죽이려 한 것은 확실합니다.”
“신지혜 씨는 그걸 어떻게 알았나요?”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 말씀을 믿지 않으셨기 때문에 정필대씨가 결국 피살된 것 아닙니까?”
“정필대가 피살되었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신문에는 자살했다고 났지만 그걸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국회의원 선거 출마 예상자가 대낮에 호텔에서 벌거벗은 채 유서도 없이 자살했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호텔이 아니고 여관입니다.”
추 경감이 바로잡아 주었다.
“호텔이건 여관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경찰관이 감시하고 있는 인물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신지혜의 그 말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추 경감은 생각했다.
“그건 어쨌든, 신지혜 씨는 도대체 누굽니까?”
“저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알아보셨으리라고 믿습니다만, 제 소개를 한 번 더 하겠습니다.“
그녀가 잠깐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전 고향이 강원도 속초입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안 계십니다. 저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국제경영학 학위를 받고 왔습니다. 다음 학기부터 서울 근교의 어느 전문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는 가까운 친척이 별로 없습니다. 저는 지금 조그만 아파트에서 혼자 자취하고 있습니다.”
“정필대 씨와는 어떤 관곕니까?”
추 경감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냥 아는 사이입니다. 미국에서부터라고 해야지요.”
“그런데 왜 그때는 정필대 씨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씀드렸어도 제 말을 믿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저는 다만 정필대 씨가 다른 사람 손에 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사람 손에?”
추 경감이 다시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화장기 없는 조그만 입술이 지성적으로 보였다.
“그렇습니다. 정필대는 딴 사람 손에 죽어선 안 됩니다. 그는 내가 죽여야만 하니깐요. 하지만 이젠 글렀죠.”
지혜는 이 말을 하면서 입가에 섬찟한 미소를 담았다. 크게 뜨인 추경감의 눈이 더욱 커졌다.
“아니, 지금 무슨 말을⋯”
“놀라실 것 없어요. 그건 제 개인적인 복수니까요. 이젠 다 지나간 일 아닙니까? 저는 정필대 씨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왜 정필대 씨를 아가씨가 죽여야만 합니까? 무슨 사정인지⋯”
“그건 차차 말씀드릴게요. 오늘은 제가 경감님을 속이고 정필대 씨의 아내 노릇한 것을 사과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여기 제 전화번호가 있으니까 혹시 제가 있어야 할 일이 있다면 연락해 주세요. 남의 부인을 사칭한 것도 죄가 된다면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신지혜는 조그만 종이쪽지 하나를 탁자 위에 내놓고 일어섰다.
“잠간만, 쥬스나 마저 마시면서⋯”
추 경감이 그녀를 잡아 두려고 했으나 그녀는 추 경감의 말을 무시한 채 쥬스 잔도 채 비우지 않고 거실을 조용히 걸어 나갔다.
지혜가 나가고 난 뒤 추 경감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하니 한참 동안 앉아 있었다.
한참 만에 제정신을 차린 추 경감은 그녀가 남기고 간 전화번호 쪽지를 주워서 수첩에 넣었다. 그리고 그녀가 앉아서 계속 쓰다듬던 그녀의 긴 머리카락 한 올을 찾아내 소중히 간수했다. 그뿐 아니라 그녀가 마시고 간 쥬스 글라스를 손수건으로 싸서 보관했다. 나중에 지문을 검출해 낼 속셈이었다. 머리카락도 분석해서 기록해 놓을 생각이었다.
그 이튿날 추경감은 강 형사를 불러다 놓고 신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참 반장님도⋯ 반장님은 어째 여자한테 그렇게 약하십니까? 신지혜가 왜 정필대와 원수지간이 되었나 하는 것을 꼭 캐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신문 좀 보세요.”
강 형사는 투정부리듯 볼멘소리를 하고는 석간신문 사회면을 추 경감 앞에 펼쳐 놓았다.
「정필대 씨 자살 사건 배후 있는 듯」
큼직한 활자가 눈을 찔렀다. 기사의 내용은 경찰이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요지였다. 모종의 정치적 음모가 배후에 있는 것 같다는 분석이었다. 정필대는 야당 출마 예상자 중 신진 세력으로 가장 부각된 후보였다는 것이다.
반면 자민당 후보인 차주호는 집권당에서 꼭 당선시키고자 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해 놓았다. 꼭 집어서 쓴 기사는 아니지만 여당 후보의 가장 큰 난적을 고의로 제거시킨 것이 아니냐는 뜻을 은근히 비치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제멋대로 쓰라지.”
추경감은 이마를 찌푸리며 벌떡 일어섰다.
“문제는 저희들이 범인을 빨리 잡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트집 잡기 좋아하는 기자들에게야 좋은 꺼리 생긴 것 아닙니까?”
추 경감은 아무 말도 않고 실내를 왔다 갔다 하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방태산이란 자가 수상하지 않아?”
“예?”
강 형사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친구 지금은 보수당이라고 했나? 그 친구 경력을 보면 권모술수깨나 쓸 인물이야. 그 친구 그날 알리바이를 좀 조사해 보구⋯ 선거 사무실 주변도 조금 알아봐. 아주 행실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정보과에서 들은 일이 있어. 데리고 있는 비서며 여자 선거 운동원 등 닥치는 대로 식한다는 소문이야.”
“식이라뇨?”
강 형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먹을 식. 천자문도 몰라?”
“아, 예, 헤헤헤.”
강 형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신지혜는 정필대가 살해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런 걸 보면 방태산이나 차주호 측근 쪽에서 무슨 관계가 없는지 좀 알아 보라구. 난 아무래도 방태산이란 자가 수상하단 말야.”
“또 노 형사의 육감입니까?”
“내 육감이 틀린 일 있어?”
“그렇다고 맞은 일은 있습니까?”
추 경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입을 다물었다.
“경감님, 정필대가 자살한 권총에선 정필대 외의 어떤 지문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왼손잡이에다 왼쪽 관자놀이를 쏜 것입니다. 이론상으로 자살에 무리가 없죠.”
강 형사가 추경감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말했다.
“그게 수상하단 말야. 정필대를 쏘아 죽인 뒤 권총의 지문을 깡그리 지우고 정필대 왼손에 쥐여 놓았다고 볼 수밖에 없어. 그렇지 않으면 정필대가 정신 이상자가 아닌 이상 대낮에 허름한 여관에 들어가 발가벗고 권총 자살을 할 수가 없어.”
“하긴 정필대가 무엇 때문에 그 여관에 갔느냐 하는 것이 최대의 의문입니다. 그다음 하필 왜 그 시간에 같은 제13선거구 출마 예상자인 차주호가 거기서 여비서와 함께 있었느냐 하는 것도 의문이구요.”
“그건 그곳이 사람 눈을 피하기 쉽고 선거구와 가까우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추 경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강 형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거기서 죽은 박철호란 녀석과 도망친 또 하나의 사나이⋯ 그 누군가 최장배인가 장대인가 하는 녀석도 무슨 상관이 있을 거야.”
추 경감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이놈들 배후에 혹시 방태산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다음엔 차주호가 당할지 모르죠.”
“쓸데없는 소리 그만두고 어서 방태산과 신지혜 관계나 알아봐.”
추경감이 의자에 털석 주저앉아 신문 사회면을 다시 보았다.
아무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나 마나 그것도 ‘식’한 관계일 것입니다.”
강 형사는 그렇게 말해 놓고 추 경감을 흘깃 보았다.
“아이들 앞에선 냉수도 못 마신다고 하더니 쯧쯧쯧⋯ ”
추 경감이 혀를 찼다.
“저도 천자문 뗀 지가 20년이 넘었습니다. 아이들이라뇨?”
“어이구 넉살 하곤⋯ 여태 장가도 못 들었으면서 아이들 소리는 듣기 싫은 모양이구먼.”
“그 방태산이란 사람 말입니다.”
강 형사가 추 경감 앞에 의자를 바싹 당겨 놓고 말을 계속했다.
[작가소개] 이상우; 60여 년간 편집기자와 경영인으로 일한 언론인 겸 추리 소설가다. 한국일보, 서울신문, 국민일보, 파이낸셜뉴스 등 13개 언론사에서 편집국장, 대표이사 등으로 일했고, 스포츠서울, 스포츠투데이, 굿데이를 창간했다. 오랜 경험과 기록을 바탕으로 역대 정권의 언론 탄압과 견제, 정계의 비화를 다룬 저서와 소설이 4백여 편에 이른다. 특히 추리와 정치를 깊이다룬 소설가로 유명하다. 대한민국 문화포장, 한국추리문학 대상 등을 받았다. <신의불꽃>, <역사에 없는 나라>, <악녀두번 살다> <세종대왕 이도> 등 베스트 셀러가 있다. |
온라인뉴스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