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제 명따라 사는 거지. 용서는 무슨...”
이규석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애절함이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여느 어머니라면 아들 앞세운 어미라고 자책도 하고, 아들 잃은 슬픔에 혼절할 만큼 울었겠지만 이규석의 어머니는 싸늘하리만큼 침착했다.
“오빠한테는 연락이 되었니?”
머쓱해진 김명우가 예은이한테 물었다.
“이번에 봉사 간 곳이 워낙 오지라 전혀 연락이 안 돼요.”
어머니와 딸 둘이서만 상을 치러야 할 처지였다.
“삼촌과 고모는?”
“삼촌네 식구는 영국 가 계시고요, 고모네도 해외여행 가서 발인 전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불쌍하게 산 친구가 가는 길도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가 뒷산 바위에서 뛰어내렸다고? 그때 정황을 자세히 좀 말해 다오.”
김명우가 묻자 예은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개를 데리고 뒷산을 올랐던 등산객이 발견했대요. 개가 짖으면서 등산로 밖의 숲으로 자꾸 끌고 가기에 가 봤더니 아버지가 커다란 바위 아래에 떨어져 있었대요. 이미 숨져 있으셨대요. 경찰이 보기에 새벽 2시경에 돌아가신 것 같대요.”
한밤중에 등산하다가 실족할 리가 없으니 일부러 산으로 가서 투신자살한 것일 거라는 게 경찰의 추측이었다.
“한밤중에 산에 올랐다고?”
자살이 아닐 거라는 김명우의 짐작이 틀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예. 어쨌든 경찰에서는 부검을 한 다음 결론을 내릴 거래요. 그래서 발인 날을 못 정하고 있어요. 상조회사에서 우선 빈소부터 차리는 거라고 해서 이렇게 준비했어요.”
상조회에서 나온 여자가 어느 상가에서나 똑같이 나오는 흰 쌀밥과 육개장, 반찬 몇 가지와 떡, 과일, 음료수 등을 내왔다. 저녁을 이미 먹은 뒤인 김명우는 떡을 하나 집어 들어 천천히 씹으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혹시 그 일과 관련된 것 아닐까?’
그때 문득 김명우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얼마 전 이규석이 벌에 쏘여서 오피스텔에 나타났다. 벌에 쏘인 자국뿐만 아니라 온몸이 가렵다며 연신 이곳저곳 긁어댔다.
“어디 벌초라도 다녀왔어?”
김명우의 물음에 이규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니 보물 지도 좀 숨겨드리느라고.”
“보물 지도?”
“그런 게 있다네.”
매일 밤 피난 보따리를 싸던 이규석의 어머니는 몇년 전부터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어머니는 피난 보따리의 맨 밑에 접어 넣던 누비이불을 뜯었다. 거기에서한지로 만든 서류 봉투가 나왔다. 요즘으로 치면 B5 용지만 한 크기였다.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하고 낡은 것이었다.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꽤 두툼해 보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어머니는 그것을 비닐봉지를 여러 겹 해서 싸더니 다시 물이 안 새는 밀폐용기에 담았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넓적한 테이프로 여러 번 감아 완전 밀폐를 했다.
“이걸 저기 감나무에서 동쪽으로 1미터 떨어진 곳을 1미터 깊이로 파고 묻어라.”
어머니는 마당 한편에 서 있는 감나무를 가리켰다. 전쟁이 났을 때 피난 보따리의 누비이불 속에 숨겨서 갖고 다니다가는 잃어버리거나 빼앗길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 이게 뭡니까?”
밀폐용기를 땅속에 파묻으면서 이규석이 물었다.
“보물지도다.”
어머니는 누가 들을세라 속삭이듯 대답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
권경희 작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