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석이 매일같이 김명우의 오피스텔을 찾아오던 어느 날, 두 사람이 마주앉아 아침 커피를 하는데 둘의 휴대폰 문자 메시지 수신음이 동시에 울렸다.
“영철이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네?”
고등학교 동창회 총무한테서 온 것이었다.
“나한테도 왔어.”
이규석이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더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누군 참 좋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도 하고.”
김명우는 자기 귀를 의심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좋다니 무슨 말일까?
“뭐라고?”
김명우가 되묻자 이규석이 자기 말을 확인해 주었다.
“영철이가 부럽다고. 어머니가 돌아가 주셔서...”
너무도 충격적인 말에 김명우는 뭐라고 대꾸를 하지 못했다.
“네가 예전에 이런 말 했지? 자식이란 어머니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살아 계시다는 자체만으로도 힘이 나는 법이라고...”
“그렇지. 나는 일찍이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어머니 있는 아이들이 많이 부러웠어. 특히 너희 어머니처럼 지적이고 깔끔한 분은 더욱...”
“나는 그 반대야.”
“반대라면?”
“어머니가 살아 계셔서 나는 아예 없다고. 어머니가 내 인생을, 아니지 나라는 존재 자체를 통째로 삼켜버린 것 같아.”
함께 하루를 같이 보내면서도 정치 얘기 또는 동창 소식이나 짤막하게 전해주던 이규석이 그날은 긴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주로 어머니 얘기였다.
“내가 왜 재혼을 안 하는 줄 아나?”
이규석은 30대 중반에 결혼해 3년 만에 이혼해서 여지껏 독신으로 살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혼자 사는 것이 안타까워 김명우가 여러 차례 재혼을 권유했으나 이규석은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어머니 때문이야. 오죽하면 아내가 핏덩이 아이 둘을 버려두고 가출했겠나? 나라도 그랬을 거야.”
이규석의 어머니는 평양 갑부의 딸로 일제시대에 동경에 유학해 사범학교를 다닌 엘리트였다. 육이오 때 남한으로 피난하기 전까지 평양의 명문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런 시어머니의 눈에 가난한 집안 출신에 고졸 학력의 며느리가 눈에 찰 리가 없었다. 툭하면 “근본도 없는 천박한 것이...” 하면서 며느리를 구박했다.
아내와 호적을 정리한 이규석은 이후 어머니를 모시고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왔다.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평양 갑부의 딸, 조선시대 엘리트 여성으로 대접 받기를 바라셔.”
이규석의 어머니는 친구가 없었다. 수준이 안 맞아서 사귈 만한 친구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집 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어머니가 안타까워 이규석이 어머니한테 동네 노인정에 한 번 나가 보시라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노인정에 나가는 날부터 불만이 많았다.
“늙은이들 하는 소리가 그저 자식 자랑뿐이니... 그까짓 행정고시 붙은 게 그리 대수라고. 검사 나부랭이 아들 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반기문 사무총장이나 김용 총재쯤은 돼야 자랑할 만하지.”
며칠 안 돼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노인정에서 노상 켜 놓는 텔레비전에서 홍콩 반환 15주년 기념식을 거행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러자 누군가가 말했다.
“툭하면 홍콩 간다 홍콩 간다 하는데, 홍콩이 어디 있어?”
“아마 일본에 있을걸?”
“무슨 소리, 월남에 있어. 내가 거기 갔다 왔잖아. 우리 애들이 비행기 표 사 줘서 영감하고 갔다 왔어.”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이규석의 어머니는 당장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그런 무식한 여편네들하고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자체가 굴욕이야. 수치고 모욕이라고!”
어머니의 눈에는 경멸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다고 남의 어머니 돌아가신 것 보고 부럽다 할 정도야?”
김명우는 이규석을 나무라듯 물었다. 이규석은 그런 김명우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디 그뿐인 줄 아나? 어머니는 밤마다 보따리를 싸신다네.”
육이오 때 남편과 자식들을 데리고 피난 내려오다가 인민군 총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남한에 내려와 60년을 살면서도 전쟁 걱정으로 나날을 보냈다. 이규석 어머니의 전쟁 걱정은 도가 지나쳐 정신질환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 하나의 증상이 피난 보따리 싸기였다. 이규석의 어머니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커다란 보따리를 쌌다. 누비 솜이불과 양은 냄비, 숟가락과 쌀, 라면, 플라스틱 김치통에 담은 장아찌, 부탄가스통, 성냥과 라이터, 초 등이었다. 전쟁이 나면 즉시 들고 피난 가서 연명할 수 있도록 아주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밤마다 보따리를 싸서 머리맡에 두었다가 아침이면 다시 풀어 놓는 일을 60년 넘게 반복하고 계셔.”
전쟁 걱정뿐만 아니라, 누군가 집의 물건을 훔쳐갈까 봐 밤이면 문단속을 열 번은 해야 잠자리에 들었다.
“내 평생소원이 뭔 줄 아나? 내 방 한 번 가져보는 거야.”
“응? 방이라고? 자네 방이 여태 없었단 말인가?”
학교에는 연구실이 있고 집에도 서재를 갖추어 놓았고 광화문에 오피스텔 연구실까지 갖고 있는 김명우로서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불광동 집은 방이 세 칸이야. 어머니가 한 칸, 아들이 한 칸, 딸이 한 칸 쓰고 있지. 나는 평생 거실에서 살고 있어. 나도 자네처럼 내 서재 한 번 가져보는 게 꿈일세.”
이규석은 그동안 모아 온 오래된 국어 교과서들을 지하 창고에 두는 게 제일 가슴 아팠다. 습기가 많아서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딸과 어머니가 안방을, 여동생이 작은 방을, 아들이 건넌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동생이 시집가게 되자 중학생이 된 딸이 냉큼 그 방을 차지했다. 할머니한테서 냄새가 나서 같은 방에 못 살겠다고 했다.
그런 딸에게 이규석이 “아빠도 방 하나 있으면 좋겠다, 아빠한테 양보할 수 없겠니?” 하고 사정했지만 딸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런 아빠가 불쌍했는지, 다음 날 딸이 묘안이라며 제의해 왔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
온라인뉴스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