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척 회사서 일하다 독립 후 ‘대우실업’ 세워
15년 만에 침묵 깨고 “대우 해체 진실 밝히겠다”
[일요서울 | 이지혜 기자]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펴낸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차트에 진입하면서 김우중 전 대우회장이 주목을 받고 있다. 김 전 회장은 1990년대 당시 대한민국 3대 기업이었던 대우 그룹의 회장이었지만 1997년 IMF로 인해 그룹이 해체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 후 검찰 조사를 피해 베트남으로 도피했다가 귀국해 실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특사로 풀려났다. 대기업 총수에서 수배자가 됐던 김 전 회장의 과거를 [일요서울]이 되짚어봤다.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 전 회장은 6남매 가운데 4째로 태어났다. 김 전 회장의 아버지 김용하씨는 당시 대구사범학교(대구교육대학교) 교장이었다. 김씨는 경기공립사범학교(현 서울교육대학교) 교장과 제주도지사를 지냈으며 6·25전쟁 때 납북돼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맥·자기 능력으로 100만 달러 수출 성공
김 전 회장은 아버지를 여읜 슬픔에서도 영특한 머리로 학업에 열중해 연세대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친척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서 일하다가 1967년 독립해 500만 원의 자본금으로 ‘대우실업’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대우실업은 김 전회장이 대출받은 자금으로 해외 회사에 오퍼를 내고 계약성사 뒤 상환하는 독특한 자금동원 능력과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맥으로 창업 5년 만에 100만 달러 수출을 기록했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발맞춰 영진토건(대우개발),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문(대우전자),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등을 인수하면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김 전 회장에게는 ‘킴기즈칸’(김+(칭)기즈칸의 합성어)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김 전 회장은 대우실업에서 ㈜대우로 사명을 변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대우는 곧 10대 재벌로 성장했다.
또 김 전 회장은 동유럽의 민주화, 시장개방 바람 등에 편승해 구 공산권 국가로도 진출했다. 그 위력은 대단해서 대우의 수입차 생산 거점지였던 폴란드의 지방 공무원의 관용차가 대우차 구종이었고 수도 바르샤바에는 세종대왕 고등학교까지 생길 정도였다. 1998년 ㈜대우는 41개의 계열사, 10만여 명의 직원을 거느릴 만큼 성장했다. 자산기준으로는 현대에 이어 재벌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IMF와 함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해외 투자를 주로 하던 대우는 당시 부채비율이 400% 이상인 ‘속빈 강정’이었다. 내부구조는 매우 취약했던 것이다. 김 전 회장은 쌍용을 인수하며 확장정책을 이어나갔으나 뒤처진 제품 경쟁력과 소홀했던 구조조정으로 인해 어려워진 경영여건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1999년 8월 어음 만기 사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우는 해체됐다. 대우 해체 뒤 김 전 회장에 대해 사기 대출 혐의로 수사가 진행되자 2개월 뒤인 10월 김 전 회장은 베트남으로 도피했다.
해외 도피자 명의로 공개수배를 받기도 했던 김 전 회장은 도피생활 5년6개월 만인 2005년 귀국했고 바로 검찰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2006년 징역 8년 6개월과 벌금 1000만 원, 추징금 17조 9253억 원을 구형받고 실형을 살다가 2007년 말 대통령 특사로 사면됐다. 그러나 지난해 기준 김 전 회장이 납부한 추징금은 887억 원에 불과하다. 아들 김선용씨가 유령회사를 통해 600억 원대에 이르는 베트남 하노이의 고급 골프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김우중법’ 개정이 추진되기도 했다.
“DJ정부 관료 손에 기획해체… 30조 손실”
추징금 논란으로 베트남에서 머물던 김 전 회장은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가 펴낸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출판 기념회에 맞춰 귀국했다. 그리고 대우그룹 해체 15년 만에 입을 열었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이 김대중 정부의 관료에 의해 기획해체 됐고 이로 인해 한국 경제가 30조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김 전 회장은 “DJ에게 경제대통령이 돼 달라고 요청했지만 정부 논리와 반대되는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면서 경제 관료들과 충돌하자 대우의 유동성 악화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또 김 전 회장은 당시 공개석상에서 “관리들이 열심히 안 한다. 자기 할 일은 안하고 핑계만 댄다. 이래서 나라가 어떻게 되겠나? 자기들이 못하면 자리를 비켜줘야지… 그러면 얼마든지 좋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데, 안 비켜줘서 할 일도 못하게 한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청와대에 하루가 멀다 하고 대우에 대한 나쁜 보고가 올라갔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정부에서 갑자기 수출이 나쁜 것처럼 이야기하고, 수출금융이 막혀 벌어진 일들을 대우가 잘못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면서 “당시 정부의 의도가 있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김 전 회장의 주장을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이었던 강봉균 전 장관이 반박하면서 대우 해체 원인에 대한 진실공방에 불이 붙은 상황이다. 강 전 장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몇몇 경제 관료가 음모해서 대우를 해체했다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현실적으로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며 “실제로 그랬다면 15년간 그 사실이 숨겨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대우가 망한 건 시장에서 버려졌기 때문”이라고 말해 김 전 회장의 대응이 기대되고 있다.
<참고-엔하위키미러>
DJ 대북사업 거절로 인해 미운털 찍혔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대우 해체는 김대중 정부 관료들의 음모”라고 밝힌 가운데 과거 떠돌던 김 전 회장과 DJ간의 소문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당시 DJ정부는 대북사업 자금 충당을 위해 기업에 협찬금을 요구했는데 삼성, 현대 등은 거액을 납부했지만 대우는 이를 거부했다는 소문이었다. 이로 인해 대우는 정부의 미움을 받게 됐고 마침 IMF로 인해 대우그룹에 위기가 닥치자 본보기로 해체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삼성이나 현대도 구조조정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김 전 회장은 1998년 DJ정권 출범 직후 경제 부총리로 한때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민주당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김 전 회장의 절친인 이종찬 의원이 국가정보원장으로 발탁되면서 김 전 회장과 DJ정부의 관계는 화기애애했다. 또 김 전 회장은 이보다 앞선 1992년 남한 기업인 최초로 북한을 방문해 남포공단 투자 합의를 이끌어 낸 적이 있었다.
이후에도 김 전 회장은 독자적인 대북커넥션을 유지하면서 남북경험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김 전 회장이 대북사업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정권의 보복을 당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거기에 대우그룹 해체 와중에 김 전 회장의 친형인 김덕중씨는 교육부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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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 기자 jhook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