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자금 설 땅 없어…인맥·학연으로 승부
캐낼수록 더 미궁 빠져…수사당국 ‘당혹’
[일요서울 | 이범희 기자] 간판급 기업의 임직원이 ‘뇌물사건’으로 법정에 서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돈 로비부터 사업로비, 최근 들어서는 몸 로비의혹까지 그 내역도 다채롭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런 로비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일요서울]이 그 세계를 엿봤다.
“로비에서 으뜸은 당연 ‘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돈을 주지 않고 돈을 버는 법을 알려준다. 그러면 탈이 없고 오랫동안 그 인맥을 유지할 수 있다.”
영화 대사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현실이 되고 있다. 진화된 로비의 실체는 사정당국의 혀를 내두를 정도로 교묘히 법망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돈을 건네는 건 한 번에 그치지만 사업권을 내주면 그 사업이 끝날 때까지 그 인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활용도가 높다.
한국 경제발전에서 정경유착의 뿌리는 깊다. 과거 도면 하나만 갖고 수조원의 은행돈을 빌려 기업경영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경제부처 실무자들이 도저히 사업성이 없고 산업정책 차원에서 무리한 사업이라고 ‘불가’판정을 내리는 대규모 프로젝트도 통치권자의 말 한마디면 만사형통이던 때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거액의 돈이 오고 갔음은 불문가지다.
기업-관료-정치권-은행 등이 물고 물리는 검은 커넥션도 활개를 쳤다. 과거 정권에서 “대형 사업은 반드시 구린 데가 있다”는 말이 정론처럼 들렸다. 그것이 국가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때 늦은 후회라는 사실에 근접한 시기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보그룹 사태다. 아무에게도 검증받지 못한 코렉스 공법의 제철소에 금융권이 앞 다퉈 수조 원을 대출해줬고 결과는 엄청난 후폭풍을 양산했다. 기업이 부도를 맞았고 관계돼 있던 하청업체의 줄도산으로 이어졌다. 국내경제의 악영향이 상당했다는 후문이다.
도산하거나 도산 위기에 있는 대부분 그룹의 이면에는 돈의 로비가 끊임없이 제기됐다.
현재까지도 로비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그 수법이 더 다양해질 뿐 사그라들지 않는다.
최근에는 젊은 여직원을 고용해 현역장교를 상대로 로비를 벌인 방위산업체 직원이 대거 검찰에 적발된 사례도 있다.
전·현직 군 간부들이 군사기밀을 빼내 해외 방위산업체에 제공한 사건으로 군·내외에 충격을 안겼다.
이들은 지속적인 금품 향응제공으로 영관급 현역 장교들을 관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로비를 통해 이들은 방위력 개선사업 관련 군사기밀과 차기 호위함 전력 추진, 소형 무장헬기 사업, 항공기 항재밍 GPS체계와 관련한 군사기밀 31건을 21개 외국 업체와 4개 국내업체에 누설한 혐의다.
이들 업체는 현역장교에게 500만 원을 공여하거나 수시로 고급 유흥주점에서 향응을 제공하면서 장기적으로 친분관계를 형성해 왔다. 또 상대의 취미를 파악해 고가의 악기(250만 원 기타)를 선물하거나 회식비 명목으로 체크카드를 지급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던 것으로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또 이들 무기중개상은 자신의 신분위장을 위해 쌍둥이 형의 여권·인적사항을 활용해 해외로 출입국 하거나 군 관련 시설에 출입했고, 젊은 여직원을 고용해 현역장교들과 스키장, 등산, 저녁식사 자리에 참석시켜 친밀도를 높이는 방법도 활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 일로 무기중개인 2명이 구속 기소됐고, 중령과 소령 등 2명의 현역 장교도 국방부보통검찰부에서 구속 기소됐다.
주목받는 新로비는
일각에선 돈을 갖고 좌지우지했던 기업 로비는 종언을 고할 상황이라는 말도 회자된다.
이젠 직접적으로 ‘돈’을 주는 것보다 ‘사업’을 밀어주고 거기서 ‘돈’을 챙기게 하는 로비가 각광받고 있다고 한다.
수익성이 없는 프로젝트에 대해선 우선 은행이 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부실 사업에 돈을 대줄 경우 그 결과에 대해 은행 스스로가 책임져야하기 때문에 과거처럼 말뿐인 사업계획은 고개 들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젠 ‘백(뒷배경)’만 믿고 기업이 빚잔치 경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익성과 사업성이 이어진 프로젝트를 갖고 철저한 시장논리를 통해 해당자를 설득해야 한다. 때문에 이젠 기업의 로비스트는 철저한 이론무장이 필요하다. 그들에게는 인맥과 학맥, 지연과 확고한 사업성을 제시할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하다.
설령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무리하게 사업을 따내더라도 사업이 실패할 경우 소액주주들이 가만 놔두지 않는다. 오너가 물러나야 하고 기업이 문을 닫아야 한다. 이에 로비의 시대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에선 로비로 인한 부당이득을 못하게 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재벌 개혁의 성공여부는 입법 활동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국회의원을 보호 감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들 대부분이 재벌기업의 적극적 로비 대상이기 때문이다.
로비와 관련해 위법활동이 드러나는 국회의원들과 해당기업은 국민의 이름으로 냉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벌들의 경제범죄에 대해 특별가중 처벌하여야 한다고도 덧붙인다. 재벌의 실수와 범죄를 습관처럼 관용으로 대한 것이 결국 한국경제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인지 2012년 초 박영선 당시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이 발언한 “재벌들을 위한 로비창구 역할을 해왔던 전경련 해체 선언해야한다"고 한 말이 재차 떠오른다.
박 의원은 당시 “재벌 딸들이 빵집에서 철수한다고 재벌 독식이 근절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면서 “그동안 재벌을 위한 로비창구 역할을 주로 해온 재벌 스스로 선언해야 한다. 전경련의 해체를 촉구한다"고 요구했다.
이어 박 의원은 한나라당을 겨냥 “재벌이 잘돼야 한다는 낙수(落水)이론(Trickle Down Effect)을 펴면서 재벌이 해달라는 대로 법을 날치기까지 하면서 통과시켰다”고 겨냥하고, 경제 민주화 조항을 “당 정강정책에 넣겠다고 아우성”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skycros@ilyoseoul.co.kr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