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의 의무’는 누구나 똑같이 지는게 원칙
형평성 무너진 군 복무,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종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지난 29일 최태원 SK그룹 회장 차녀 최민정씨가 해군 사관후보생에 합격했다. 최씨는 오는 15일 해군사관학교에 입영해 11주간 기초 군사 훈련을 마친 뒤 12월 1일 정식으로 소위에 임관된다. 함정승선 장교를 지원한 민정씨는 소위 임관 후 후반기 교육을 받아야 된다. 보직이 부여되면 약 1~2주의 전문화 교육도 이수해야 된다. 해군 관계자는 “여성은 보통 육상 근무를 지원하는데, 배를 타려고 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며 “장교는 통상 1년 단위로 보직 변경 신청을 할 수 있어 담당 업무를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최씨의 해군 사관후보생 합격 소식은 지난 한주 동안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재벌가들의 자녀는 군면제’라는 공식이 일반적이었는데 최씨가 이러한 통념을 깨트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의 몸으로 말이다.
고대 로마 공화정의 귀족들은 전쟁에 자진해 참여했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공격으로 16년간 이어진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에 귀족을 대표하는 최고위 관리인 집정관 13명이 전사했다. 당시 로마에서는 병역의무를 실천하지 않은 사람은 집정관이나 호민관 등 고위공직자가 될 수 없었다. 사회지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이르는 말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로마 귀족들에게 불문율과도 같았다. 그들은 자신이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 병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사회고위층=병역면제’라는 공식이 고위층의 필요충분조건처럼 자리 잡고 있다.
재벌가는 2~3세까지 세습
국내 재벌가부터 살펴보자. 먼저 범삼성가의 경우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군 복무를 마쳤으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은 질병으로 면제받았다. 이 회장의 조카인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도 군에 가지 않았다.
이재현 회장은 유전병 ‘샤르코-마리-투스병’으로 면제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샤르코-마리-투스병은 손발의 근육이 점점 약해져 심하면 걷지도 못하게 되는 희귀질환이다. 이 병의 근본치료법은 없다. 증상을 완화할 수 있을 뿐이다. 심해지면 근육 변형을 교정하는 수술을 한다. 인구 10만명 당 36명꼴로 발생하며 50대를 넘어서 급격히 악화된다. 정용진 부회장은 과체중으로 제2국민역 판정을 받아 군대를 가지 않았다.
이인희 한솔고문의 세 아들 동혁(한솔그룹 명예회장), 동만(전 한솔아이글로브 회장), 동길(한솔그룹 회장)씨도 나란히 군면제를 받았다.
범현대가에서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 등이 모두 군에 다녀왔다. 하지만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등은 병역 면제자다. 정몽근 명예회장은 건강상 이유로 정의선 부회장은 ‘담낭 결제’라는 병명으로 면제 받았다.
LG가에서는 구본무 LG그룹 회장,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등이 정상적으로 병역을 마쳤으나, 구본진 LG패션 부사장,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 구자준 LIG손해보험 회장의 장남과 차남 등은 면제됐다.
GS가의 경우 허창수 회장의 아들 등이 면제됐으며, SK가에서는 최태원 회장, 최재원 SK E&S 부회장 등이 군에 가지 않았다. 최태원 회장은 과체중,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은 시력문제로 면제 받았다.
이밖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조현준 효성 사장, 한진가의 조정호 메리츠금융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 등도 병역 면제를 받았다. 김승연 회장의 셋째 아들은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병역 특례 대체복무를 마쳤다.
신동빈 회장은 국적이 문제가 됐다. 일본에서 태어난 신동빈 회장은 신격호 회장의 한국 호적에도 이름을 올려 이중국적 이유로 면제를 받았다. 신동빈 회장은 1996년 일본 국적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가 남성들의 병역 면제 사유는 질병이 가장 많다. 다음으로는 외국 국적 취득에 따른 국적 상실, 과체중, 시력 이상, 장기유학에 따른 외국 영주권 취득 등이다.
대통령·총리 등 고위직도 多
고위공직자의 병역면제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국군통수권자였던 이명박 전 대통령도 군 면제 판정을 받았다. 기관지확장증 때문이다.
인사청문회장에서 군면제 문제는 단골메뉴다. 과거 한승수 총리, 정운찬 총리, 김황식 총리로 이어지는 국무총리 병역면제 시리즈는 국민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정운찬 총리는 여러 차례 입영을 미루고 고령(31세)을 이유로 병역을 면제 받았다. 특히 부친을 일찍 여읜 독자(일명 ‘부선망(父先亡) 독자’)에게 주어지는 단기(6개월) 보충역 근무를 할 수 있었지만 이마저도 ‘이행하지’ 않았다. 고의로 병역을 회피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2010년 4월 천안함 사건이 벌어진 직후 청와대 벙커에서 열린 긴급안보관계장관 회의 참석자 중 대통령을 포함해 국무총리, 국정원장 등 수뇌부가 군대 경험이 없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은 턱 관절염으로 군대를 가지 않았다. 1974년 공무원 채용 신체검사 때는 정상이었지만 2년 후 군 신검 땐 정상이 아니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정정길 전 대통령실장 등은 질병 또는 시력 때문에 병역이 면제됐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도 질병으로 병역을 면제 받았다. 김 전 지사는 지난 1971년 대학에서 제적당한 뒤 장티푸스에 걸려 고향집으로 내려가 요양을 했다. 그 와중에 그는 보안사에 끌려가 강제징집 직전 신체검사에서 과거 중이염 수술 후유증이 발견됐다. 결국 중이근치술 후유증으로 면제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김 전 지사는 병역면제 판정을 두고 많은 의혹을 받아왔다. 중이염은 군대를 면제 받을 정도의 질병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피부질환으로 병역면제를 받았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77년에서 1979년 사이 재학생 신분을 이유로 징병검사를 연기했다가 1980년 알러지성 피부질환인 만성 담마진을 사유로 제2국민역 판정을 받고 병역이 면제됐다. ‘담마진’이란 쉽게 말해 두드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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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