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지기 강병규씨가 밝히는 故 최규하 전대통령의 모든 것
“비망록은 제3의 장소에 보관 중이다”
40년지기 강병규씨가 밝히는 故 최규하 전대통령의 모든 것
“비망록은 제3의 장소에 보관 중이다”
  • 정은혜 
  • 입력 2006-11-02 15:21
  • 승인 2006.11.02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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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비망록’ 실체 추적


‘비운의 대통령’ 최규하 전대통령이 작성한 ‘비망록’의 실체가 사실로 드러났다. 이로써 1980년을 전후한 시점에서 불거진 ‘역사적 비밀’이 공개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한층 배가됐다. <일요서울>은 지난 25일 최 전대통령과 사제지간이자 40년지기인 강병규(75·사진)씨를 만나 비망록의 존재여부를 확인하고, 최 전대통령에 대한 모든 것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최 전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고 있는 최흥순 비서실장은 “8,9,10대 때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강씨는 최 전대통령과 정치권에 있을 당시부터 친교를 맺어온 사이”라면서 “평소 가깝게 지내고, 최근까지 자택에 드나든 최측근은 강씨 뿐이었다”며 그의 신상에 대해 확인해 주었다. 강씨는 “최 전대통령이 죽음을 맞기 1주일 전, 그와 ‘밀담’을 나누었다”며 “모든 내용을 밝힐 순 없지만, 이날 밤 ‘비망록’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최규하 전대통령은 항상 꼼꼼하게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비망록은 일종의 ‘모음집’ 형태로 제3의 장소에 보관 중이다.”
지난 25일 오후 12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강씨가 밝힌 내용이다. 강씨는 인터뷰에 앞서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매주 한 번씩 최 전대통령을 찾아뵙는데 18일 밤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며 그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했다. 이어 그는 “비망록은 실제 존재하며, 집이 아닌 곳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며 “이는 A4용지 및 메모지에다가 행사 및 과거사 등을 빼곡히 적어놓은 것을 스태플러로 찍어 취합해 놓은 수준이며, 일기형식은 아니다”라고 분명히 전했다.

‘은행금고’에 있을 가능성
강씨에 따르면, 2002년 부인 홍기여사를 떠나보내고 병세가 점차 악화돼 최근 와병 중이던 최 전대통령은 18일 강씨와 마주 앉아 장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최 전대통령은 여느 때와 달리 ‘내가 자네 오래 볼 수 있겠나’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고 한다. 강씨는 “당시엔 미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최 전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시한 듯하다”며 씁쓸해했다.
이어 강씨는 “최 전대통령은 평소에 주로 5·6공 시절을 중심으로 최근 정권까지, 나라 걱정 및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다”며 “이날도 주로 이런 화두를 중심으로 가다, 비망록 관련 얘기가 오갔다”고 전했다.
강씨는 “비망록을 은행금고에 보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만, 최 전대통령은 끝내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며 “최 전대통령의 성격이 워낙 과묵한데다가 원래 남을 잘 믿지 않는 스타일이라, 실제 금고에 보관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강씨는 집안 내부에 존재하진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강씨는 “앞서 말했듯, 최 전대통령은 어느 누구도 쉽게 믿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간병인과 경호원들을 분명 의식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금고에 귀중품, 유언장 등과 함께 비망록을 보관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강씨는 ‘0%’라고 보고 있다. 그는 “최 전대통령은 워낙 검소했으며,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라곤 강원도 원주에 있는 그의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밭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폭발적 내용’ 상세히 기록
초미의 관심사인 비망록의 내용에 대해 강씨는 “상당히 폭발적”이라는 말로 비망록의 파문을 예고했다. 그는 “최 전대통령은 재직 당시 및 각종 행사 때마다 있었던 일들을 일일이 적어놓았다”며 “신군부 압력과 관련, 격동의 상황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돼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알려질 때 알려지더라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것. 또, 장을 치르는 중에 고인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공개시기 세간의 관심
최 전대통령의 ‘비망록’에 대해 이토록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유는 그가 ‘역사의 진실’에 대해 끝까지 함구한 채 세상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최 전대통령은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린 직후 5·18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가 열렸지만, 끝내 증언을 거부했다. 또 김영삼 정부 시절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재판때 증인으로 법정에 강제 구인됐지만, 이때도 ‘재임 중 사안’이라는 이유로 공개 진술을 거부했다. 각종 언론사의 집요한 추궁에도 그는 ‘집념’에 가까울 정도로 침묵을 지켰다.
최흥순 비서실장은 “최 전대통령이 끝까지 함구로 일관한 것은 전직대통령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라며 “조사를 받거나 과거의 사건에 대해 일일이 해명하고 증언한다는 것은 전례를 만드는 것이고,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마저 없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검소, 청렴했던 일생 ‘귀감’
이는 최 전대통령의 ‘돌부처상’ 같은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최 전대통령은 크게 어수룩한 것 같으면서도 결코 어리석지 않았다”며 “그의 증언거부는 정략에 놀아나지 않기 위한 자기방어 행위였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최 전대통령의 성품은 ‘성인군자’에 비유되기도 한다. 강씨는 “최 전대통령은 조용한 성품에 민폐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며 “또, 청렴결백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검소해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25일 기자가 서울 마포구 서교동 자택을 방문했을 때, 전직대통령의 거처라고 생각할 만한 아무런 특징이 없어 다소 당황했다. 그의 자택은 초라하고 허름한 2층 양옥에 불과했으며, 여느 전직대통령의 집처럼 곳곳에 경찰이 서성이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자택 맞은편에 조그만 컨테이너박스가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바로 비서관과 경호원들의 근무처이다.
비서관들에 따르면, 최 전대통령은 이곳에서 35년 간 살았으며, 병원에 가끔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특히, 2004년 7월 부인 홍기여사의 작고 후, 줄곧 집에서만 지냈다고 한다. 최 전대통령은 여전히 양은그릇을 쓰고 있으며, 이는 홍기여사가 애용하던 그릇이었다고도 전했다. 인근에 사는 이웃주민 박태수(67)씨는 “최 전대통령 내외는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들이었다”면서 “비누 하나를 사더라도 편리한 가루비누보단 값싼 재래식 비누를 고집했으며, 담배도 가장 저렴한 ‘한산도’를 피우다 담뱃값이 인상되자마자 끊은 걸로 알고 있다”며 그들의 소박함과 검소함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최 비서실장은 “기름을 아끼려고 보일러를 잘 안 켜 집안에 항상 냉기가 돌았고, 딸이 태어났을 때 쓰던 50년 된 선풍기도 그대로 사용했다”며 “게다가 철지난 달력을 잘라 뒷면을 메모지로 사용하는가 하면, 심지어 휴지통에 버린 종이를 다시 꺼내 이면지로 사용하라며 비서관들에게 건네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최 비서실장이 밝히는 일화 한 토막. 그가 1987년 최 전대통령의 비서관으로 처음 일했을 때다. 최 전대통령은 워낙 꼼꼼한 성격 탓에 늘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 각종 행사 및 개인스케줄은 물론이고 지인의 생일, 기념일 등을 일일이 적어놓고 챙긴다는 것. 때문에 최 비서실장이 미처 챙기지 못하는 행사 및 스케줄 등이 있는지를 은근히 떠본다고. 이를 테면, “최 비서관(당시), 내일은 무슨 행사가 없나”, “이맘때쯤 무슨 행사가 있었던 것 같은데…” 등의 식으로 슬쩍 ‘소스’를 제공한다는 것. 지금은 눈빛만 봐도 알지만, 당시에는 거듭되는 착오와 실수에 고생깨나 했다는 후문이다.

퇴임 이후 고난의 연속
최 전대통령은 퇴임 이후 순탄치 않은 나날을 보냈다. 특히, 96년부터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60여년을 해로한 부인 홍기여사가 알츠하이머(노인성 치매의 일종)에 걸린 것. 최 전대통령은 지극정성으로 부인을 간호했으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최 전대통령은 자신의 병과도 싸워야 했다. 90년 미국에서 백내장 수술을 받아 왼쪽 눈이 불편했으며, 2004년에는 오른쪽 눈도 백내장 수술을 받았지만 갈수록 시력이 나빠졌다. 신문과 책 등을 전혀 볼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자, 결국 라디오를 듣는 취미가 생기기도 했다. 최 전대통령은 2005년 8월 응접실에서 낙상, 대퇴부 경골이 부러지는 사고도 겪었다.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한 달 만에 퇴원했으나, 거동이 불편해 지팡이 신세를 져야 했다. 최 비서실장은 “최 전대통령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최근까지 25kg 이상 살이 빠졌다”며 “음식도 잘 먹지 못해 미음과 죽 위주로 무염식 식사를 했다”고 덧붙였다.

노환으로 별세
최 전대통령은 공교롭게도 22일 부인 홍기여사와 마찬가지로 87세에 영면했다. 의식을 잃은 그는 이날 오전 5시 40분께 간병인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최 비서실장은 “간병인의 신고로 119구급대에 의해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숨졌다”고 말했다. 서울대 병원 관계자는 “병원에 도착할 당시 이미 심장이 멈춘 상태였다”며 “의학적 사인은 급성심부전증이지만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최 비서실장은 “최전대통령의 건강이 6개월 전부터 급격히 나빠져 추석 전후에 극에 달했다”며 “간병인과 경호원이 상주하며 24시간 내내 돌봐 왔다”고 전했다. 이어 “최 전대통령이 사망하기 하루 전날인 토요일 오후 3시까지 함께 있었으나, 그가 이렇게 갑작스레 임종을 맞을지는 상상도 못했다”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최 전대통령의 장례는 5일장 형태의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이는 정부 수립이후 12번째로, 최초의 국민장은 지난 1949년 김 구선생의 국민장이고, 가장 최근의 국민장은 1983년 아웅산묘소 테러로 숨진 서석준 부총리 등 16명에 대한 합동 의식이었다.
고인은 지난 26일 영면했다. 자신을 격랑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던 ‘10·26’ 사태가 있은지 꼭 27년 만인 2006년 10월26일, 최 전대통령의 장례식이 치러진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아니면 ‘숙명’일까. 신군부와의 ‘악연’을 가슴에 묻은 채 세상을 떠난 최 전대통령의 비망록 공개시기가 세간의 관심이다. 이에 가족들은 시기를 숙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은혜  kkeunna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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