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할 수 없는 갑을관계…평가대상이 수수료 내고 업체 선정
실제 상환능력으로 최종신용도 도출…유착관계 제거가 관건
[일요서울 | 김나영 기자] LIG건설, STX그룹, 동양그룹, KT ENS. 모두 큰 사태를 일으키고 사라지거나 해체된 기업들이다. 이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해당 그룹이나 일부 계열사의 신용등급이 지나치게 높게 산정됐다는 것이다. 그동안 밀린 과제로 자리했던 계열사 독자신용등급 도입 역시 이 같은 배경에서 추진되는 것이다. 이에 신용평가사들은 물론 재계와 금융권에서도 제도 시행을 앞두고 세부사항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90.2%와 51.6%. 국내 신평사와 국제 신평사가 기업에 매긴 투자적격등급 비중의 차이다. 한국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나이스신용평가 등 국내 3대 신평사는 기업 10곳 중 9곳에 BBB등급 이상을 줬다. 이에 반해 국제 신평사 무디스는 기업 10곳 중 5곳에만 BBB등급 이상을 주며 비율을 절반으로 줄였다.
A등급의 경우에는 이 간극이 더욱 벌어진다. 국내 신평사들은 기업 10곳 중 7~8곳에 A등급 이상을 줬다. 그러나 무디스는 기업 10곳 중 2곳에만 A등급 이상을 매기는 엄격함을 보였다. 수치로 보자면 77.4%와 22.9%로 3배가 넘는 차이다. 신평사들의 등급 인플레이션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모기업 지원 당연시하는 관행
전문가들은 이 같은 등급 인플레이션이 기업과 신평사의 유착관계에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현재 기업들의 신용평가는 직접 수수료를 내고 신평사를 선정해 평가를 받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렇게 되면 신평사는 등급을 매기고 기업은 등급을 받는 대상임에도 전세가 역전된다. 돈을 주는 것이 누구냐에 따라 일종의 갑을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만약 A기업이 B신평사에 신용평가를 의뢰했을 때 B신평사가 A기업에 곧이곧대로 정직한 등급을 부여한다고 가정해보자. A기업은 해당 신평사와 거래를 끊고 다른 신평사에 보다 높은 평가를 의뢰하게 된다. 기업 입장에서는 국내 신평사가 3곳인 만큼 어디에서 등급을 받아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신평사들 역시 기업의 이 같은 등급쇼핑을 막기보다는 거래처를 유지하기 위한 높은 등급부여에 급급했다. 특히 대기업의 경우 몇몇 계열사의 자금흐름이 좋지 않더라도 모기업의 지원을 전제로 한 등급 인플레가 당연시됐다.
이는 LIG건설부터 STX그룹, 동양그룹, KT ENS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사태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앞서 LIG건설은 2011년 법정관리 신청 직전까지도 투자자들에게 대규모의 기업어음(CP)을 판매했다. 당시 LIG건설의 신용등급은 A3-로 투자적격등급의 안정권에 속해 있었다. 자칫 잘못돼도 LIG그룹이 자금을 메워줄 것이라는 투자권유까지 남발됐다.
STX그룹이나 동양그룹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동양 계열사들의 경우 지난해 법정관리 신청을 앞두고 A3- 등급을 유지하면서 동양증권을 통해 CP를 유통시켰다.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고수익을 맛봐온 동양 CP 투자자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물량을 담았다. 법정관리 신청 1개월 전에 와서야 위험 계열사들의 신용등급이 급격히 떨어졌으나 이미 늦은 때였다.
게다가 KT ENS는 올해 법정관리 신청 직전까지 신용등급을 무려 A0로 유지했다. 부채비율이 230%가 넘고 지급보증금이 자본금의 4배에 달하는 기업에 어울리지 않는 평가다. 이 역시 국내 최상위 신용등급인 AAA를 유지하던 모기업 KT의 후광에 힘입은 결과로 파국을 맞이했다.
발행환경 악화 등 부작용도 따져봐야
이 같은 배경에서 추진된 것이 바로 독자신용등급 도입이다. 독자신용등급은 대기업 계열사에 대한 모기업의 지원 가능성을 배제하고 기업 자체의 펀더멘털만을 평가해 산정하는 등급이다. 단지 대기업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신용등급을 주기보다는 해당 계열사의 자체 재무건전성과 사업안정성을 따져보겠다는 의미다.
그간 대기업 계열사들은 통합신용등급을 받았기 때문에 모기업의 신용등급을 따라가는 것이 기정사실화돼 있었다. 앞서 양진수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계열사의 지원 가능성을 감안한 신용등급 평가 관행은 개인 투자자에게 그룹의 지원 가능성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제공하면서 기업의 실제적인 상환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것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일부 해외의 경우도 각 계열사별로 자체적인 등급을 산정해 통합신용등급과 함께 제공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논의만 거듭하며 도입이 늦어져왔다. 이와 관련해 박주근 CEO스코어 대표는 “국내 기업이 해외 국채시장에서 낮게 평가되는 탓도 있지만, 평가 수수료가 국내 신평사의 주 수입원인 데다가 대기업집단의 입김이 평가에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금융당국이 내년에야말로 이 독자신용등급을 도입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히면서 기업들도 여기에 주목하고 있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지난 19일 ‘신용평가제도 개선을 위한 정책토론회’를 통해 “계열사의 지원가능성을 배제한 독자적인 기업신용평가 정보를 추가적으로 제공하는 방안을 내년 중에 시행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신 위원장은 “일련의 기업부실 과정에서 등급 인플레이션, 뒷북 등급조정 등 신용평가 산업에 대한 신뢰성 우려가 확산됐다”면서 “신용평가사의 부정적인 영업행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신평사에 대한 행위규제를 재점검하고 자본시장법 개정 등에 따른 제도개선사항이 엄정하게 집행되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임형준 금융연구원 연구위원도 “복잡한 순환출자 등에 기반한 지배구조에서 계열사의 암묵적인 지원을 전제해 평가할 때 신용위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면서 “독자신용등급을 도입하면 신용평가사의 사후평가를 개선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평사들 역시 도입 취지에 대해서는 일단 찬성하고 나섰다. 김용국 나이스신용평가 전무는 “독자신용등급 도입은 계열의 신인도 및 전략 급변 시 기업의 기본적 채무상황능력을 확인할 수 있어 최종신용도 도출과정에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라며 “다만 투자자 입장에서 오해할 수 있으니 ‘등급’이 아닌 ‘신용위험 구성요소’ 등으로 바꿔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독자신용등급 도입으로 각 기업의 신용등급이 보다 현실적으로 신속하게 반영되고 투자자들도 기업 신용도에 맞는 금리로 보상받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라면서 “건설·조선·해양부문 계열사들의 회사채 발행 환경이 악화되는 등 부작용에 대한 검토도 철저히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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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 nykim@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