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북기본합의서와 정상회담 성사의 중심점이었다”
[일요서울 | 박시은 기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 -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26일 출간된다. 회고록에는 대우그룹 해체 과정, 당시 정부의 금융위기 극복방안과 구조조정 정책에 대한 김우중 회장의 입장이 담겼다. 특히 그동안 베트남 하노이에 체류하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김우중 전 회장이 회고록을 통해 대우그룹 해제 과정에 대해 어느 수준까지 언급했을지 촉각이 곤두서고 있다. 아울러 회고록을 공동집필한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대우 해체와 한국경제 구조조정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인식에서 김우중 회장과 의기투합했다”고 밝힌다. [일요서울]은 회고록의 일부를 발췌, 충격적인 증언들에 대해 살펴본다.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강산도 변하고 남을 시간이지만 대우그룹의 잔해(殘骸)는 한국과 세계 방방곡곡에 남아 있다. 대우인터내셔널, 대우건설, 대우조선해양 등 대우그룹 주요 계열사들은 여전히 세계 시장에서 약진하고 있다. 대우종합기계는 두산인프라코어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변함없이 한국 기계 산업의 선두주자로 앞서 나가고 있다. 나아가 아프리카나 중남미 등 신흥시장에 가면 아직도 대우의 간판이 곳곳에 걸려 있다.
신장섭 교수는 김우중 회고록을 두고 “대우 해체 15주년을 맞이해서 대우그룹의 해체에 관한 종합적 진실을 밝히고 역사적 재평가를 받기 위해 썼다”는 사실을 공고히 했다. 대우가 한국의 최대 ‘부실기업’으로 낙인찍힌 지 15년이 지나서야 집필된, 그야말로 충격적 발언들이 쏟아질 것이라는 선언과도 같다.
또 당시 한국 역시 엄청난 부실과 구조적 문제를 갖고 있는 나라로 낙인찍혔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역사상 가장 철저한 구조조정을 수행했다. 김우중 회장과 신장섭 교수는 대우 해체와 한국경제 구조조정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데에 의기투합했다. 책 출간에 합의한 2012년 여름 이후 회고록을 위해서만 20여 차례 만나 150시간 이상 대화를 나눴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잘못 알려지거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에 대한 새로운 증언과 발굴이 도배됐다. 김우중 회장이 지난 15년 동안의 긴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직접 증언을 한 것이다.
우선 대우그룹은 세계경영을 모토로 지나치게 확장 투자를 벌이다가 대우자동차의 부실로 몰락했다는 것이 그동안 받아들여지던 정설이었다. 한국정부도 이에 따라 대우해체 이후 다른 계열사들은 살렸지만 대우자동차는 미국의 제네럴모터스(GM)에 거의 공짜로 넘겼다.
정부가 내세운 것은 ‘부실이 더 심해져서 국민경제에 더 큰 손실을 끼치는 것을 막는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김우중 회장과 신장섭 교수는 정부의 이러한 판단이 크게 잘못됐고 이에 따라 남 좋은 일만 시켜주고 한국경제는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었다고 지적한다. 대우차 부실처리로 인해 한국경제가 본 손해액을 시나리오 별로 산출하기도 했다.
그들에 따르면 대우와 GM 간 합작 협상의 실상을 금융위기 극복방안을 둘러싼 경제 관료들과의 충돌에서 찾는다. 아울러 대우의 유동성 악화와 워크아웃은 대우의 경영실패가 아닌 정부의 기획해체라고 주장한다.
정설과 속설
대우의 유동성 문제가 외부로 본격적으로 불거진 계기는 금융감독원에서 두 차례 걸쳐 시행한 유동성 규제조치였다는 것이다. 경제팀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대우의 자금상황에 대해 부정적인 보고서를 제출한다. 그 후 유동성 위기가 지속되면서 대우는 결국 1999년 8월 워크아웃으로 처리됐다는 설명이다.
이와 함께 김우중 회장은 대우 유동성 위기에 대한 정부 측 주장이 본말을 전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책에서는 김 회장이 어떤 근거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지, 대우가 워크아웃으로 처리되는 1999년 8월까지 실제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정부의 판단과 행동에 어떤 문제들이 있었는지 등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음은 대우 해체와 한국경제 구조조정에 대한 장기적 평가다. 경제 관료들을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 당국’이 보는 관점에서 대우해체의 ‘정사’가 만들어져 한국사회에 고착된 지 15년째라는 것이다.
마지막 회고록에서 담긴 비화는 김우중 회장이 노태우 대통령 때부터 ‘대북특사’로 일하면서 남북기본합의서(1991년)를 만들어내고 노태우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 정상회담을 거의 성사시켜 놓았던 것 등에 대한 내용이다. 이 역시 처음으로 공개되는 남북관계 비화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다.
신장섭 교수는 “김우중 회장을 ‘세계를 경영한 민족주의자’로 소개하면서 여러 가지 사례를 제시했지만 독자들이 ‘장사꾼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며 긴가민가하다가도 김우중 회장이 대북특사로 활동한 대목에 도달하면 ‘진짜 그렇구나’라고 할 것”이라고 전했다.
또 그는 “언론에서는 일차적으로 대우해체에 관한 김우중 회장의 증언과 논란에 관심을 쏟겠지만 이 책에서 역사적으로 더 길게 남을 내용은 세계경영에 대한 재해석과 신흥시장 진출에 관한 경영 교훈일 것”이라면서 “한국이 현재 당면한 저성장이나 청년실업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대우의 세계경영이 주는 의미가 굉장히 크다”고 덧붙인다.
아울러 책을 쓴 저자마저도 “지난 15년 동안 IMF체제에 대해 나름대로 일관되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전문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조차도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이 있었고, 제대로 알지 못한 일들이 많았다”면서 “대우자동차에 대해서는 한국의 기업구조조정에 대해 비판한 책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에서 대우차를 직접 사례로 들어 기업 구조조정이 크게 잘못됐다고 주장했지만, 대우차 처리가 이렇게까지 잘못됐는지는 상상을 못했다”고 말했다.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회고록을 통해 언급된 가운데 세간의 이목도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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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