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에서 한국경매를 종식한다는 결정을 내린 이 시점에서 왜 고미술 시장이 침체일로에 빠졌는지 직접적 원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 직접적 원인은 고미술을 사들이고 소개하고 판매하는 고미술상인과 가게에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고미술상점이 아마 전국에 천여 곳은 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인지 고미술 상점이 모여 만든 협회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런데도 고미술 상인들은 하나같이 십여 년 사이 장사가 안 된다고만 한다. 그들은 요사이 고미술 경매 회사가 많아져 헐값으로라도 팔아서 수수료라도 챙겨야겠다는 풍조가 일고 있다고 한다.
우선 눈에 뜨이는 변화는 서울의 인사동이다. 인사동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미술 상가 거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고미술 가게는 거의 없고 모조품 가게, 식당, 옷가게, 액세서리 가게, 보석 가게만이 즐비하다. 골목마다 별의별 가짜 중국 잡동사니 거리 행상의 가게가 좌판을 벌려놓고 판을 치고 있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이런 전통은 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내외를 막론하고 명품 파는 곳, 고미술품을 파는 이름난 곳 등은 수 백 년을 지켜 내려오면서 한곳을 지킨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곳에 가면 명품이 있고 믿을만한 고미술상이 있다. 그런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나라의 신용이요 자랑이다.
인사동도 여럿차례 변화를 겪었다. 서울시는 인사동길을 몇 번씩 괴상한 포장으로 바꾸고 비싼 화강암반석을 아무데나 수 없이 갖다 놓았다. 그러더니 이제 인사동이 잡동사니 시장통이 되고 말았다. 인사동에 있던 일부 가게는 창덕궁에서 종로3가에 이르는 대로로 옮기기도 하고 경운동쪽 길로 옮기기도 했지만 모두가 중구난방이다. 인사동길이 잡동사니 길이 되고 상가는 이러저리 중구난방으로 옮겨갔다. 그러더라도 몇몇 가게만이라도 정상적으로 거래가 활발하고 활기가 넘치면 좋으련만 모두가 장사가 안 된다고 하소연 일색이다.
우리나라 고미술 시장이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외면을 당하고 있는 이 기막힌 상황이 왜 발생했을까. 이렇게 된 직접적인 책임은 우리나라 고미술 시장과 고미술 상인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세제혜택을 줘 대규모 고미술상인협회를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현재 상인협회가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다.
고미술상인협회는 언제부턴가 한국고미술협회로 이름이 변경됐다. 더욱이 구 문화재관리국과 현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으면서 긴밀한 유대를 가지게 되니 그 힘은 더욱 막강해졌다. 그뿐 아니다. 고미술협회가 고미술감정과 가격 결정, 감정서 발급 등 고미술시장을 총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감정과 감정서 발급 등으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왜 고미술시장이 날로 피폐해져서 상거래는 거의 없는 걸까. 왜 우리 고미술품이 1990년 중반 때의 가격보다 열배 이상 떨어지진 걸까. 반면 중국 고미술품 가격은 당시보다 열배, 백배, 천배가 됐다. 세계 어디서도 중국 고미술품만이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우리 문화재 값이 떨어진 첫 번째 이유로 모조품 제작판매라고 생각한다. 모조품, 즉 가짜를 제작해 판매하는 행위, 품질이 조약한 미술품을 변형하고 새롭게 단장해 판매하는 행위가 문제라고 본다. 예를 들어 15~16세기 백자에 코발트로 옛날 그림같이 그림을 그려 구워내서 진짜라고 하는 행위, 청자에 없던 동화를 집어넣어 파는 행위, 도자기 청동기를 새로 만들어 약품처리하고 땅에 파묻고 취색 변조해 옛날 것처럼 위장해서 파는 행위, 목기·칠기·나전칠기를 옛 것 같이 새로 만들어 파는 행위, 옛날 목기를 변조해서 값 비싸고 잘 팔리는 형태로 변조해서 파는 행위, 요새 만든 그림을 옛날 그림처럼 가짜 그림을 그려 파는 행위, 옛날 속화(민화)처럼 요즘 만들어 파는 행위가 있다. 또한 매병과 항아리 등이 파손되어 1/2이나 1/5만 남아있는데 남은 것을 가지고 복원수리를 하거나 가짜를 만들어 붙여서 전체 형상을 다시 만들어 파는 행위 등이 있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백자태항 내항과 외항
17세기 호림박물관 소장 보물 1169호
우리나라에서 태를 묻거나 태우는 습관은 아주 오래됐고 지방마다 특색이 다르다. 이 태항아리는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 항아리에 넣어 명산태봉에 묻었던 것이다.
이런 태항아리 유물은 고려말경부터 있으며 백자로 내·외항을 만들어 위의를 갖추어 내항에 태를 담고 다시 외항에 넣어 그 여백을 채운 다음 잘 묶어 큰 석함에 넣어 산봉우리에 묻고 태지를 세웠다. 이러한 방식은 태종 때부터였다.
이 태항은 태지(胎誌)와 함께 발견됐는데 태지에 왕자아기씨는 「1639년 10월 17일 생」이고 매장한때는 「1643년 10월25일 장」이라고 기록돼 있다. 왜란을 겪고 다시 1627년과 1636년 양대 호란을 겪은 다음에 왕자아기씨가 태어나 한참 후인 5년 만에 태봉에 장(藏)했다고 생각된다.
조선 17세기는 가치체계의 혼란에 따른 사대와 자성과 자아의 발견이라는 양대 사조 속에서 자기주관을 서서히 세워 나가는 과도기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시대였다.
조선전기의 태항아리는 키가 크고 상동(상체)과 하동(하체)의 크기의 차가 많지 않은데 이 태항은 상동은 넓고 하동은 좁다. 내항도 전기에 비하면 하동이 좁은 편이다. 뚜껑의 꼭지와 어깨의 네 귀도 다르고 번조수업도 다르다. 이미 중기가 시작되는 새 시대를 알리는 양식이 시작된 것이다. 전란 후 임에도 불구하고 새 시대를 예고하고 알리는 양질태항으로 태지에 명문이 있어 백자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