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858기 폭파 사건에 대한 국정원의 재조사가 시작된 지 20개월만에 진상규명 결과가 발표됐다. 정부 개입설, 사전인지설 등 그동안 숱하게 제기된 의혹에 쐐기를 박는 발표였다. 국정원 진실위는 “기획조작설과 사전인지설은 사실이 아니다”면서 “북한 공작원인 김현희와 김승일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KAL기 유족회 등은 진실위의 발표를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특히, 폭파범 김현희씨의 진술이 누락된 부분에 주목하고 진상규명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물론, 진실위의 주장을 뒤집을 만한 근거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일방의 주장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렇다면, 김현희씨는 왜 진실위의 조사를 거부했을까. “나도 여자이고 싶다”고 말하는 김씨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다. 20여년 동안 KAL기 폭파사건으로 고통받아온 자신의 업보를 인정하지만, 자식에게까지 짐을 지울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진실위의 조사에 순순히 응할 경우, 서울과 경주를 오가면서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몸부림친 시간들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일요서울>은 남편 정모씨의 사업실패로 경제적 어려움까지 가중되고 있는 김현희씨 가족의 자취를 추적했다.
“국정원을 비롯한 외교·건교부 등 관계기관의 모든 자료를 검토했음에도 의혹들의 근거로 뒷받침할만한 단서가 전혀 없는 점으로 보아 기획조작설과 사전인지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지난 1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진실위)가 밝힌 KAL858기 폭파사건의 잠정 결론이다. KAL858기 폭파사건은 지난 1987년 11월 28일 23시 27분경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을 출발,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와 태국 방콕을 거쳐 서울로 향하던 KAL기가 미얀마 지상 관제탑과 교신한 뒤 테러에 의한 공중폭발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1987년 12월 19일 당시 교통부는 “실종된 KAL858기가 벵골만 상공에서 공중 폭발해 승객과 승무원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정부 당국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안기부(현 국정원) 개입설, 정부 조작설 등의 의혹이 북한과 친북단체를 중심으로 유포되면서 수사결과 발표에 대한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결국, 국내외 일부 언론도 의혹제기에 뛰어들었다. 진실위가 KAL858기 사건을 재조명한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물론, 민간위원들이 참여한 진실위의 발표로 더 이상의 의혹제기는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동시에 이번 조사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KAL기 폭파 사건의 생존자이자, 범인인 김현희씨의 진술이 누락됐기 때문이다. 국정원 진실위 관계자들이 정씨를 찾아가 조사 협조를 부탁했지만, “당신들이 도와준 게 뭐가 있느냐”는 식의 핀잔만 듣고 돌아서야 했다. 그렇다면, 김씨는 왜 진실위 조사에 불응했을까. 또, 거주지조차 불명확한 김씨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을까. <일요서울>은 국정원 진실위 조사 발표를 계기로 김씨의 근황을 집중 취재했다. 김씨 가족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최대한 삼갔다. 현재 거처가 드러날 경우, 미칠 파급을 감안한 결정이다. 차선책으로, 남편인 정모씨의 고향 동기와 국정원 등 공안기관 관계자들을 통해 한국에서의 삶을 역추적했다.
두 사람의 운명적 ‘러브스토리’
국정원 공안파트에 근무하고 있던 남편 정씨가 김현희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87년 12월 15일 김씨가 국내로 압송된 직후로 알려졌다. 이때부터 정씨는 김씨의 경호 등을 담당하며 7년간 가장 근거리에서 그를 지켜봐 왔다. 정씨는 경주 출신으로 경주고와 서울대를 나와 국정원에 들어갔다. 공안당국 관계자와 정씨의 지인 등에 따르면, 이들이 처음으로 각자의 사랑을 감지한 시기는 1994년경 경주시 일원을 지나던 차량 안에서의 일이라고 한다. 김씨는 당시 결혼을 하지 않고 지내던 정씨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정씨는 “당신 때문”이라는 간략한 답변을 했다고 지인은 전했다. 이를 시발점으로 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됐다는 전언이다. 당시 고향을 그리워했던 김씨는 정씨의 시골집 풍경을 동경했고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지는 단초가 됐다. 3년 뒤, 이들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주에서 결혼식을 가졌다. 남한에서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갖지 못했던 김씨에게 결혼은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계기가 됐다. 김씨는 특히 결혼을 계기로 자녀를 낳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가족계획을 세웠지만, 이 과정에서도 적지않은 고통을 겪었다.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김씨가 국내로 압송된 이후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아온 악영향이 유산의 아픔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결혼 3년만인 지난 2000년에야 첫 아들을 낳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아들 정 모군은 올해 7살이 됐고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로부터 4년 뒤인 2004년에는 딸을 낳았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김씨는 1남1녀의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한국 사회에 빠르게 적응해 갔고 어머니로서도 매우 충실했다”고 한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2004년 서울로 거처를 옮긴 것도 이 때쯤이다. 경주가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도시라서 자신의 신분이 쉽게 노출될 수 있다고 여긴 듯하다. 또, 서울로 올라와 자녀의 교육에 전념하려던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 같다. 2003년 느닷없이 나타난 모 방송사 카메라 세례에 불편함을 느낀 것도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김씨는 당시 “더 이상 세상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서울로 올라온 직후 미아리 일대 작명소를 찾아 개명을 했다. 당시 김씨의 체형과 얼굴은 시간의 흐름을 이기지 못했기에, 굳이 성형수술까지 받을 필요는 없었다.
사업실패 경제적 어려움 직면
김씨 부부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소재 모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문제는 경제적인 여건이었다. 외부 활동에 소극적인 아내를 위해 남편 정씨는 식당 등을 창업해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잇따라 실패했다. 경주 일원에서 초밥집을 운영할 당시 ‘김현희가 운영한다’는 소문이 퍼져 2년 정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매출이 올랐다. 하지만, 차츰 가게 운영이 어려워지자,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됐다. 정씨는 식당업을 포기하고 실내사격장 등으로 전업을 시도했지만 이도 여의치가 못했다. 잇따른 사업실패는 정씨에게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다.경주고 동문인 한 인사는 “정씨가 직업을 찾기 위해 여러 곳에 부탁을 했지만, 국정원 출신에다 김현희씨 남편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쉽게 취직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정씨는 현재까지 무직 상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정원 진실위 관계자들이 정씨를 찾아와 협조를 요구했지만 묵살된 것도 이러한 어려움 때문으로 해석된다. 정씨 가족의 수입원은 일부 인지세와 약간의 재산이 전부다. 국정원 한 관계자는 “대부분의 업무가 경찰로 이관된 상태고, 우리 원에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정씨 부부가 시도한 서울 생활은 몇 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청담동에서 다시 OO시 OO동 H아파트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게 된 것. 김씨가 이토록 정착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원인은 “이제 자신도 평범한 여자이고 싶다”는 바람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서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원이 나서 다시 진실규명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진술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불쾌해 했다고 한다. 김씨 입장에서 보면, 삶의 위협으로 느껴졌을 법하다. 한 소식통은 “김씨 부부는 자식들이 엄마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될까봐 노심초사해 왔다”며 “한 때는 이민도 추진할 정도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7살, 3살배기 자녀에 대한 김씨의 애틋한 모정이 묻어난다. 김씨의 바람은 정부와 일부 시민단체의 진상규명에 대한 소모적 논쟁과는 거리가 멀다. 논란이 됐던 화동 사진의 주인공도 김씨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북한 등에서 제기한 조작설도 근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이제 김씨는 ▲고향에 살고 있을 자신의 가족과 만나는 일 ▲1남1녀의 자녀를 안정적으로 양육하는 문제에 고심하고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이고 싶어 한다.
김씨 부친 주몽고 북한대사 지내
본지 취재 결과, 김씨의 부친은 주몽고 북한대사를 지냈을 정도로 북한 정부에서 인정을 받는 외교관이었다고 한다. 김씨의 오빠는 생존해 있고, 동생은 병사(病死)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때 김씨가 동생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려 와병설이 나돌기도 했다. 정씨는 결혼 이후 5년 동안 김씨의 공작적 습성을 바로잡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로 인해 이제는 오히려 저녁 8시만 되면 남편의 귀가를 재촉하는 ‘바가지 긁는’ 가정주부로 변해있다. 유독 활어회를 좋아해 경주시 감포를 찾아 종종 외식을 즐기던 평온한 가정에 진실위의 그림자가 다가오자, 또 다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가 김현희를 놓아주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진실위가 밝힌 KAL858기 폭파사건 결과 요약“북한 대남 공작 조직이 주도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KAL858기 폭파사건을 북한의 대남 공작조직에 의해 주도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2004년 말부터 20개월간 진행된 KAL기 폭파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결과다. 지난 1일 진실위는 1988년 안기부 수사결과 발표 직후 불거진 KAL기 폭파사건 조작설, 사전인지설 등에 대한 진상규명을 실시한 결과,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국정원을 비롯한 외교·건교부 등 관련기관의 모든 자료를 검토한 이후 내린 결론이다. 진실위는 KAL기 폭파사건은 북한 공작원인 김승일과 김현희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추정했다. 그동안 여러 의혹에 휘말린 이유로 ▲김현희씨 진술에 의존해 서둘러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점 ▲수사 결과를 도출해 내는 과정에서 일부 오류가 발생하면서 불필요한 오해가 불거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진실위는 당시 정권은 이 사안을 대통령 선거에 악용했다고 지적했다.
진실위는 현재 미얀마 타보이 지역 인근 앞바다에서 KAL858기 동체 잔해로 추정되는 인공 조형물을 발견하고 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 진실위는 향후 김현희씨 면담을 추진할 방침이며, 미얀마 2차 정밀탐사도 계획하고 있다. 진실위는 “유가족의 아픔과 희생자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빠른 기간 내에 KAL기 인양작업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대현 dhkim@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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