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마음 몰라주자 ‘성폭행범’ 올가미
짝사랑 마음 몰라주자 ‘성폭행범’ 올가미
  • 정은혜 
  • 입력 2006-07-27 09:00
  • 승인 2006.07.27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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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40대 남성이 성폭행범의 누명을 쓴 채 수일 동안 구속됐다 결국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전에 거주하는 이성재(가명·47)씨가 사건의 장본인. 이씨는 자신을 짝사랑하던 한 여성의 ‘빗나간’ 사랑으로 인해 성폭행 및 절도 혐의로 구속 기소돼 8일 동안 구금됐다.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여성의 진술만으로 경찰에 구속됐던 이씨는 검찰 재조사 과정에서야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그에게 쏠렸던 수많은 오해의 시선들은 거두어지겠지만, 강압 수사와 오심으로 8일 간 무고한 옥살이를 해야 했던 이씨의 정신적인 피해는 어디서 보상받아야 할까. 수사기관의 일방적인 수사, 법원의 무리한 영장 발부 등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 이번 사건을 따라가 봤다.




지난 6월 25일 오후 7시께. 대전동부경찰서 대전역지구대에 한 40대 여성이 찾아왔다. 평소 알고 지내던 남성에게 성폭행 당하고 금품을 빼앗겼다며 노발대발, 경찰에 신고한 것. 이 여성은 포장마차 종업원 김정인(가명·45)씨. 김씨는 평소 친분이 있던 이씨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금품을 빼앗겼으며, 포장마차업주 박영선(가명·52)씨의 금목걸이도 빼앗아가는 것 또한 목격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씨는 대전역 근처를 방황하는 부랑자였다.

포장마차에서의 첫 만남

경찰에 따르면, 김씨와 이씨가 가까워진 것은 1달여 전. 이씨가 포장마차를 자주 드나들면서부터다. 김씨가 매일같이 ‘단골손님’으로 오가는 이씨를 보고 남몰래 흠모하게 된 것. 포장마차업주인 박씨와 이씨는 그 전부터 누나동생하며 스스럼없이 지내던 사이였다고 한다. 박씨는 역전에서 부랑생활을 하던 이씨가 밤늦게 찾아 와도 밥을 지어줬고 술, 안주를 내줬으며, 술잔도 함께 기울여 주었다.

미혼이었던 이씨는 아내 같고, 엄마 같은 박씨에게 모성애를 느끼며 남다른 감정을 가졌다. 물론 박씨가 운영하는 포장마차에서 일하는 김씨와도 몇 차례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가깝게 지냈다. 김씨는 이씨도 자신에게 호감을 지닌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씨의 속내는 달랐다. 자신이 연모하는 박씨의 가게에서 일하는 동생이라는 이유로 친절하게 대했을 뿐이었다. 이씨가 자신이 아닌 박씨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씨는 ‘질투’로 불타올랐다. 게다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안중에도 없는 ‘야속한’ 이씨에게 심한 모멸과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관심 끌기 위해 파렴치범으로 몰아

감정의 상처를 받은 김씨는 ‘어처구니없는’ 범행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복수하겠다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김씨와 이씨, 단 둘이서 술자리를 갖게 됐던 것. 초저녁부터 술에 취한 이들은 포장마차 인근 모텔로 직행했다. 경찰에 따르면, 방에 들어가자마자 김씨는 이씨에게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며 술주정을 부렸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약간의 실랑이가 오갔고, 이씨가 김씨에게 거친 폭력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안 그래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던 김씨는 ‘한번 당해보라’는 심보로 이때부터 모든 사건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먼저, 하얀 이불보에는 자신의 코피를 묻혀 마치 강제로 관계를 맺으려는 이씨에게 저항하다 피가 나온 것처럼 했다. 그리고 모텔 방안에 있는 자신과 이씨의 사진을 찍었다. 모텔 입구와 간판 사진도 담았다. 심지어 박씨에게 전화를 걸어 ‘모텔에 둘이 함께 있다’는 얘기와 함께 직접 현장에 불러 목격자로 삼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김씨는 박씨를 보자마자 “이씨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금품을 빼앗겼다”고 울며, 거짓 토로했다.

한 술 더 떠 김씨는 “며칠 전에도 박씨의 금목걸이를 훔치는 것을 내가 목격했다”며 박씨를 부추기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김씨의 신고를 받은 후, 네 가지 정황 증거로 이씨가 성폭행범이라는 데 무게를 두었다. 이씨가 김씨에게 폭행을 가한 흔적이 역력한 점, 두 사람이 함께 모텔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는 모텔주인과 박씨의 진술, 그것을 증명하는 사진 여러 장, 그리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결과 김씨의 혈흔이 채취된 것을 근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씨는 수사과정에서 혐의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나 경찰은 김씨의 주장만 듣고 강도강간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결국 이씨는 법원에서 영장이 발부돼 8일 동안 구금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경찰은 “두 사람은 술을 마신 후 모텔에 갔고, 거기서 실랑이가 오갔으며, 외부인 침입이 없다. 게다가 김씨가 폭행당한 흔적이 분명하고, 이불보에 김씨의 혈흔이 묻었다. 당신이 한 행위가 아니면 누가 한 것인가”라며 이씨를 성폭행범으로 몰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경찰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김씨에게서 이씨의 정액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간과했다.

또 빼앗겼다는 금목걸이의 행방도 파악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경찰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김씨가 속옷과 그날 입었던 옷을 전부 세탁해 정액 채취는 불가능했다”고 해명했다. 금품 행방 여부에 대해 경찰은 “금목걸이는 이씨가 변기에 떠내려 보냈다고 김씨와 박씨가 진술했다”고 에둘러 설명했다.

검찰 재조사서 누명 벗어

경찰로부터 사건을 송치 받은 검찰은 그러나 이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피해자라고 주장해 온 김씨가 경찰에 신고하기 전날 대전역지구대를 방문했으나 아무런 얘기도 없이 돌아갔고, 구속된 이씨를 한 차례 면회한 사실이 드러난 것. 통상적으로 성폭행 당한 피해자가 피의자를 면회한다는 것 자체가 의아스러울 뿐만 아니라 이씨로부터 ‘김씨와 박씨가 면회 와 사과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검찰은 즉각 김씨와 박씨를 소환했다. 검찰에 출석한 김씨는 곧바로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박씨는 김씨의 말만 듣고 경찰 신고를 도왔다고 진술했다. 대전지방검찰청 형사2부에 따르면, 김씨는 “처음부터 박씨와 이씨의 ‘특별한’ 관계를 질투한 것은 아니었다”며 “그를 사랑했지만, 내 마음을 알면서도 무시하는 그가 너무 미웠다”고 말했다. 이어 “그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 허위 신고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미처 몰랐다”며 “결국 이씨가 나를 더 미워하게 돼 가슴이 아프고 이제와 용서를 구한다”며 때늦은 후회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빼앗겼다던 목걸이도 자신의 목에 차고 있는 것을 직접 보여주기까지 하며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시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렇게 해서 ‘억울한 범인’인 이씨는 마침내 ‘성폭행범’이라는 누명의 벽을 넘고 석방됐다. 검찰은 김씨에 대해 무고혐의로 18일 불구속 입건했다. 검찰관계자는 “한 여성의 빗나간 짝사랑으로 무고한 시민이 옥살이 할 뻔 했다”고 허탈감을 드러내며 “김씨의 경우 범행동기에 참작할 점이 있고, 깊이 반성하고 있어 불구속기소했다”고 밝혔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단 한명의 억울한 범인을 만들지 말라’는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을 수사당국이나 법원 모두 재음미할 사건이었다. <정은혜 기자> kkeunnae@ilyoseoul.co.kr

정은혜  kkeunna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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