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제로 ‘운영’…갈취 보험금 서열순으로 ‘배분’
팀제로 ‘운영’…갈취 보험금 서열순으로 ‘배분’
  • 정은혜 
  • 입력 2006-05-22 09:00
  • 승인 2006.05.2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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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38명으로 이뤄진 조직폭력배 교통사고 자해 공갈단인 ‘신21세기파’의 꼬리가 잡혔다. 이들은 범행 대상을 물색, 치밀한 각본을 짠 뒤 마치 연극을 하듯 각자 역할을 맡아 충실하게 연기를 수행해 범죄를 완성시킨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서울 남동부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이들은 활동자금 및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80여회에 걸쳐 15억원 상당을 갈취하며 완전범죄를 노렸으나 인근주민과 경찰에 의해 끝내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지난 5월 9일 오전 5시. 서울 강동구 천호동·길동 일대 숙소에서 112명의 일당이 서울 강동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검거됐다. 검거당시 이들은 보험 사기행각을 벌인 지 이미 6년여나 지난 터여서 안심하고 숙소에 머무르며 또 다른 범행을 계획하는 중이었다. 경찰은 공갈·사기 혐의로 이들 중 9명을 구속, 80명을 불구속하고 나머지 일당 30명의 뒤를 계속 쫓고 있다.

보스의 치밀한 ‘범죄 구성’

경찰이 전하는 ‘신21세기파’의 보험사기 수법은 그야말로 한편의 범죄 영화를 연상케 했다. 2001년 4월에 조직 총책임자인 김씨는 자신의 학교동창, 선후배, 친구, 애인, 지인 등을 총동원, 심지어 도박장 등지에서 돈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는 이들을 포섭해 범행에 끌어들였다. 김씨는 이들에게 “우리끼리 경미한 교통사고를 유발, 위장해 보험금을 타내면 그 중 20%를 나눠주겠다”며 은밀히 범행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18명으로 시작한 이 조직은 불과 몇 년 만에 138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의 서열은 ‘총책임자, 행동대장, 행동대원’ 순. 이들은 4~5명씩 한 조를 구성, 각 조에는 행동대장 1명과 행동대원 3~4명으로 이뤄져 팀단위로 범행에 나섰던 것으로 경찰 수사결과 드러났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보험사기로 벌어들인 돈을 배분하는 방식이다. 일단 거둬들인 보험금은 총책임자에게 갖다 준다고 한다. 보험금 전체의 80%를 총책임자가 가져간 뒤 나머지 20%로 행동대장과 행동대원이 분배한다. 이 역시 80%는 행동대장이 가져가고 행동대원들은 나머지 20%를 갖고 대등하게 나눠 가진다고.

즉 5명으로 이뤄진 조가 1,000만원의 보험금을 타냈다고 가정하면 총책임자는 800만원을 갖고, 행동대장은 160만원, 행동대원은 10만원씩 갖는 셈이다. 이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서로에게 번호를 매겨 구분한 뒤 미리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범행을 저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가해자(1번), 피해자(2번), 목격자(3번), 보험사 직원 상대할 자(4번), 병원관계자 상대할 자(5번) 등의 식으로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했다는 것. 이들은 각자의 연기를 잘 소화해 일이 잘 처리되면 보너스를 받기도 했다고 경찰은 귀띔했다.

6개월간의 내사, 보름간의 밤샘 수사라는 공을 들인 끝에 15억원대의 보험사기 조직을 적발한 경찰은 한 때 다 잡은 주범을 놓칠 뻔한 순간도 있었다고 한다. 폭력행위 등 25범인 총책임자 김모(41)씨와 맞닥뜨렸을 때다. 경찰은 그동안 보험사기 행각을 벌인 사기범들을 숱하게 검거해왔지만 이날만은 김씨와 일당들의 ‘완벽한 연기’에 그대로 속을 뻔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들 전원은 수년간 학습 받아 온대로 하나같이 입을 맞춘 상태였다”면서 “게다가 수사하는 과정에서 행동대원들이 수사상황을 김씨에게 일일이 보고하는 바람에 수사에 애를 먹었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또 “보험사와 병원 관계자들까지도 수사에 비협조적으로 나왔다”면서 “자신들이 보험금을 부당하게 지급, 입원차트 기록을 허위기재해 준 사실이 탄로 날 것을 염려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고 경찰은 전했다.

자해 공갈 수법 ‘수준급’

그렇다면 이들이 저질렀던 ‘교통사고를 가장한 자해 공갈’ 유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교차로 진입차량 고의 충돌’. 이들은 지난 2004년 5월 강동구 천호동 일대에서 승용차량을 이용해 피해자가 운행하던 차량이 차선을 변경해 진입할 때 급가속, 고의로 접촉사고를 일으켰다. 이는 끼여들기나 앞지르기의 경우 발생 장소에 따라 중대법규 위반 사고가 돼 운전자가 형사 처벌받는 약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행동대원(4번)은 보험사 보상팀 직원을 상대로 “내가 천호동 조폭인데 보험금을 적게 지급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 합의금 명목으로 240만원을 뜯어내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자신들이 운전하는 차량끼리 고의 추돌’을 하는 경우다. 2005년 9월 이들은 강동구 명일동 사거리에서 자신들의 차량 간 고의로 후미추돌 사고를 일으켰다. 이 사고를 빌미로 병원에 입원한 후 보험사 직원에게 같은 방법으로 협박해 660만원을 지급받았다.

또 이들은 ‘중앙선침범 차량을 고의 추돌’하는 수법도 썼다. 같은 해 12월 이들은 피해자가 운행하는 차량이 편도 1차선 도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고의로 운전석 후렌다를 박았다. 이후 “경찰서에 가봤자 벌금만 나오고 안 좋으니까 보험처리하라”며 보험을 접수케 한 뒤 병원에 입원, 320만원을 갈취했다. 이들은 사고경력이 누적되면 보험사에서 의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원들을 바꿔가며 범행을 저지르는가 하면, 일방통행로 역주행 사고가 발생할 경우 ‘역주행하는 차량에 과실이 100%’라는 점을 악용, 일방통행로에서 주로 심야시간대에 범행을 저질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골목길 후진차량에 고의충돌, 불법유턴 차량에 고의 접촉사고 방법 등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2001년 4월부터 올해 4월까지 6년여 동안 총 80회에 걸쳐 이들이 갈취한 돈은 무려 15억 9,000여만원. 1건당 피해자 및 보험사로부터 약 2,000만원씩 뜯어낸 셈이다.

보험사와 공업사 공모의혹도

이들은 조직원간의 유대관계가 돈독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따라서 범행을 저지르고도 쉽게 노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교통사고 자해 공갈 수법으로 조직 활동자금 및 유흥비를 마련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은 이들을 검거하기 위해 여러 루트를 통해 추적에 나섰다.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중고교 선후배 관계의 지인들끼리 공모해 보험금을 편취한 사건”이라고 규정짓고 “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없어 놀랐다”고 혀를 내둘렀다.

이어 경찰은 “만약 인근주민의 신고나 첩보가 없었다면 이들 교통사고 공갈단은 아직도 버젓이 대로를 활보하고 있을 것”이라면서 “이들이 벌인 보험사기 연극은 배우를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이들에게 허위 진료기록부를 발급해준 병원이나 허위 견적서를 발급해 준 자동차 공업사 등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며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정은혜  kkeunna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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