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연기에 연기자인 내가 당해… 허허허”
“완벽한 연기에 연기자인 내가 당해… 허허허”
  • 정은혜 
  • 입력 2006-05-10 09:00
  • 승인 2006.05.1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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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권력을 사칭한 한 50대 남성이 내로라하는 중견 탤런트와 부유층 여성들을 감쪽같이 속인 사기사건이 발생해 관심을 끌고 있다. 자신을 ‘전 청와대 경제비서관’이라고 소개한 최모(55)씨가 그 장본인. 그는 ‘할아버지는 기업가, 동생은 국회의원, 아들은 검사’ 등 ‘화려한’ 집안 이력을 무기로 피해자들에게 수억 원을 편취, 지난달 30일 구속됐다. 이번 사건이 알려지면서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피해자 중 스타급 중견배우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드라마는 물론 영화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중년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탤런트 백일섭(62)씨가 바로 장본인. 그는 기자와 만나 지난 3년간 말 못할 고민을 품어왔다고 자신의 심정을 털어 놓았다.




“제가 왜 당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백씨. 그는 인터뷰에 앞서 “사건에 연루됐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물의를 일으킨 것 같아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한 뒤 그간 있었던 일을 하나씩 토로하기 시작했다. 백씨에 따르면 최씨는 ‘타고난’ 사기꾼이다. 만 40년째 연기에 몸담아 온 자신이 봐도 가히 ‘프로급 연기’ 실력이라는 것이다.

“속았다는 사실 실감 안나”

도대체 최씨의 언변과 술수가 어느 정도로 뛰어났기에 단 한마디로 백씨를 일순간에 ‘바보’로 만들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 백씨는 “상황에 딱 들어맞는 변명, 또 그에 걸 맞는 상황연출 때문”이라고 말한다. 백씨는 전화 통화를 할 때 최씨의 달라지는 목소리 톤을 일례로 들었다. 만약 자신이 원치 않는 전화를 받을 경우 바쁜 척, 아픈 척 하면서 목소리를 변조한다는 것. 최씨의 엘리트적 이미지도 백씨가 속는데 한몫 작용했다. 준수한 외모, 고상한 말투, 깔끔한 옷차림까지 ‘삼박자’를 고루 갖춘 최씨의 겉모습에 백씨는 그가 고위층임을 전혀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집안 배경 들먹이며 ‘접근’

또 최씨를 비롯, 가족들의 ‘화려한 이력’도 그를 맹목적으로 믿게 하는데 작용한 부분이다. 백씨에 따르면 최씨는 현재 ‘유명 법무법인의 고문 변호사’이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경제비서관’으로 일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 백씨는 자신이 청와대에 초청받았던 당시 얘기를 꺼내며 믿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제가 1967년에 청와대에 초청받아 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당시 최씨가 최연소 검사로 청와대에 근무했었다는 거예요. 그곳에서 신원조회를 담당해 제 족보를 훤히 꿰차고 있다나….

그때 이런저런 얘기를 회상하면서 급격히 친해졌죠. 지금 생각해보면 최씨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제 말에 맞장구를 쳤는지 참 미스터리예요.”꽤 그럴듯한 이력과 함께 최씨가 밝힌 이름은 ‘최규백’. 하지만 실제로 ‘최규백’이란 이름은 최씨가 사용하는 ‘가명’에 불과했다. 과거 우연히 만난 국정원 직원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쓴 가짜 이름이 국정원 고위 간부 이름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이후부터 이용했던 것. 하지만 우연인지, 실제로 최씨는 ‘진짜’ 최규백 전 국정원 기조실장과 상당히 닮았다는 후문이다.

최씨의 ‘이력 자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백씨를 만날 때마다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의 화려한 이력까지 늘어놨다고 한다. 백씨에 따르면 최씨의 할아버지는 모 회사 창업주, 큰아들과 둘째 동생은 현직 검사, 셋째 동생과 사촌동생은 모 회사 사장. 심지어 배다른 동생 중 한명은 국회의원이라고 떠벌렸다. 마치 드라마 속 캐릭터를 방불케 하지만 백씨는 이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에 너무 쉽게 속았던 것이다.

“뒤통수 칠 줄은 상상도 못해”

하지만 무엇보다 백씨가 최씨에게 쉽게 속았던 이유는 그의 연기력, 외모, 배경도 아니었다. 바로 2년이라는 ‘공백 기간’이었던 것.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1년 초봄. 경기 용인시 모 골프장에서 우연히 함께 라운드를 하며 안면을 트면서 부터다. 하지만 백씨가 최씨에게 사기를 당한 시점은 2003년 여름께. 결국 2년이라는 기간은 백씨에게 사기를 치기 위해 접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저한테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상상도 못했죠. 그동안 호형호제하면서 잘 지내왔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방송국 앞에 찾아와서 상가, 아파트 미분양분에 투자할 경우 배의 수익을 남길 수 있으니 돈을 투자하라고 하더라고요. 워낙에 투자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친구라 철석같이 믿고 돈을 건넸죠.” 이렇게 해서 세 차례에 걸쳐 백씨가 최씨에게 뜯긴 돈은 무려 5억원. 이 과정에서 백씨는 차용증, 각서 한 장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었다. 이후 최씨는 “아직 사업 진행 중”이라는 말만 반복하며 백씨를 피했다. 백씨는 그에게 시간을 주겠다고 설득했지만 연락을 끊었다. 이에 맘고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는 백씨는 그러나 막상 최씨가 경찰에 체포될 때까지 자신이 속고 있다는 낌새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한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최씨의 연기력에 지난 3년여동안 완전 감쪽같이 속아왔다는 얘기다. 이 같은 백씨의 주장을 대변이라도 하듯 경찰은 “최씨의 의심스런 행각은 백씨가 아닌 주변의 첩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오랜 연기생활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 백씨가 이처럼 어리숙하게 속은 점에 대해서는 수사관들도 고개를 갸웃할 정도. 강남경찰서 지능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당초 수사가 최씨의 행적을 수상히 여긴 주변 사람들의 첩보에 의해 시작된 것인 만큼 피해자가 백씨 외에도 더 있을 것으로 예상돼 수사를 확대해 나갔다”면서 “그 결과 최씨가 강남 골프장 일대를 돌아다니며 부유층 여성들을 상대로 이 같은 사기행각을 숱하게 벌여왔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현재 백씨는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 허탈감에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진행 중인 소송 건에 대해 그러나 백씨는 “좋은 방향으로 해결할 것”이라며 “최씨가 잘못을 시인하고 가져간 돈에 대해 보상을 해준다면 그의 처벌은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 강남경찰서 담당 수사진 인터뷰“피해자 대부분 여성… 사기라고 믿지 않아”
경찰에 따르면 이번 사건에 포함된 피해자는 무려 100여명. 이중 백씨를 제외한 피해자 모두가 여성이었다고 한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피해 여성 대부분이 40~60대 부유한 미망인들이라는 것. 경찰은 “최씨는 인터넷 상 인물정보 확인 등에 무지한 중년층 이상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며 “그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셈”이라고 전했다.

한편 경찰은 “피해자들 대부분이 ‘그럴 리 없다’, ‘그럴 분이 절대 아니다’며 여전히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조차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며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또 “민주화, 투명화 됐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사회는 청와대나 여타 권력기관 등 화려한 배경을 과시하는 이들에게 쉽게 속는 경향이 있다”며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또 한 차례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은>

정은혜  kkeunna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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