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법으로 금지하나마나…불법 반출 문화재 어마어마해”
[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법으로 금지하나마나…불법 반출 문화재 어마어마해”
  • 조아라 기자
  • 입력 2014-07-21 15:32
  • 승인 2014.07.21 15:32
  • 호수 1055
  • 6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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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동고화 전쟁통에 전부 손실

우리 문화재 시장이 고사 직전이 된 두 번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우리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해외로 유출시키고 흩어지게 해서다. 이는 문화재를 짓밟은 거나 마찬가지 행위다. 해방 후부터 우리 경제는 침체일로에 있었다. 1960년대 우리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 도약의 길로 들어설 때까지도 수많은 우리 문화재가 일본으로 구주와 미주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문화재보호법은 해외유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법은 있으나마나 뒤로 유유히 빠져 나갔다. 뒤로 외국거래를 하는 상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문화재를 팔았다. 심지어 판 물건을 외국인이 원하는 곳까지 배달도 했다. 외교행낭 등을 통해, 군사우편을 통해 얼마든지 유출시켰다. 주한미대사관 문정관이었던 핸더슨은 수백 점을 자기 집인 미국 보스톤으로 보냈다. 프랑스 대사였던 샹발도 귀한 우리 문화재를 많이 수집해 소장품 전부를 프랑스로 가져갔다. 뿐만 아니라 외교관과 준 외교관, 미군, 소수의 유엔군, 기타 각종 외교기관원, 상사직원 등이 한국에 오래 머물며 불법으로 입수한 문화재를 쉽게 해외로 가져갔다.

그 당시 우리는 외화가 귀했다. 그래서 무역상 중에는 옛 목재 등 나무상자를 만들어 수출한다하고 우리 옛 가구를 큰 배에 하나 가득 싣고 나가려고 한 일도 있었다. 명동에 있던 성화산업이라는 곳은 이런 사실이 적발돼 신문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적발된 것은 아마 열에 하나일 것이다. 외화 획득과 수출이라는 미명하에 상당량이 버젓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이 중에는 고려부터 조선조까지의 궁중 미술품이 다량 있었다.

궁중미술품은 당시 사신으로 내왕할 때 서로간의 증여품이 상당했다. 이 중 미술품이 다수를 차지했다. 사행시 역관 등을 중심으로 사행원 상당수가 사무역을 했다. 아마 1950년 6·25전쟁만 없었다면 이들 미술품이 상당량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다. 하지만 전란으로 모두 파손 멸실되고 말았다. 우리 큰댁에도 주로 중국과 일부 우리나라 고서화 수백여점이 있었는데 전란으로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우리 고궁에는 상당히 많은 고동과 서화가 있었던 것은 짐작된다. 구한말 고종, 순종이 궁중 자문관으로 와있던 외국 외교관과 고문 학자들이 돌아갈 때 하사한 병충채와 족자 등으로 꾸민 글씨가 후에 되돌아온 것도 꽤 많았다.

또 창덕궁에는 아마 수천 점의 서화고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구 황실 재산관리총국시절 대부분이 불법 유출됐다. 6·25전쟁 서울수복 후에는 창덕궁에 있었던 재산관리총국 사무실과 창고가 불이나 고동과 서화 등 재산문서가 전부 소실돼 버린 사고도 있었다. 일부에서는 이 화재를 누군가 고의로 냈다는 뒷이야기도 무성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어디서 쏟아져 나왔는지 궁중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두루말이, 편지지, 조선채색먹 등이 인사동 상가에 범람하고 있었다. 이 유물들은 분명 창덕궁의 공물 수납창고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들 지묵들은 모두가 한번 손도 안대본 보물들이었지만 그 후 흩어져서 지금은 그림자도 없다.

고 석주선교수가 증언한 말에는 석 교수가 조선왕실과 황실의 왕과 황제와 왕비 황비의 대례복 등을 고증할 길이 없어 천신만고 끝에 창덕궁 공물창고에서 이 자료를 찾았다고 했다. 구한말에는 왕실에서 황실로 바뀌었기 때문에 왕실과 황실의 복식자료가 아주 귀하다. 특히 왕후의 대례복인 적의는 더욱 귀해 사진을 찍고 조사하자고 했더니 안 된다는 답만 그대로 돌아왔다. 후에 재차 신청했더니 한 점도 없다고 했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 백자준(白磁樽) 18세기 전반 호림박물관 소장 조선시대는 각종 항아리 독, 방구리 등이 아주 많아서 항아리의 나라라고 우리 선생님들은 말씀하셨다. 작은집에선 대청마루에 큰 집에서 찬방마루에 그리고 찬방, 부엌, 다락, 광, 장독대 등에 항아리가 그득했다. 우리나라 백자항아리와 준(樽)은 15~16세기의 형태가 비슷하다. 17세기에는 왜란과 호란을 겪어 사대와 자존 자아의 발견 사이에서 투쟁하고 자성하고 고민하면서 15~16세기에는 없던 형태가 다른 항아리가 많이 생겨났다. 이전시대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형태였다. 과도기인 17세기 중엽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백자항아리가 두 가지 키 큰 준과 달처럼 원만하게 생긴 항아리로 이행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사대의 어리석은 꿈에서 깨어나 ‘나는 무엇이냐’는 자성과 자아의 발견에서 비롯됐다. 백자항아리도 드디어 17세기 말 18세기 전반까지의 기간 사이에 이 사진의 준과 같이 너무 자연스럽고 원만하고 잘생긴 키 큰 준과 달같이 둥근 항아리가 탄생하게 됐다. 경기도 광주 분원의 궁평리 관음리 오향리 금사리에서 명품이 나왔으나 사람들은 대체로 금사리 가마라고 통칭한다. 이 백자 준도 피부가 눈처럼 희고 구부는 조금 낮지만 윗몸이 달항아리 같고 아랫몸은 급격하게 홀쭉해져서 굽에 이르는 소위 금사리식의 잘생긴 준이다. 가마 내에서 불길에 의해서 의도했던 것보다 좀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조형으로 탄생한 것이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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