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자살설
이순신의 자살설
  •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 입력 2014-07-21 13:43
  • 승인 2014.07.21 13:43
  • 호수 1055
  • 4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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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11월 19일, 이순신과 명나라 진린은 조명연합군 함대 400여 척을 이끌고 일본군의 도망갈 길목인 남해도 관음포와 하동 사이의 노량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루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와 같은 일본군이 고양이를 물 수밖에 없을 만큼 위험한 해전이었다.

그러나 천명과 같이 피할 수 없는 전투였다. 침략자의 야만과 탐욕을 뿌리 뽑으려는 최후의 결전이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침략자의 저항도 거셌다.

이 전투에서 일본전선 200여 척이 격침되었고, 조명연합군은 60여척이 피해를 당했다. 통제사 이순신을 비롯해, 가리포 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흥양현감 고득장 등 20여 명의 조선 장수가 전사했고, 진린의 아들과 명나라 좌선봉장 등자룡도 전사했다.

이순신의 자살설은 소설적 상상력일 뿐이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자살할 사람도 아니고 전사도 고의성이 없다. 전투 때마다 언제나 겁에 질린 장졸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가장 앞장서서 활을 쏘았고, 지휘했다.

그를 걱정한 부하들이 말려도 “내 명은 하늘에 달려있다”며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였기에 사천해전에서는 갑옷을 입었어도 총탄에 어께를 크게 다쳤다. 명량해전에서도 133척의 적선을 보고 두려움에 떨며 머뭇거리는 장수들을 대신해 가장 먼저 최전방에서 홀로 일본군과 전투를 하면서 기적을 만들었다.

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태어나면 반드시 죽고,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라는 평소 소신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에 최선을 다한 결과일 뿐이다. 아무리 안타깝더라도 자살설로 그의 삶을 왜곡하는 것은 이순신을 비하하는 것이다. 

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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