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정이 들대로 들었던 안씨는 김씨에게 매달렸지만, 이미 돌아서버린 김씨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듭되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김씨가 자신을 피하며 만나주지 않자 안씨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안씨는 김씨가 새로운 남자 한모(44)씨를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안씨는 극도의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급기야 김씨에 대한 안씨의 사랑은 집착을 넘어 분노로 변하게 된다. 한 가정의 가장이었지만, 애정에 눈이 먼 안씨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씨의 머릿속에는 오직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김씨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결국 안씨는 내연녀 김씨와 그녀의 새 남자친구 한씨를 살해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지난달 26일 오전 8시 40분경. 안씨는 김씨가 사는 용문동의 다세대 주택을 찾아갔다. 그러나 내연녀는 3주전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후였고, 그 집에는 새로 이사온 주부 김모(31)씨가 살고 있었다. 안씨는 낯선 남자의 느닷없는 침입에 어리둥절해하는 주부 김씨를 붙잡고 내연녀의 소재를 추궁했다. 그러나 김씨의 대답은 ‘모른다’였다. 김씨가 거짓말을 한 것으로 생각한 안씨는 홧김에 준비해온 스킨스쿠버용 칼로 김씨를 찌르고 만다. 내연녀에 대한 분노가 엉뚱한 곳으로 발산되는 순간이었다.
여느날과 다름없던 평온한 아침, 주택가에서는 귀를 찢는듯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놀란 이웃주민이 달려왔을 때 이미 집주인 김씨는 과다한 피를 흘린 채 숨진 상태였다. 그러나 안씨의 엽기 살인행각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의 분노는 내연녀와 정을 통한 한씨에게로 향했다. 안씨는 한씨가 거주하는 신당3동의 주택가로 향했다. 한씨의 집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20분경. 그러나 집에 한씨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한번 ‘피’를 본 안씨는 주체할 수 없는 광기와 분노에 휩싸인 상태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집에 있던 한씨의 아내와 13살, 9살 난 그의 두 딸을 흉기로 무참히 찔러 살해하고 만다.
용문동에서 주부 김씨를 살해한지 불과 40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첫 번째 희생자인 주부와 마찬가지로 이들 일가족 역시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인물로, 이들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안씨가 휘두르는 칼부림에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순식간에 4명을 살해한 안씨는 사건현장을 빠져나와 도주하던 중 체포위기에 직면하자 미리 준비한 독극물을 먹고 자살했다. 잘못된 애정행각으로 인해 순식간에 무고한 생명들을 앗아간 끔찍한 살인극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 이 죽일 놈의 사랑… “사랑이 뭐길래”
“그래도 사귀던 사람인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싶어요” 한달에 대여섯건꼴로 치정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모 경찰서 A형사의 푸념이다. A씨에 따르면 치정사건은 사생활보호 차원에서 드러나지 않을 뿐, 실상은 나이와 사회적 지위, 학력과 교육수준 등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단골사건중의 하나다. “어른들이 여자 한명을 사이에 두고 ‘니꺼, 내꺼’하며 싸우는 일, ‘어떻게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냐’며 따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순간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싸우다가도 일단 서에 오면 창피하니까 대충 무마하고 돌아가는거죠. 웃지못할 일들 참 많습니다.” ‘막가파’식 사랑싸움에는 교수나 기업체 간부 등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사랑에 눈먼 유부남들의 엽기행각은 상상을 초월한다.
“변심한 내연녀를 폭행한 죄로 입건된 모 기업 간부는 형사들앞에서 ‘내가 저X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다른 놈과 노는 꼴은 못본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어요.” 자영업을 하며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진 한 40대 남성은 이별을 통보한 애인을 모텔에 감금·폭행한 죄로 입건됐는데, “내 여자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왜 난리냐, 저 여자는 죽어도 내 손에서 못벗어난다”고 큰소리를 치더라는 것. A씨에 따르면 남녀간 잘못된 사랑은 끔찍한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을 안고 있기에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스토킹을 하거나 끊임없이 그 사람의 주변을 맴도는 일은 그나마 나은 경우다.
옛 애인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격분, 욕설과 폭행을 일삼고 심하면 납치, 감금에 고문까지도 이뤄진다는 것이 A씨의 얘기다. 또 사회생활을 하지 못할만큼의 악성 음해성 루머를 퍼뜨리거나 둘만의 은밀한 비밀을 폭로하는 경우도 다반사. 한 40대 이혼남은 젊은 애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에 격분, 수일 밤낮을 끌고 다니며 ‘너죽고 나죽자’식 협박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감금기간동안 수차례의 폭력과 성폭행으로 인해 여성이 만신창이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결혼을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쓰고나서야 간신히 풀려났다는 것. 그러나 피해자들은 협박과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고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며, 상당수는 ‘정’ 때문에 합의하고 용서하는 일이 많다.
또 애인을 상대로 끔찍한 ‘테러’를 가했던 상대 역시, 조사과정에서는 ‘너무 사랑해서 그랬다’, ‘너 없으면 안된다’는 말로 너무도 순순히 잘못을 인정, 경찰들을 맥빠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실제로 ‘헤어지자’는 애인을 며칠씩 감금하고 폭행하기를 반복, 수차례 서에 드나들었다는 한 남성은 얼마전 같은 죄로 또다시 입건된 후, 형사들 앞에서 ‘각서’를 쓰며 용서를 빌기도 했다는 것이다. A씨는 “대부분의 치정사건은 질투와 집착이 원인이 되어 발생해요. 질투를 젊은남녀들만의 애정행각으로 보면 오산입니다. 사랑싸움에는 나이도 체면도 없어요. 잘못된 사랑방정식이 끔찍한 범죄로 연결되는거죠”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 폭행에 감금…“태워죽이려고까지”
애인의 변심에 분노한 이들의 복수극은 끝이 없다. 500만원을 주겠다며 청부폭력을 의뢰한 남성, 애인의 나체사진을 인터넷에 유포한 남성, 애인을 납치·감금·성폭행한 남성, 음해성 메일 및 동영상을 유포한 남성, 몰카 및 도청을 일삼은 남성, 애인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손목을 긋는 등 상해를 가한 남성, 심지어 옛애인의 동생을 납치하거나 가족들에게 흉기를 휘두른 남성들은 이미 뉴스의 단골 주인공들이다. 심지어 애인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거나 애인의 애완견을 죽인 경우, 또 애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분신·투신 자살을 시도한 경우도 있었다.
올 1월 한달동안 경찰에 접수된 치정사건만도 수십건에 달한다. 지난 1월 13일에는 헤어지자는 내연녀를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40대 남성이, 16일에는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연녀를 흉기로 위협하고 폭력을 행사한 50대 남성이 구속됐다. 19일에는 내연녀에게 염산을 뿌린 뒤 자신도 염산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한 60대 남성이, 26일에는 변심한 애인을 납치, 모텔에 감금한 뒤 살해하려한 25살 남성이 검거됐다. 또 같은 날 변심한 애인의 몸에 석유를 뿌려 살해하려한 40대 여성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복수심에 불타, 혹은 애인의 마음을 돌리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이들은 이성을 잃은 극단적 행동으로 인해 결국 쇠고랑을 차게 됐다. 경찰 관계자는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한쪽이 배신감에 저지른 범죄”라며 “지나친 집착이 부른 끔찍한 결과”라고 요약했다.
이수향 thelotu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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