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월남전 참전자의 삶
끝나지 않은 전쟁, 월남전 참전자의 삶
  • 오두환 기자
  • 입력 2014-07-14 11:16
  • 승인 2014.07.14 11:16
  • 호수 1054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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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해 하는 고엽제 전우들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10월 1일 ‘국군의 날’은 알아도 7월 18일 ‘고엽제의 날’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고엽제 피해자들은 소외된 삶을 살아왔다. 미국은 고엽제의 날을 ‘오렌지 데이’라고 부른다. 이는 고엽제가 담긴 드럼통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오렌지색깔의 띠를 두른데 서 유래했다. 고엽제 피해자들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국방부에 따르면 베트남전 참전 인원은 1965년부터 1073년까지 32만4864명이다. 이 중 4601명이 전사하고 498명이 순직 또는 사망했다. 부상자는 1만1232명이다.

자신의 목숨과 젊음을 다 바친 국군장병들을 우리 정부와 시민들은 관심 밖에 두어 왔다. 하지만 이들의 희생정신은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대한민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악마의 화학물질 ‘고엽제’

베트남전에 파병됐다가 살아 돌아온 장병들 중에 13만여 명은 귀국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앓았다. 어떤 사람은 툭하면 코피를 흘렸고, 목이 퉁퉁 부어올랐다. 온몸에 붉은 여드름이 솟기도 했다. 각종 암과 피부병이 생겼다. 기형아 자녀를 출산했고 태어난 아이가 이유 없이 신체마비 증상을 보였다.

모두 고엽제 후유증으로 의심됐다. 고엽제에는 ‘악마의 화학물질’로 불리는 다이옥신이 함유돼 있었다. 미국에서는 1969년 이미 초미량의 다이옥신이 생체에 흡수돼도 각종 암과 신경계 마비를 일으킨다고 보고됐다. 그런데 미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약 7200만ℓ의 고엽제를 살포했다.

적군의 은둔지와 무기 비밀수송로로 이용된 정글 및 경작지 등을 제거하는 목적이었다. 고엽제는 1960〜1971년까지 베트남 국토의 15%에 해당되는 2500만㎢의 광범위한 지역에 뿌려졌다. 이 중 80%에 해당하는 고엽제가 한국군 작전지역에 뿌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귀국 후 평생 약 달고 살아

경기도 평택에 거주하는 조동재씨도 1969년부터 1970년까지 15개월간 베트남전에 참전했었다. 조씨는 올해로 85세다. 그는 베트남 다낭 호이안에서 해병대 상사로 복무하면서 많은 시간을 정글에서 보냈다.

“어느날 정글을 수색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비행기 소리가 들려. 그러더니 뭔가를 뿌려. 우리는 그게 살충제인 줄 알았지. 입고 입던 옷도 벗어 가면서 그 살충제를 온몸에 맞았어. 그땐 아무도 몰랐어. 그게 살충제가 아니라 고엽제라는 것을 말야”

당시 대부분의 군인들은 고엽제가 무엇인지 몰랐다. 단순히 정글 속의 지독한 모기 등을 없애는 살충제인 줄 알고 일부러 온몸에 맞았다. 하지만 그들이 맞은 것은 ‘악마의 화학물질’로 불리는 고엽제였다.

15개월간 복무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조씨는 곧 몸에 이상증상을 느꼈다. 온몸이 간지러워왔다. 가려운 부위를 긁기 시작하면 금세 피가 나왔고 상처도 잘 아물지 않았다. 결국 병원을 찾은 조씨는 그때서야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85세인 조씨는 지금도 두 달에 한 번씩 병원을 찾는다. 월남전 참전 용사라는 타이틀과 함께 고엽제 피해자라는 꼬리표가 평상을 따라 다녔다. 그나마 조씨는 형편이 나은 편이다. 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무료로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약도 무료로 받아 복용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고엽제 피해자들이 조씨처럼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보니 고엽제 피해자들은 생활 환경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증상이 심해 집이나 병원에 누워만 있는 경우도 많다. 앞서 밝힌 것처럼 고엽제 후유증으로 생기는 증상이나 질환은 특정돼 있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평생을 병원에서 살거나 약을 끼고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엽제 피해자들이 제일 힘든 것은 치료할 수 있는 약도 없다는 점이다. 조씨도 “이건 약도 없어. 두 달에 한번 약을 타가긴 하지만 먹을 때 문이지 먹고 나면 온몸이 가려운 것은 그대로야”라고 전했다. 또 조씨는 “이제 동기도 후배도 남은 사람들이 몇 없어. 벌써 다 죽었어. 내 조카도 고엽제 피해자인데 아이들도 다 병신이 됐어. 난 베트남에 가기 전에 결혼해 아이를 낳았으니 다행이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다행스럽게 조씨는 장수를 하고 있다. 자식들도 분가를 해 모두 가정을 이뤘다. 나라를 위해 싸우고도 이렇게 아픈데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묻자 “없어. 이제 다 끝났는데 뭐. 이렇게 살다가 가는거야”라고 말했다. 목숨과 젊을 바쳐 싸운 댓가 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현실이다. 하지만 조씨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비록 매일 같이 약을 먹고 가려움증을 참아야 하는 고통 속에 살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애국’이라는 두 글자가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참전 군인들은 아직도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7월 12일 대법원은 고엽제 피해자들이 미국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14년 만에 사실상 제조사의 손을 들어줬다. 피해자들이 처음 미국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추진한 때로부터 20년 만이다.

20년 걸린 소송 결국 패소

고엽제 피해자들은 1993~1994년 미국 캘리포니아 법원에 고엽제 피해보상 국제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미국 법원은 1998년 “한국 대법원의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아 미국에 집행소송을 제기하라”고 했다. 이듬해 피해자들은 서울중앙지법에 다우케미컬의 국내 특허권에 대한 가압류 신청을 냈다. 서울중앙지법은 이 가압류 신청을 받아들였다.

피해자 1만6579명은 1인당 3억원씩 모두 5조1600억여원의 손해배상청구 본안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2002년 1심 재판부는 “현재까지 역학조사 결과로 고엽제 다이옥신 성분과 후유증 사이의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반면 2006년 2심 재판부는 미국 국립과학원 보고서 등을 근거로 “고엽제 후유증 대부분은 역학조사 결과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대법원 상고심에서 뒤집혔다. 대법원은 염소성여드름 환자 39명에게 1인당 600만~1400만원씩 4억659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다른 피해자의 청구는 모두 기각했다.

freeore@ilyoseoul.co.kr 

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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