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믿는 도끼에 발등찍힌 격”
육군은 16일 보도자료를 통해 윤종빈 감독을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로 고소했다고 밝혔다. 육군이 발끈한 이유는 제작자가 영화제작을 위해 군 당국을 속였다는 사실 때문. 즉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라는 얘기다.사건은 지난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군에 따르면 중앙대는 지난해 5월 12일 육군본부에 한편의 공문을 보내왔다. 공문은 영화제작에 필요한 촬영협조에 관한 것으로, 제작자는 ‘군에서 만난 선·후임병 간의 우정에 대한 영화를 만들 계획’이라며 군측에 촬영 협조를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육군이 실제로 받아본 시나리오 역시 군대에서 만난 선·후임이 군부대 적응을 돕는 과정에서 생긴 돈독함이 사회의 우정으로 연결되어 전역 후에도 둘도없는 친구처럼 지낸다는 내용이었다. 육군은 이 영화가 병영생활의 참모습과 사나이들의 돈독한 우정을 그려낼 수 있겠다는 판단하에서 촬영 협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흘동안 내무실과 PX, 연병장, 의무실 등을 특별히 개방해 사병들의 모습을 촬영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는 것이다.
군 현실 왜곡 vs 군대내 부조리 고발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육군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제작된 영화는 애초 받아본 시나리오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영화는 군에 제출한 시나리오처럼 중단편이 아닌 러닝타임 121분의 장편이었다. 무엇보다 군이 문제 삼는 것은 영화의 내용. 선·후임병의 우정을 아름답게 그리겠다는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영화는 억압적인 군대문화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는 후임병에 대한 선임병들의 욕설과 폭언, 화장실에서 후임병 집단 폭행과 괴롭힘, TV도 보지 못하는 이등병, 기합장면 등 군대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영화는 피해자의 입장이던 인물이 위계구조에 따라 가해자의 위치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실제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좀처럼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부대의 불합리한 규율과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 이등병 때 폭력과 비합리성에 맞섰지만 자신도 모르게 현실과 타협하는 인물 등을 통해 군대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 특히 최종 편집과정에서 삭제된 내용 중에는 이등병이 화장실에서 병장에게 성폭행 당하는 장면도 있었다. 이처럼 영화에는 군대의 어두운 폐부를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영화는 군대를 폭력과 질서 안에서 길들여지는 과정으로 설정하고, 이를 통과해야 비로소 ‘남자’가 된다는 우리사회의 통념에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그러나 영화속에서 소속집단에 순응하지 못하는 인물들은 극단의 선택으로 치닫는다. 무엇보다 억압된 군복무로 인해 후임병이 자살하는데 이어 선임병도 자살하는 내용은 충격적이다. 육군은 이러한 내용들이 군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군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군 당국의 선처를 바란다
사실 이 영화가 가져올 논란은 어느정도는 예고된 것이었다. 지난 2일 언론시사회에서 “군부대 촬영허가를 받지 못해 거짓 시나리오를 작성, 실제 군부대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는 윤 감독의 고백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 그는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군대를 한국 사회의 축소판으로 봤다. 남자의 육체를 갖고 태어나더라도 개인마다 갖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정도는 차이가 나는데 군대는 늘 남성성만 강요한다. 이로 인한 사람들의 상처를 그리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군 당국의 강경대응에 윤감독측도 공문을 통해 입장을 밝힌 상태.
정당치 않은 방법으로 촬영허가를 얻은 것을 인정한 윤 감독은 “개인적으로 처벌 대상이 된다면 얼마든지 달게 받겠다.그러나 조금만 더 유연한 입장으로 영화를 봐주길 바란다. 군 측의 너그러운 시각을 요청 드린다”고 말했다.일부에서는 이번 사건과 관련 “실제 군대에서는 영화에서 다룬 내용뿐 아니라 더 심한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며 “군대에 다녀온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에 대해 군이 너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들린다.적나라하게 까발려진 남성문화에 대한 군의 보복성 조치인가, 예술혼에 앞선 제작자측의 무리한 촬영강행인가. ‘영화’ 한 편으로 불거진 육군과 제작자간의 갈등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수향 helotu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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