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귄지 4개월만에 혼인신고
이모(24)씨와 박모(23)씨의 ‘악연’은 지난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년 11월경부터 경기도 안성시 인지동 W게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안면을 익힌 바 있는 이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차 올 3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들은 금세 연인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서로에게 ‘필’이 꽂힌 이들의 애정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이들에게 서로는 ‘운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가정을 이루기 위한 아무런 경제적 기반도 없는 상태였지만 이들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들은 부부의 연을 맺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한 가정을 책임질만한 여력이 없는 이들의 결혼을 부모들이 쉽게 찬성할리 없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들의 막무가내식 ‘사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들은 부모를 설득하는 일을 애초에 포기, 지난 7월 15일 부모 몰래 혼인신고를 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피의자 이씨가 거주하던 성남시 태평동의 단칸방에서 ‘꿈에 그리던’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첫 부부싸움 후 곧바로 별거
비록 좁은 단칸방이었지만 신혼생활은 행복했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지만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랑’하나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이들 부부였지만 결혼은 연애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결혼은 낭만이 아닌 생활이었다. 이씨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작은 회사에 취직을 해서 다니고 있는 상태였지만, 변변치 않은 월급으로 두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빠듯했다. 경제적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현실을 박씨는 답답해했고 이들 부부 사이에는 작은 앙금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지난 8월 15일. 첫 부부싸움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때까지만해도 이 싸움이 앞으로 얼마나 끔찍한 사건을 불러올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이들은 시간이 날때마다 PC방에 같이 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그날도 PC방에 같이 갈 것을 요구하는 이씨에게 박씨는 무심코 ‘무능력하다’는 말을 하게 됐고, 자기를 무시하는 부인의 말에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이씨는 몹시 흥분하며 화를 냈다. 이들의 싸움은 결국 격렬한 몸싸움으로 이어졌고, 분을 삭이지 못한 박씨는 친정이 있는 안성으로 짐을 싸서 내려갔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40일만에 이혼
느닷없이 딸의 혼인사실을 알게 된 박씨의 집은 발칵 뒤집어졌다. 곱게 키운 딸이 부모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덜컥 혼인신고를 하고 남자의 단칸방에 살림을 차렸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부모가 노발대발한 것은 당연지사.박씨의 부모는 당장 ‘이혼’을 요구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두 사람이 만나지 못하게끔 단단히 못을 박아두었다. 결국 부모의 완강한 반대로 둘은 8월 26일 협의이혼을 하게 된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는 옛말은 이들 부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결국 단 한번의 부부싸움으로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셈이다.
그러나 이혼은 했지만 부부의 연은 그렇게 간단히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이씨는 화를 억누르지 못했던 자신의 경솔함을 반성하고 박씨와 다시 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씨는 이혼 후 수차례 박씨에게 전화를 걸어 용서를 빌며 재결합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미 돌아선 박씨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박씨 부모의 반대 역시 전혀 수그러들줄 몰랐다. 그러나 이씨는 이대로 박씨를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이씨는 극단적인 방법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이씨는 박씨와 박씨의 가족들을 위협, 겁을 준 뒤 재결합 허락을 얻어내기로 한 것이다.
순간적 격분에 일가족 3명 참변
결국 10월 12일 새벽, 이씨는 미리 준비해둔 흉기를 지니고 안성시 창전동의 K맨션에 사는 박씨의 집 앞에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새벽 5시 30분경 박씨의 아버지가 조간신문을 가져가기 위해 문을 여는 찰나였다. 이씨는 이틈을 놓치지 않고 집안으로 재빨리 들어왔다.이씨는 재결합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박씨측에는 도통 먹히지를 않았다. 화가 난 이씨는 박씨의 아버지와 박씨의 언니, 박씨에게 미리 준비해간 흉기를 휘두르며 위협, 난동을 부렸다. 흉기에 찔린 박씨와 박씨의 언니는 그 자리에서 숨지고 박씨의 아버지는 피를 흘리며 경비실까지 내려와 피해 사실을 알린 뒤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비실 직원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곧바로 출동, 현관문을 잠그고 대치한 이씨를 10여분간 설득, 현장에서 검거했다.
사건을 담당한 안성경찰서 강력2팀 정동혁 형사에 따르면 이씨가 처음부터 박씨의 가족을 살해할 의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 형사는 “조사결과 이씨는 전 부인의 집에서 두 사람이 일절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 때문에 무척 힘들어 한 것 같다”며 “자신의 말을 도무지 들어주지 않자 흉기로 위협만 하려고 했는데, 순간적으로 화를 이기지 못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전했다. 그러나 조금만 잘못 사용해도 큰 사상자를 낼 수 있는 날카로운 횟칼을 미리 준비했다는 점은 단순히 협박용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경찰의 입장이다. 짧은 시간내에 성급하게 맺어진 잘못된 인연이 일가족 3명의 아까운 목숨을 앗아가는 끔찍한 사건으로 매듭지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수향 thelotu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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