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분위기는 과거 부산 아시안게임에 참석한 북한 여성 응원단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었다. 만경봉 92호 편으로 입국한 280여명의 여성 응원단은 특히 빼어난 미모와 차림새로 남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북한 여성 응원단은 제복이나 한복차림뿐 아니라 세련된 형태의 양장을 선보여 눈길을 끌기도 했다. 막연히 인민복이나 흰색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둘렀을 것이란 예상을 깬 것이었다.북한은 최근의 남북 화해협력 분위기에 따른 교류과정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외모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남한의 세련된 화장술과 패션감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주로 남한의 여성계 인사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북한의 여성 대남 관계부문 종사자나 남한을 다녀간 교예단·운동선수 등이다. 또 금강산 관광의 과정에서 우리측 관광조장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북측 안내원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움직임은 북한 내부에서도 감지된다. 북한의 대중잡지 ‘천리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여성들의 몸매를 아름답게 하고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굽이 높은 신발(하이힐)을 신을 것을 권장했다고 전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여성들이 굽이 높은 신발을 신을 경우 키가 커 보이는데 특히 ‘조선치마’를 입고 거기에 굽이 높은 신발을 신으면 인체의 피로를 덜어준다”며 자신의 독특한 ‘하이힐 관’을 펼쳐 보이고 있다. 건강 관련 부분은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현재 북한체제를 이끌어 가는 최고지도자인 김 위원장이 여성들의 패션 문제에 이같은 관심을 나타냈다는 점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70년대 말까지만 해도 북한 주민들의 옷차림은 검은색 흰색 등 주로 단색이었고 그 형태도 천편일률적이고 단조로웠다. 조금이라도 화려하고 사치스럽거나 색다른 옷차림은 ‘자본주의 부르주아 날라리 풍조’ 로 치부돼 조직적인 통제를 받았고 주변 사람들의 눈총과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89년 7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평양축전)을 계기로 변화의 바람이 몰려왔다. 북한은 우리의 88서울올림픽에 대응해 평양에서 동구 사회주의 국가와 일부 서방국가의 청소년들을 불러들여 축전을 마련했다. 이 행사에는 북한의 청소년들도 참여해 축전기간 동안 생활을 함께 하며 어울렸다. 이후 주민들은 종전의 단순하고 틀에 박힌 옷차림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화려한 패션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간부들과 외교관을 비롯한 이른바 외무부 종사자, 부유층 속에서 잠재해있던 패션욕구가 분출, 일반 주민들에게까지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당시 여성들의 바지착용이나 국방색 또는 검정색 옷차림을 금지했다고 한다. “여성들이 바지를 입으면 여성다운 풍모가 없어지고 국방색과 검정색 옷은 외국인들이 군복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여성들의 옷차림에서 가장 큰 변화는 노출현상이다.
평양시 여성들은 속옷이 비치는 옷이나 앞가슴이 많이 패인 옷, 민소매 같은 것을 즐겨 입는다. 민소매도 가느다란 끈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망사를 걸치지 않는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런 유형의 옷은 주위의 눈총을 받기가 일쑤여서 함부로 입지 못했으나 평양축전을 계기로 보편화됐다. 지난 90년 여름에는 한때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길이가 짧은 반바지가 유행한 적이 있다. 북한 당국은 즉시 이른바 ‘부르주아적 옷차림’에 대한 경고를 내렸고 이후 짧은 반바지는 사라졌다. 그러나 북한 여성들의 노출 경향은 수그러들지 않아 해마다 여름철이 되면 북한의 신문과 여성잡지는 “여름철에는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는 경우가 많으므로 속옷차림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계도성의 기사를 싣고 있다.
미니스커트는 지난 95년경부터 점차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그전에는 보통 치마길이가 무릎 밑으로 내려왔고 부유층 여성들 사이에 롱스커트가 많이 유행되었지만 무릎위의 미니스커트가 유행되기는 처음이다. 물론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속옷에 가까운, 지나치게 짧은 미니스커트는 아니다. 그리고 다른 유행과 달리 아직 많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하여 일부 부유층의 용기 있는 여성들에 의해서만 조금씩 유행되고 있다.
북한, 색조화장품 부문은 낙후
주로 기초화장품유통 … 남성 무스원료는 송진
패션과 함께 북한 여성들의 ‘야해지기’에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은 화장품 분야. 북한에서 일반적으로 화장품이라고 하면 스킨인 ‘미안수’와 로션인 ‘살결물’과 함께 크림·분·볼연지·립스틱이 포함된다. 색조화장품 부문은 북한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아 낙후돼 있어 북한 화장품은 기초화장품과 약간의 메이크업 제품을 중심으로 생산, 유통되고 있다. 최근들어 ‘천리마’ ‘조선여성’ 등의 잡지가 앞다투어 화장법을 지도하는 기사나 피부미용 정보를 싣고 있는 점은 북한 여성들의 화장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헤어스타일 부문에서의 변화도 만만치 않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헤어스타일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치장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지만 최근의 개방바람과 외부사조의 유입으로 헤어스타일링 무스에 대한 안내가 언론에 소개되고 있다.
북한에서 무스의 사용은 급격한 붐을 이뤄 여성들은 물론 청소년층을 위주로 일부 남성에게도 번지고 있다. 북한에서 현재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무스는 그 원료가 송진이다. 화장품 생산 시설에서 공식적인 생산을 않고 있는 관계로 북한 주민들이 ‘자력갱생’ 차원에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송진 무스는 무엇보다도 손쉽게 원료를 구해 가정에서 직접 만들 수 있다는 이점이 있는데 북한 언론들이 최근 주민들을 대상으로 송진 무스의 제조방법을 홍보하고 있는 것도 이채로운 일이다.물론 이같은 움직임은 북한주민 전체적으로 볼 때 극히 일부에 국한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신분에 따라 질과 양이 차등적으로 이뤄지는 의류배급의 경우 각종 직물이 턱없이 부족해 공급체계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신의주화장품 공장 등 일부 생산시설이 있지만 화장은 일반주민들과 동떨어진 사치일 수 있다.그러나 고위층과 특수신분의 북한주민들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는 이런 자본주의식 패션에 대한 욕구는 급속도로 일반주민들 사이에도 파급효과를 던지고 있다. 인간의 본능인 ‘예뻐지고 싶은’ 욕구가 이제 평양을 중심으로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현진 북한문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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