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운영되던 금광 지금도 그대로
금광 주변 지명에도 ‘金’자 들어간 지명 많아

금적산 가는 길은 파란하늘이 인상적이었다. 지난 밤 내린 비 덕분이다. 자동차를 타고 당진영덕고속도로 보은IC를 나와 한적한 시골길을 조금만 달려가다 보면 삼승면 오덕리와 서원리에 걸쳐있는 높지 않은 금적산을 마주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시대 금적산광산 운영
금적산에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광산도 운영됐었다. 금적산광산이다. 당시 일본이 정확히 얼마만큼의 금을 캐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 오래 살던 주민들은 당시 상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금적산에는 광산 흔적이 그대로 있다. 좁은 입구를 들어가면 좌우로 뚫린 길들이며 지금은 부서졌지만 나무계단 등도 확인 할 수 있다. 육안으로 보이는 깊이도 상당하다. 지역주민의 말에 따르면 “현재 있는 금광 말고도 추가로 채굴하려던 금광입구가 있으나 광복과 함께 일본인들이 도망가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 있다”고 했다.
이 광산 근처 지명에는 ‘金’자가 들어간 지명도 많다. 금굴리, 묘금리, 탄금리 등이다. 재미있는 전설도 있다. 전 국민이 3일간 먹을 수 있는 보배가 묻혀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금으로 된 동물 전설이다.
옛날 이 산에는 금송아지와 금비둘기가 살고 있었다. 금송아지는 금비둘기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하여 산기슭에 밭을 일구어 금비둘기가 좋아하는 여러 곡식을 가꾸었다.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고 바위 아래 옹달샘을 파서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그런 다음 금비둘기에게 청혼하여 둘은 결혼하게 되었고 금슬 좋은 부부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금송아지는 밭을 갈다가 넘어져 두 눈을 잃고 말았다. 금비둘기는 눈이 먼 남편을 위하여 열심히 봉양하였으나 금비둘기의 벌이로 금송아지를 먹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비둘기는 해가 거듭될수록 지쳐갔고 짜증이 깊어져 둘은 자주 다투게 되었다. 마침내 금비둘기는 날아가 버리고 금송아지는 산기슭을 헤매며 아내를 부르다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 후 금송아지가 죽은 산을 금적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금송아지가 죽을 때 머리는 북쪽으로 두고 꼬리는 남쪽으로 향하였다 한다. 때문에 지금도 꼬리 쪽인 옥천군 안내면 오덕리에는 사금이 많이 나오고 머리가 있는 북쪽인 보은군 삼승면 선곡리에는 부자가 많다고 전해진다.
작은 거인 유수상
이 곳에서 만난 옥천농장 유수상 대표는 취재진에게 인사 대신 “금광 때문에 왔나?”라고 물었다. 비록 고령이었지만 다부진 몸매가 눈에 띄는 유 대표는 “금광이야기를 들으려면 그 전에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며 기나긴 인생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양계전문가로 살고 있는 유 대표는 ‘체육계의 큰 어른’으로 불린다. 그는 1966년부터 1975년까지 역도 국가대표선수로 활동했다. 그 사이 월남전에도 참전했으며 1984년 LA올림픽, 19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 1992년 바로셀로나 장애인 올림픽에서 코치 및 감독으로 선수들을 지도해 왔다. 그렇게 해서 따낸 메달수가 금, 은, 동메달을 모두 합해 14개에 이른다.
이후 전매청 선수와 감독 생활을 했고 대한역도연맹 상임이사, 대한역도연맹 사무국장, 아시아척수장애자 역도연맹 회장을 지냈다. 유 대표는 역도인으로 생활을 하며 장애인 선수들도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해 왔다.
금광과 함께 영그는 장애인 복지타운의 꿈
화려한 체육인으로 살던 유 대표는 장애인들의 자립에 관심이 많았다. 해외로 대회에 나갈 때면 항상 관계자를 통해 현지의 장애인 가정을 방문했다. 그러다 1990년대 초 포천으로 이사를 하면서 척수장애인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유 대표는 이 장애인들에게 먹고살 길을 마련해 주기 위해 가구업체 하청 사업을 따오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사업에 기복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급기야 빚더미에 앉게 됐다. 다행스럽게 그동안 쌓아놓은 인연으로 건설현장 함바집을 운영해 빚을 갚았지만 장애인에 대한 관심은 줄지 않았다.
결국 유 대표는 2003년 옥천농장을 인수하며 옥천으로 내려와 지방생활과 함께 장애인복지타운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유 대표는 새로운 사업아이템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이 바로 금광사업이다. 농장이 위치한 금적산은 과거 일제강점기 당시 금광이 운영됐었다. 하지만 광복이후 채굴이 중단됐고 재개발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현실화 되지 않았다.
유 대표는 이러한 내용을 파악하고 금광사업 가능성을 이곳저곳에 타진해 봤다. 지난해 11월에는 금적광산이라는 상호로 사업자등록도 냈다. 또 지난해 한국광물자원공사 기술연구원에 시추 분석을 의뢰하기도 했다. 첫 번째 시추를 통해서는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위치를 선정해 시추한 결과 금의 함량이 높게 나왔다. 현재 유 대표는 한국광물자원공사에 이 자료를 추가로 접수해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한국광물자원공사에서 시추 결과를 인정해 광산개발을 허가한다면 본격적으로 개발사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유 대표는 광산 개발 사업을 설명하면서 “이 광산사업은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광산개발로 번 돈은 모두 장애인복지타운 개발을 위해 쓸 것이다”라며 장애인 재활에 대한 애착을 전했다.
freeore@ilyoseoul.co.kr
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