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밀사 거부사건 발단 주먹계 움직임이 심상찮다!
화해밀사 거부사건 발단 주먹계 움직임이 심상찮다!
  • 사회부 기동취재반,특별취재팀 
  • 입력 2005-08-03 09:00
  • 승인 2005.08.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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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서방파’ 보스 김태촌씨가 출소한 이후 잠잠했던 주먹세계에 다시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 이와 관련, 주먹계 사정에 정통한 인사는 그 속사정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잘 지내자” VS “싫어”

“최근 조직 내에서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은퇴한 전국구 원로 주먹까지 중재에 나섰다. 물론 과거처럼 조직끼리 백주 대낮에 전면전을 벌이는 일은 피하려들겠지만 충돌은 예측불허다. 둘(김태촌과 조양은)은 수십 년 전부터 물과 기름 같은 사이다. 그뿐 아니다. 수하 조직원간에 쌓인 감정의 골은 더 심각하다.”이 인사가 밝힌 모종의 사건은 ‘화해 밀사’와 관련된 것으로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지난 달 김태촌씨 출감 직후 조폭세계의 양대 패밀리격인 서방파와 양은이파 중 한 곳에서 상대 조직에 ‘화해 밀사’를 보냈다. 화해의 내용은 ‘과거의 대립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우호 관계를 맺자’는 것.

그러나 상대조직은 냉랭하게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밀사가 인간적인 모욕까지 당했다는 것. 이런 사정이 알려지면서 양대 패밀리간 충돌을 우려한 주먹계의 원로들까지 나서 중재했으나 불발에 그쳤다는 것이다.거부의 이유로 한쪽 보스가 ‘하늘에 태양은 하나다’라고 명백히 선을 그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또 “XXX가 진정한 주먹이냐. 진정한 건달이라면 주먹만으로 대결해야지 비겁하게 연장을 동원해 선배 동료를 무자비하게 난자질하고… 그런 자하고 무슨 말을 해!”라며 질타했다고 한다. 이 보스는 XXX의 등장으로 그때까지 전해져오던 한국적 순수한 주먹 대결의 전통이 깨졌다며 여지껏 분개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화해 제의가 깨진 것은 양대 패밀리간 쌓인 구원의 골이 너무나 깊었기 때문이다.

양측 보스 ‘물과 기름’

그렇다면 수십년간 쌓인 감정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쪽은 왜 화해를 시도했을까. 이에 대해 경찰청 조직폭력 담당 관계자는 “김태촌과 조양은은 둘 다 20년 가까이 수감생활을 한 자들이다. 그런만큼 보신 차원에서 그런 제의가 오갔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떻게 보면 수사의 예봉을 피하기 위한 제스처일 수도 있다. 경찰로서는 양 조직간 충돌에 대비해 예의주시 중”이라고 밝혔다.조폭들간의 전쟁은 마피아 삼합회 야쿠자 등의 예에서 보듯 어떻게 보면 필연적 측면이 있다. 음지의 권력을 맛본 지배자들간에 최고 자리를 놓고 전쟁을 방불케 하는 살육전이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국내 조폭세계 또한 예외가 아니다. 김태촌과 조양은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주먹계의 최강자다.서방파와 양은이파는 전주, 목포, 광주 등 호남 출신 조폭들이 규합해 결성한 ‘범호남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75년 발생한 세칭 ‘명동 사보이호텔 사건’을 계기로 서울을 휘어잡던 신상사파를 몰아내고 서울을 탈환한 뒤 조양은이 만든 양은이파, 김태촌이 결성한 서방파, 그리고 이동재를 두목으로 한 OB파로 갈라졌다. 이들 3대 패밀리는 그 후 막강한 조직으로 커 갔으나 1988년 양은이파 조직원이 OB파 두목 이동재를 습격하면서 조폭세계는 서방파와 양은이파로 사실상 양분됐다.그 후 양대 패밀리는 천하통일을 놓고 한치 양보없는 패권 싸움을 벌였다. 그러다가 노태우 정권 들어 ‘범죄와의 전쟁’으로 조양은과 김태촌 양 보스가 사법처리 되면서 양측 대결은 잠복기에 들어갔다. 문제는 여타 군소 조직의 경우, 보스가 감옥에 가면 와해되는 것과 달리, 서방파와 양은이파는 보스들의 오랜 영어기간에도 불구하고 와해되지 않고 건재하다는 것이다. 이는 그만큼 두 보스의 카리스마와 영향력이 막강함을 입증한다.

막강한 보스의 힘

검찰 관계자는 “김태촌씨의 경우에는 수감 중에도 조직을 움직일 정도로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다. 실제로 서방파 출신 부두목급 Y씨는 김태촌씨의 재수감 후에도 암암리에 조직을 관리해온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는 또 조폭들간 충돌 가능성에 대해 “아직까지는 양대 패밀리 가운데 특별한 움직임은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조폭세계의 특성상 결집력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언제 어떤 형태의 변화가 있을지 예측불허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검찰 예의주시

검찰과 경찰은 ‘화해 밀사 거부사건’ 첩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히 양대 패밀리의 두 보스 모두 표면상 조폭세계를 떠났다고 하지만 이들을 추종하는 조직원들의 충성도가 여전히 높다는 점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특히 서방파의 경우 행동대장 출신으로 강남에서 큰 식당을 운영하던 N씨가 지난해 구속됐다가 현재 보석으로 풀려난 상태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 조직 재건의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보고 있다.김태촌씨의 석방을 전후해 양은이파 출신 조직원들과 공중분해된 것으로 알려진 옛 OB파(두목 이동재) 조직원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경찰은 주목하고 있다. 양은이파 보스 조양은씨는 1995년 3월 만기출소한 뒤 동시통역사와 결혼하고,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나 범죄조직 구성혐의가 드러나 두 차례나 다시 구속됐다가 풀려난 바 있다. 조씨는 지난해 2월 A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는 서울 강남에서 대규모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한편 0B파의 이동재씨는 1988년 양은이파 계열인 순천시민파의 공격을 받은 후 미국으로 도피, 주먹계에서 이름이 잊혀졌다. 당시 이씨는 칼과 도끼 등으로 난자당해 거의 불구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은 조양은의 위력과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함을 주먹계에 널리 알린 계기가 되었다.

# 한국 조폭 역사

김두한이 두각을 나타낼 즈음 서울 중심가와 외곽에서는 주먹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경태-영태형제(훗날 미국으로 이민), 이쁜이 장형빈, 광주 무옥, 아오마쯔 심종현, 아라이, 광화문 임형빈, 김관철, 김길영(인철), 김동회(제천 출신주먹), 종로꼬마 이승옥, 상하이박(박형섭), 김진영 등을 꼽을 수 있다. 김진영은 김두한의 친구로 행동대장으로 활동하다 공산당에 포섭된 후에 김두한 동생들에 의해 국일관 지하에서 살해됐다.해방 후 김두한이 주먹세계에서 은퇴한 뒤 후계체제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종로패는 아오마쯔 심종현과 광화문 임형빈 등이 각자의 세력을 유지하다가 명동과 동대문세력의 급성장으로 힘이 급격히 위축되었다가 나중에 그 맥을 천안곰 조일환이 이어 받아 동분서주하기에 이른다.이승만 정권 출범 후 부상한 세칭 동대문사단은 이정재를 필두로 세력을 확장했다. 동대문패는 이정재를 비롯해, 김사범, 김복록, 조열승, 임화수, 이천일, 쐐기 장세기, 도기 이석재, 유지광, 오따 정종헌, 낙화유수 김태련, 이동산, 가네자와 김영기, 신영식 등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들 외에도 당시 서울 장안에는 ‘민중결사대’, ‘백골단’, ‘땃벌레’ 등의 조직이 활개쳤다.휘문고보 출신으로 한때 전국 씨름왕이기도 했던 이정재는 이승만 정권의 충직한 경호주먹으로 당시 갖은 악행을 다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사실은 과장된 면이 많다. 초기 이승만 정권이 상대적으로 건강했을 때 이정재는 정권에 협조를 하다 정권 중기부터 발을 빼기 시작하면서 그는 이승만과 이기붕 등으로부터 배척을 받기 시작했고 그의 조직도 분산되어 힘을 쓰지 못했다.임화수, 조열승 등이 탈퇴해 나가 신도환 등과 손을 잡고 정권의 주먹을 조직했다가 터진 사건이 고대생 피습사건으로 사실 이 사건만해도 논란의 소지가 많다.어쨌든 이정재는 1960년 임화수와 함께 사형 집행이 되었고, 그 뒤를 유지광, 오따 정종훈 등이 이으면서 70년대까지 그 영향력을 행세했다.동대문사단이 정치세력을 등에 업고 영토를 넓히고 있을 때 서울의 최대 중심상권인 명동에는 이화룡, 백형순(백단장), 황병관(레슬링 선수), 고이꼬 황욱, 맨발장군 이형순, 정팔(압록강동지회), 신상사, 정걸(충무로패 오야붕), 시라소니 이형순 등이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다.이화룡은 북한 출신으로 축구선수였다.

서북출신의 축구선수들을 모아 북한 사람들이 많이 내려와 사는 명동에 터를 잡은 이화룡은 시공관 관장이던 백형순과 특무대장 김창룡의 배려로 주먹집단을 구성한다. 특히 옥류각. 산청각 등을 운영하던 누이들의 지원으로 자금줄을 잡을 수 있었던 그는 정팔·황욱 등을 끌어들여 종로와 동대문이 합세하여 맞싸워야 할 정도로 막강한 주먹사단을 만든다.5·16 이후 종로와 동대문이 초토화될 때도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본 것은 이화룡의 명동패가 드러내놓고 정치권과 손을 잡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명동은 60년대까지만 해도 ‘신상사(신상현)’의 건재로 서울의 ‘3강’시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명동 신상사, 종로 아오마쯔 심종현, 동대문 유지광 등이 그들이었다.그러나 3강 체제는 곧바로 붕괴되어 명동 신상사, 종로(광화문) 임형빈, 서울역 최창수가 새로운 판도를 형성하면서 또 다른 모양의 3강구도를 형성했다. 그러나 이들 3강의 세력을 위협하던 존재는 유지광이었다. 그는 군사정권에서 이정재와 함께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출옥과 동시에 과거의 동대문사단의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유자광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대문사단 중에서 서울을 중심으로 세력을 갖고 있던 오따 정종훈 등이 유지광의 정통성을 문제삼고 그와 일정거리를 유지하면서 유지광은 이천으로 칩거했다. 나중에 그 지역 주먹들을 규합해 수원지역의 최창식 등을 끌어 들였지만 별로 힘을 쓰진 못했다.특히 유지광은 오따와의 갈등이 심각했다. 오따는 이정재의 친위부대 출신으로 이정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충복이었다. 임화수가 지금의 예총회장격인 예술인동맹 회장시절 이정재에게 불손하게 군다는 이유로 그의 머리통을 깼던 일화가 있을 정도로 열혈적이었다. 그가 유지광에게 이정재의 죽음에 대한 규명작업에 나선 것이다.이정재, 임화수, 신도환, 유지광. 5·16후 사회악 일소대책의 하나로 검거된 전국의 주먹들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 4인중 사형집행이 된 사람은 이정재와 임화수였고,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던 유지광은 5년 6월, 무기를 선고받았던 신도환은 3년만에 출소한 것에 오따가 유지광에게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던 것이다. 보스를 걸고 넘어져 살아나온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인 것이다.

오따는 “이정재는 비정한 정치의 희생자다. 이정재는 절대 흉악범이 아니다. 내가 청춘을 바쳐 모셨던 이정재는 약자 위에 군림하지 않는 진정한 협객이었다”고 주장하고 다녔다. 90년 후반까지도 하이얏트 호텔의 커피숍을 사무실 삼아 왕성한 노익장을 과시하던 오따의 이정재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어쨌든 서울 주먹계가 이런 저런 이유로 사분오열되어 있을 때도 흐트러짐 없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곳이 명동의 신성사였다. 한때 그의 직계 부대만해도 100명이 넘는 대조직이었다.명동 이화룡 밑에서 자란 육군 상사출신 신상현(申尙鉉)이 ‘신상사파’를 결성, 100여명의 폭력배들을 거느리고 명동 을지로 충무로 등 중심가를 장악한 뒤 10년 동안 무소불위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신상사시대는 1975년 1월 명동사보이호텔에서 벌어진 대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은 경제부흥기를 맞아 영호남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울드림’을 안고 상경하기 시작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들 중에 광주 전주 목포 여수 등에서 올라와 무교동에 세력을 구축했던 ‘범호남파’가 서울토박이 중심인 신상사파에 도전한 것이다. 75년 1월 명동 사보이호텔 커피숍의 ‘조폭 혈전(血戰)’에서 주도권을 잡은 세력은 조양은, 김태촌, 오기준, 이동재 등 범호남파 출신 주먹이었다. 범호남파는 서울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80년대 중반까지 서방파(김태촌), 양은이파(조양은), OB파(이동재)등 속칭 ‘3대 패밀리’로 분화되어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알력과 대립으로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특히 양은이파 조직원들이 OB파 두목 이동재를 습격해 회칼로 피해를 입힌 뒤 이동재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조담진이 OB파의 조직을 장악했다.이즈음 지방에서는 수원(수원파 북문파 등) 광주(신오비파 무등산파 등) 대구(행촌동파 동성로파) 부산(칠성파 신20세기파 신칠성파 영도파) 이리(배차장파) 전주 (월드컵파), 번개파(박종석), 맘보파 등 주요도시별로 조직이 잇따라 결성됐다.

80년대 말에는 신우회(김태촌), 호국청년연합회(이승완), 일송회(배차장파와 양은이파 연합), ‘화랑동지회’(부산 칠성파와 신칠성파 연합) 등의 연합조직이 출현하는 등 폭력조직의 광역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즈음 전국구로 거듭난 연합조직은 신우회-일송회-화랑동지회 등 3강으로 압축되어 전국 폭력조직을 장악했다. 그러다가 90년 초 ‘범죄와의 전쟁’을 계기로 김태촌 조양은 등 두목급들이 대거 구속되거나 잠적하면서 거대 조직이 거의 와해됐다. 그러나 최근 김태촌 조양은 이동재 등 세칭 3대 패밀리의 두목들이 모두 풀려나면서 새로운 조폭세계의 새로운 판도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 김태촌 조양은은 어떻게 전국구 주먹이 되었나

주먹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김태촌. 조직폭력의 대명사로 통하는 그이지만 서울로 진출하기 전까지는 지방의 군소 주먹에 불과했다. 그가 위명을 떨친 것은 지난 77년 발생한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사건’에서 비롯됐다. 사건 당시 김태촌 일행의 무지막지한 각목 세례를 피해 김영삼 당시 총재가 부리나케 달아나다 부상을 당했고, 이 일로 김태촌은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된다. 그러나 몸은 쫓겼지만 이름은 날려 이때부터 전국구 주먹으로 급부상했다.김태촌은 고향이 광주 서방동이다. 24세에 상경한 그는 같은 고향 주먹 선배인 오기준 휘하에 있다가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해 범서방파로 조직을 확대, 보스의 자리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가 이끄는 서방파는 양은이파 OB파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폭력조직으로 암흑가를 주름잡았다. 이름하여 3대 패밀리다. 이들 가운데 김태촌의 이름이 조직폭력의 대명사로 굳어진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그는 ‘활동기간’이 가장 길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양은이파 조양은이 너무 일찍 발이 묶여버린 것이다. 10대 후반에 광주 ‘대호파’에서 활약하던 조양은은 69년 광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신상사파의 세력을 비집고 무교동에 터를 잡는다. 추종 세력은 광주에서 조양은 주도로 결성된 ‘화신 8인조’. 광주 충장로 화신다방의 근거지를 딴 이름이다. 유신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5년 1월 2일. 한국 폭력 세계의 세력 판도를 뒤바꾼 쿠데타가 발생했다. 바로 사보이호텔 기습 사건으로, 조양은이 10여 년 동안 조폭 대부로 군림하던 신상사파를 급습,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명의 조양은은 전국구로 부상했다.

이후 잘 나가던 그는 1980년 범죄단체조직 혐의로 구속됐고, 15년 동안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했다. 묘하게도 김태촌과 조양은 두 사람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행동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켜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김태촌은 ‘신민당 각목사건’ 이후에도 ‘뉴송도호텔사건’ ‘슬롯머신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을 일으켜 전국 주먹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 하나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기독교에 귀의해 착실한 크리스찬으로 거듭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검찰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김태촌은 과거에도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후 ‘신우회’ 등을 결성해 조직 재건에 나선 전력이 있다. 조양은 역시 출소 후 두 차례씩 구속되는 등 조폭세계를 완전히 청산했다고 보기 힘들다. 따라서 범죄 예방 차원에서도 이들의 동태 파악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사회부 기동취재반,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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