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술 시장이 일반에까지 널리 형성된 것은 일제 침략시대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서화를 나눠 보고 즐기고 수장했다. 골동은 대체로 중국의 고동기가 거래의 중심이었다. 매매하는 수장가도 있었고 거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거래가 점잖아서 큰 사단 없이 신용과 체통을 지켜 가면서 거래가 성사됐다. 주로 거래된 것은 서화였다. 서화는 고려시대부터 궁중에서 고동과 함께 상당량을 수집했다. 권문세가도 중국서화와 우리서화를 수장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 안평대군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옛 명 서화를 대량 수장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목록은 신숙주의 보한재집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수장품이 총 222점이나 됐다. 화가의 이름과 작품명이 기록된 중국서화가 171점, 왜승 그림이 4점, 안견작품이 30점이다. 화기에는 화가의 시대, 그림의 특징 등을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보한재의 화론도 짤막하지만 자신 있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왕실과 사족과 재력이 있는 사람들의 수집도 상당량에 이를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안평대군만한 수장가는 아주 드물었을 것이다. 17세기 중·후반기에 들어오면서 서화고동의 수집·감상 풍조가 이전보다 좀 더 활발하게 이뤄졌다. 경화세족 간에 수집 감상이 이뤄졌으며 이 풍조는 18-19세기에 들어오면서 역관 등 중인계급과 하급관리, 상공인 등이 중심이 된 여항인에게까지 확산됐다. 뿐만 아니라 일반백성들도 이 풍조에 어느 정도 동참한 듯한 기록이 있다.
문화재 수집에 관한 몇 가지 기록이 있다. 18세기의 상고당 김광수는 뛰어난 감식안을 가진 대 수장가로 남아 있다. 또 김광국이 고서화를 즐겨 수집했다는 기록과 강이천이 남긴 한경사가 전해진다. 박지원은 연암집 필세설에는 거리에서 그림을 사고파는 이가 많다는 것과 서상수라는 감식안 높은 수장가가 고서를 고가에 샀다는 이야기를 썼다. 이 외에도 조수삼의 추재집 고동노자편에도 비슷한 기록이 남았다. 역관출신 거부 김한태의 집안 풍경을 묘사한 글에도 문화재 수집에 관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서울에는 많은 자본이 들어왔다. 이때부터 서울에 크고 작은 서화 골동상회가 줄줄이 들어섰다. 이들이 연합해 구락부를 만들었다. 당시의 이야기는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골동천일야화’, ‘나의 도자인생80년’ 등의 저서에 상세히 기록돼있다.
일본인들은 백주에 우리의 주요 고적을 도굴했다. 또 시골 백성에게 도굴기술을 가르쳤다. 상인들은 돈 몇 푼에 도굴품을 사들여 서울과 동경의 고미술 상인에게 넘겼다. 당시 왜경의 경무총감이던 미야케(三宅)는 “요사이 한국인이 도굴해 나오는 유물이 시중에 많은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시킨 것이다. 춘추의 필법으로 말하면 일본인이 죄인이다”라고 적었다.
우리 문화재를 사들인 것은 골동상인들만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큰 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이나 임원은 대부분 우리 문화재를 사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사들인 문화재 중에는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초기까지의 고분 출토품이 많았다. 그중 몇 가지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 유물을 구입한 일본인은 출토연도와 출토장소를 모두 적어 일일이 정리해 보관하고 있었다.
하치우마라는 일본인 사업가가 1990년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유물도 일제강점기 시절 이렇게 팔려간 것이다. 당시 하치우마는 “부친이 한국에서 은행장이었다”며 “아버지가 수집한 유물을 물려받았으나 한국에 돌려주는 게 옳다고 생각해 기증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초기의 고분출토 금속장신구와 고려동경 등 유물 수백 점을 기증했다.
#통천문암 '겸재 정선의 수묵화'
통천문암은 겸재 정선의 수묵화다. 그림 속 물결은 하늘과 맞닿아 땅 위에 군림하고 있다. 먼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흐르는데 거대한 바위산이 육지로 들어가는 문인 듯 우뚝 솟아 파도의 침노를 막고 있다. 그 사이를 동자 하나만 데리고 나선 단출한 선비의 행차와 말 타고 구종 잡힌 호사스런 행차가 함께 지나고 있다.
둘 다 선비 차림인데 형편의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취향의 높고 낮음이 두 행차의 차이를 가져오게 한 듯하다. 문암 사이에 들어서다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는 유연한 모습으로 선비를 표현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지루하기만 하다는 듯 심술기 어린 철모르는 동자의 심정은 왈자 걸음으로 나타냈다. 이에 비하면 말 탄 양반의 몰풍취한 모습은 차라리 말이나 종복이 감탄하는 표정만도 못한 듯한 느낌이 들어 겸재의 심정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겸재는 관동 여행때마다 통천문암을 많이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간송미술관에 전하는 것만도 3폭이나 된다. 그중에 이 폭이 가장 노숙한 필치를 보인다. 수직준을 찰법(쓸어내리는 법)에 가깝도록 부드럽게 구사했다. 거의 윤곽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골기를 내재시키는 기법으로 대상의 본질을 함축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겸재 말년의 독의작으로 봐야겠다. 어느 순간의 사생이라기보다 이전의 사생을 토대로 이상적인 가경을 구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겸재의 진경에는 만년으로 갈수록 이러한 이상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원백이라는 사방 28mm의 주문인장이 80세 때 그린 ‘사문탈사’에 찍혀있는 것과 같아서 이 그림도 80세 전후한 시기에 그렸으리라 여겨진다. 1939년 6월 11일 이영개가 개최한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서 일본인 수장가로부터 구입했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