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와 결혼, 내 불찰이었다 난 이혼 당한 데릴사위
재계와 결혼, 내 불찰이었다 난 이혼 당한 데릴사위
  • 오두환 기자
  • 입력 2014-06-09 11:14
  • 승인 2014.06.09 11:14
  • 호수 1049
  • 12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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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고승덕과 박태준家의 잘못된 만남

“두 집안 사이 사고방식·문화적 차이 컸다”
문용린 후보 박태준 일가와 2대째 인연 이어와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4일 앞둔 5월 31일. 화려한 타이틀을 가진 고승덕 후보가 지지율에서 문용린 후보, 조희연 후보를 앞선 가운데 커다란 악재가 터졌다. 바로 딸 고희경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서울 시민에게(To the Citizens of Seoul)’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우리 남매를 버리고 돌보지 않은 내 아버지 고승덕은 서울시교육감 후보로서 자격이 없다”는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이 글의 파문은 상당히 컸다.
고 후보는 즉시 기자회견을 통해 당시 상황을 설명했지만 한번 바뀐 민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6월 4일 치러진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고 후보는 3위라는 초라한 성적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선거는 끝났지만 이번 폭로를 통해 새삼 고 후보의 결혼생활과 그의 장인인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의 인연이 주목을 받고 있다.

고승덕 후보는 엘리트 이미지가 강하다. ‘공부의 신’으로도 불리는 고씨는 3대 고시에 모두 합격했다. 사법고시는 최연소, 행정고시는 수석, 외무고시는 차석을 차지했다. 남들은 하나도 붙기 어려운 고시를 3개 모두 합격한 데다가 성적도 우수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교육감이라는 자리에 좋은 타이틀로 작용했다.

고씨는 서울대 법대를 수석 졸업한 뒤 판사로 근무, 수원지방법원 재직 중 고 박태준 포스코 회장의 둘째딸 박유아씨와 결혼하면서 또 한 번 화제가 됐다.

이후 고씨는 지상파 방송까지 출연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밥 먹는 시간을 아끼려고 비빔밥만 먹었다는 이야기는 엄마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렇게 고씨는 언론을 통해 유명인이 됐고 결국 교육감 선거에 나오게 됐다.

고씨는 2003년 또 한 번 변신을 시도했다. 바로 펀드매니저다. 이후 고씨는 ‘주식 고수’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부와 명예를 얻은 고씨는 발길을 여의도로 옮겼다. 2007년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BBK 사건에 대한 변호에 나서며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 후 고씨는 18대 국회의원으로 여의도에 입성했다.

국회에서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하지만 2012년 당시 박희태 국회의장의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을 폭로해 한나라당을 폭풍 속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사실 서울시 교육감 선거는 다른 후보들에 비해 뒤늦게 참여했다. 하지만 앞서 밝힌 화려한 이력들로 고씨는 다른 후보보다 앞서 나갈 수 있었다.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딸의 폭로가 없었다면 고씨가 서울시교육감에 당선됐을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잘나가는 재벌을 처가로 둔 죄

고씨는 딸의 폭로에 대해 해명하는 과정에서 결혼이야기를 꺼냈다. 고씨는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둘째 딸 박유아씨와 1984년 결혼했다. 소개로 만난 아내 박씨와 9개월을 교제한 뒤 결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부부는 2002년 합의 이혼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뒀으며 박씨는 현재 미국 뉴욕에서 미술가로 활동하며 두 자녀를 키우고 있다.

딸 희경씨는 폭로 글을 통해 “어머니가 나와 동생을 뉴욕의 학교에 보내려고 미국으로 데려온 뒤 그는 아예 우리와 연락을 끊었다. 11세 때부터 아버지 없는 삶에 적응해야 했다”고 말했다.

딸의 폭로와 함께 많은 사람들은 부부의 이혼사유를 궁금해 했다. 재벌 집 딸과 엘리트 코스를 밟은 수재의 만남, 일반인들이 바라는 최상의 만남이었지만 이들의 결혼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고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수기 형태로 엮어 발간한 ‘포기하는 순간 불가능은 확정된다’는 책에서 박유아 씨와의 결혼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책에 “두 집안 사이에 사고방식과 문화적 차이는 컸다. 나는 참고 살면 그 차이가 극복될 것으로 생각했다(결혼하고 십 년이 지났을 때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때는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이 멀었던 것 같다)”고 적었다.

자라 온 환경이 달랐던 만큼 이들의 사고방식과 가풍이 달랐던 것이다. 지난 1일 기자회견을 통해서도 고씨는 “박태준가에서 저는 평범한 집안의 자수성가한 아들이었고, 한국에서 자녀를 키울 것을 고집하는 답답한 촌놈이었습니다. 제가 박태준가에 미움을 받게 된 이유는 나이든 부모가 있는 한국에서 살기를 원해 영주권을 뿌리치고 귀국했고, 다시 미국에 나가 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소박한 소망이 재벌가에서는 문제가 되었다”고 말했다.

또 양육권을 놓고 갈등이 계속되는 사이, “(전처가) 1998년 갑자기 양육권을 달라고 한 후 일방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면서 결별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재력과 권력을 가진 집안의 딸에게 자신의 양육권을 빼앗긴 아버지로서 많은 슬픔을 겪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심지어 그는 측근에게 “누군가 부잣집으로 장가간다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다. 난 사실 이혼 당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씨는 사실 1999년 정치에 입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해 6월 서울 송파갑 재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공천이 확정됐었지만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당시 공천까지 받았던 고씨는 무난하게 당선이 예상됐었지만 갑자기 출마 포기 선언을 했다. 그것도 자민련 당사에서.

고 박태준 전 명예회장 고씨 공천 포기 강요하기도

당시 그의 장인이었던 박씨는 자민련 총재로 있었다. 그런데 그의 사위가 한나라당의 후보로 선거에 나오게 된 것이다. 고씨가 출마 포기 선언을 한 데는 박씨의 입김이 작용했을 거란 소문이 많았다.

당시 고씨는 “이번 일 때문에 저를 아끼고 사랑해준 가족 친지, 국민여러분들에게 죄송하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혈연이 아니겠느냐.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혈연을 떼어 놓을 수 없는 것 같다”며 가족들의 설득에 의해 출마를 포기하게 됐음을 내비쳤다.

또 당시 기자회견에 동석했던 박 총재도 기자들의 “고 변호사를 사퇴시키기 위해 공천 확정 이후 만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27일 저녁에 집에서 사돈분들을 만났다”고 말해 양가가 모두 나서 고 변호사 출마 포기 작업을 벌였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고씨 출마 포기 과정에서 박 총재가 고씨를 불법으로 감금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당시 한나라당 신경식 사무총장은 “고 후보가 어제 밤부터 미행을 당하는 등 신변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를 황우려 의원을 통해 들었다. 강제납치 돼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사퇴를 강요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실제 고씨는 딸의 폭로와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과거 이같은 사실에 대해 “집권여당 자민련의 총재였던 박태준 포스코 회장 측의 회유와 압력을 받고 납치되다시피해서 기자회견장에 끌려갔습니다”라며 사실상 처가가 사위의 신변을 위협해 공천 반납을 강요했다고 말했다.

공작정치론 문용린 정말 몰랐을까?

고씨 딸 폭로 글로 가장 큰 이익을 볼 것으로 예상됐던 사람은 문용린 후보였다. 하지만 문 후보 역시 조희연 후보에게 교육감 자리를 내줘야만 했다. 고씨는 당초 딸이 폭로 글을 쓰게 된 것이 박태준가와 문용린 후보의 ‘공작정치’라고 비판했다.

그 이유는 고 박태준, 아들 박성빈, 문용린 후보의 ‘2대째 내려오는 인연’ 때문이다. 고씨에 따르면 문용린 후보와 박태준 회장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같은 시기에 교육부장관과 총리로 재임했고, 박태준 회장 사망 당시 문용린 후보가 장례위원을 맡기도 했다. 또 박성빈씨와 문용린 후보는 2012년 2월부터 1년간 함께 포스코 청암재단 이사로 재직했다.

이같은 사실에도 문 후보는 당초 고씨에 대해 “선거 이전에는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사위인지도 전혀 몰랐다”며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freeore@ilyoseoul.co.kr 

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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