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대권 도전이다”
“다음은 대권 도전이다”
  • 이범희 기자
  • 입력 2014-06-09 10:36
  • 승인 2014.06.09 10:36
  • 호수 1049
  • 10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준표·원희룡·박원순 안희정·김무성·김문수
▲ <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일요서울 | 이범희 기자] 2014년 6월 4일 지방선거가 마무리됐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8곳, 새정치민주연합이 9곳에서 승리를 확정했다. 당초 세월호 참사 여파로 여당인 새누리당이 불리할 것으로 관측됐지만, 다행히 참담한 패배는 면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역시 이번 선거에서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상됐지만, 기대만큼의 성적은 거두지 못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일단 눈에 띄는 인물은 홍준표·원희룡·박원순·안희정 등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이 다음 ‘대권 도전자’로 꼽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일요서울]은 이들 4인방에 대해 알아본다.

 

지방선거 최대 승부처인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재선에 성공했다.

서울시장 선거는 ‘청계천 신화'를 발판으로 대권으로 직행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 사례에서 보듯, 대권가도를 향한 교두보로 불려왔다.

역대 서울시장들이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잠재적 대선 후보로 간주돼왔다는 점에서 정치적 무게감이 더해질 전망이다.

무엇보다 2011년 10·26 보궐선거 때 새정치연합 안철수 공동대표의 이른바 ‘아름다운 양보'로 당선됐던 박 당선인이 이번에는 ‘자력'으로 여유있게 재선을 꿰차면서 명실상부한 야권의 유력주자가 됐다. 수도 서울을 이끈 지 3년만이다.

박 당선인은 20여 년간 시민운동을 하며 ‘여러 문제 연구소장'이라고 불린 사회운동가다.

1956년 3월 26일 경남 창녕에서 평범한 농부의 2남 5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경기고 졸업 후 1975년에 서울대에 입학했지만 민주화운동을 하다 제적당했다.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83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했고, 1982년 대구지검 검사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변호사로 개업한 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ㆍ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ㆍ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맡으며 유명세를 탔다.

1991년 8월 돌연 영국 유학을 떠난 박 당선인은 영국 정경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의 2년여 유학을 통해 다양한 시민참여, 시민운동의 사례들을 경험하였다. 귀국 후 박 당선인은 1995년에 진보 성향의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를 결성, 소액주주 권리찾기 운동과 총선 낙천ㆍ낙선 운동 등을 벌였으며, 2002년에는 아름다운 재단과 아름다운 가게, 2006년에는 희망제작소를 만들어 각종 사회운동을 펼쳤다. 희망제작소 등에서는 ‘조직의 창의성을 높이고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나이나 직급이 방해되면 안된다.'는 소신에 따라 상임이사라는 직함보다는 ‘원순 씨'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원했다고 한다.

2011년 10월 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10ㆍ26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범야권 국민참여경선에서 야권 단일 후보에 올라,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53.4%의 지지율을 얻으며, 46.21%의 표를 받은 나경원 의원을 제치고 당선됐다. 지난 4일 진행된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56.0%의 지지율을 얻어 43.2%를 획득한 정몽준 새누리당 후보를 누르고 서울시장에 재선됐다.

‘젊은 피’… 젊은 스타 정치인

여권 내 원조 소장파로 분류되는 원희룡 후보도 제주지사에 당선되면서 대선 가도에 날개를 달게 됐다.

원 당선인는 양천구 갑 소속 제16, 17, 18대 국회의원이다. 제주도 서귀포 태생으로, 1982년 대입학력고사에서 332점으로 전국수석을 차지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수석 입학하여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법대 재학 중 각종 학내시위에 참가했으며 1983년에는 시위과정에서 경찰에 연행되어 유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 졸업 후, 1992년 10월 제34회 사법시험에 수석합격했으며, 제24기 사법연수원을 5등으로 수료했다. 1995년에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로 임용된 이후, 1997년 2월에는 수원지방검찰청 여주지청 검사로 임용됐다. 1998년 3월에는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됐으나, 임관 3년 만인 1998년 8월 22일 부로 검사직을 사임했다.

이후 남경필·원희룡·정병국의 줄임말인 남·원·정으로 대표되는 당내 소장 개혁파의 운동을 주도하여 당 지도부와 부딪히면서 정치 경력을 이어왔고, 2004년 총선 직후에 치러진 당 최고위원 경선에서는 박근혜 대표에 이어 2위로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당 내에서 이념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 개혁적인 성향이 있기는 하나 한나라당 내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중도 보수 성향이었다는 점에서 당에서 제명된 고진화 의원과는 차이가 있다.

남경필 당선인 또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여론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경기지사 선거에서 경제부총리 및 교육부총리를 지낸 김진표 새정치연합 후보에게서 승리함으로써 그 저력을 보여줬다는 평이다. 아울러 정치경력 17년, 5선 의원임에도 낮은 연배 탓에 ‘소장파’, ‘쇄신파’로 꼽혀 온 그가 이번 선거를 계기로 ‘체급 올리기’에 성공했다는 점도 성과다.

남 당선인은 30대 최연소 의원(1998년 7월 당시·34세)으로 새정치국민회의 박왕식 후보를 출구조사 예상까지 뒤엎고 국회에 입문했다. 당시 팔달구는 재보궐 지역구 가운데 투표율이 가장 낮았다.

충남에서는 안희정 새정치연합 후보가 재선에 성공하면서 야권의 잠룡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안 당선인은 노무현 정부 당시 ‘좌희정·우광재(이광재)'로 불렸던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로서 문재인 의원을 대적할 만한 친노(친노무현)그룹의 리더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안 당선인은 1965년 5월 1일 충청남도 논산군 연무읍 마산리에서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이후 대전으로 유학하여 남대전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러시아 혁명사를 읽고 혁명에 뜻을 두게 되어, 1학년 재학 중에 논산시 양촌면에서 이찬구가 발행한 지하 유인물인 ‘평천하'로 문제가 야기됐고, 그 후 중퇴했다.

이후 서울 대방동에 있는 성남고등학교로 전학했으나 마찬가지로 1학년 재학 중에 중퇴하고 대학생들과 함께 국풍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학생운동을 하던 도중 소위 ‘명문대'에 가야만 제대로 된 학생 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입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1982년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1983년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1986년에는 그가 주동이 되어 고려대 내의 운동권 서클 14개를 통합한 고려대학교 애국학생회가 조직됐다. 1988년 반미 청년회 사건으로 안기부에 체포돼 취조를 당했다. 이후 10개월간 교도소에서 수감된 후 출옥했다.

1989년 1월부턴 김덕룡 국회의원실에서 일하게 되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됐다. 1990년 1월 삼당합당이 일어났는데 이때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7인이 3당 합당을 거부하며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꼬마 민주당을 결성했다. 통일민주당에 있던 당직자 중 안희정을 포함한 18인이 잔류를 택했다. 이후 이철 사무총장의 비서로 일하게 됐다. 기성 정치가들에게 환멸을 느낀 그는 1991년 사직서를 내고 창원에서 노동복지회관을 짓는 공사장에서 두어 달 건설일용직 생활을 했다. 마침내 1992년 총선거에서 이철 의원의 당선을 끝으로 4월에 비서직을 사직하고 정치권을 떠났다.

이후 출판사 영업부장으로 일했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하여 정체성을 고민했고, 운동권 정치인들의 소신없는 정치생활에 환멸을 느낀 그는 대학 복학을 새로운 돌파구로 삼았다. 이때 이광재와 함께 1992년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노무현을 돕는 일을 시작하여 1994년 6월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됐다. 2002년 노무현 대선후보 캠프에서 정무팀장을 지내며,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16대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그 후 2003년 12월, 2002년 당시 기업체들로부터 불법 대선자금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됐고, 이듬해 9월의 항소심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은 뒤 형량 1년을 모두 채우고 출소했다. 그 후 대통령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며 참여 정부 임기 동안 공직을 사양하고 다른 직업을 구하려 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하던 도중 강금원 회장의 허락으로 창신섬유에서 고문을 지냈다.

2007년, 참여 정부의 많은 업적들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점을 안타까워하며 참여정부평가포럼을 출범시키고 상임집행위원장직을 맡았다.

2010년 6월 2일 치러진 제 5회 지방선거에서 치열한 접전끝에 자유선진당의 박상돈 후보를 2.4% 차이로 누르고 충청남도지사에 당선됐다. 민선으로는 최초로 개혁 성향(민주당) 후보자가 당선되어 ‘지역감정을 타파했다'는 평과 함께 민주당의 차차기 대통령 후보 하마평에까지 오르게 됐다.

그리고 2010년 7월 1일 취임식을 하고 공식적인 충남도지사 업무를 시작했다. 이번 경선에서는 52.2%의 지지율을 얻어 44.0%를 획득한 정진석 새누리당 후보를 누르고 충남도지사에 당선됐다.

지방선거 승리로 대권티켓 확보

경남지사 재선에 성공한 홍준표 새누리당 후보의 경우도 대권레이스 티켓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홍 당선인은 대한민국 검사, 법조인 출신 정치인이며 현재 경상남도지사다. 어린 시절 본명은 홍판표(洪判杓)였지만 검사 시절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1985년 전현직 고위층이 연루된 슬롯머신 사건을 적발, 박철언 등 당대의 고위층을 사법처리했다. 박철언의 슬롯머신 사건 적발에 이어 선배 검사들을 줄줄이 수사, 혐의점이 사실임을 밝혀내고 처벌하여 성역없는 수사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검사로 임관됐다. 1989년 서울지검에 부임해서는 전두환의 측근과 친인척 비리를 적발했고, 서울시내 조직폭력배와 외국인 범죄자 등을 척결했다. 광주지방검찰청 재직시는 국제 PJ파 조직의 수사, 검거를 담당하였다. 1985년부터는 박철언 등 검찰 출신과 엄삼탁 안기부 기조실장, 경찰청 천기호 치안감 등 전현직 검찰, 경찰 고위 간부들이 연루된 슬롯머신 사건 수사를 전담하였다. 이어 선배 검사인 이건개 등도 내사를 무마한 혐의로 적발하여 기소했다.

1994년 11월 안기부장 법률특별보좌관을 역임하고 1995년 9월 서울지검 복귀 후, 그 해 10월 검사직을 사퇴했다. 1995년 11월 당시 대통령이자 신한국당 총재였던 김영삼에 의해 발탁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대한민국의 15·16·17·18대 등 4선 국회의원으로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 국회 환경노동위 위원장 등을 지냈다. 2008년 한나라당의 원내대표직에 선출됐으며, 2011년 한나라당 대표로 선출됐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그 해 12월 19일 실시된 경상남도지사 보궐선거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됐다.

그는 2012년 4월 11일 19대 총선거 여론조사에서 민주통합당 민병두 후보에게 크게 뒤지는 것으로 발표되자마자 트위터를 통해 정계 은퇴를 선언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보도자료를 통해 30년 공직생활을 마감한다는 것은 검사시절과 15, 16, 17, 18대 국회의원으로서 보낸 공직생활을 마감한다는 의미로 해명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19대 국회에 불출마한 이후 다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2012년 11월 27일 대선 후보 출마로 사퇴한 김두관 경상남도지사의 후임 보궐선거에 새누리당으로 출마, 12월 19일 선거에서 119만 1904표(62.91%)를 얻어 70만 2689표(37.08%)를 얻은 범야권 단일후보 권영길을 누르고 경상남도도지사로 당선됐다. 이번 경선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 김경수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다.

그는 최근 “도지사가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되면 경남사람들이 얼마나 좋겠느냐"며 대권을 향한 강한 의욕을 보여왔다.
skycros@ilyoseoul.co.kr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