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지구이지만 지역·인종·민족·국가·권역별로 자연, 생활, 의식, 감정이 다르다. 인문과 문화도 다르다. 각 지역별로 특징 있는 문화를 서로 교류하면서도 서로의 문화와 전통을 가꾸어 나가기에 우리 삶과 정신세계가 풍요로울 수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를 살아보지 못했지만 조선시대의 유풍이 남아있던 일제침략 시대와 1950년대까지의 생활과 역사와 전통문화를 통해 조선시대 문화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며 인심이 순후한 사람들이 많았다.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다수였다. 또 무언중에 지켜야할 법도가 있었고 질서가 있었다.
집집마다 각기 그들마다의 지체와 분수에 맞는 생활이 있었다. 각기 다른 독특한 전통문화도 지녔다. 지방마다 권역마다 서로 다른 세시풍속과 통과의례가 있었다. 선조들은 제사를 지내면서 절에도 가고, 고사를 지내며 구능님을 모시기도 했다. 참으로 다양한 정신세계와 미풍양속이 있었다. 거기에 따르는 법도와 의식절차와 음악이 있었다. 또 다양한 미술공예품과 의복과 기물이 있었다.
이것들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며 각 가정의 전통이며 가보였다. 가정의 가보는 그 지역사회의 보물이고 나라의 보물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가까워올수록 전통의 법도와 생활과 인심이 분리됐다. 보물로 고이고이 간직하던 가보가 사라지고 그 집 자체가 헐려 없어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골목과 동네가 바뀌는 변화를 겪으면서 많은 전통문화가 급격히 파괴돼 사라졌다. 그 피해는 참으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것은 나라와 겨레의 크나큰 비극이다. 더욱이 그 피해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파악도 기록도 못했다. 또 다른 비극은 지하에 묻혀 있던 매장문화재가 도굴과 개발로 파괴됐다. 지상과 지하의 문화재를 단 시일에 무참히 파괴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러한 전통문화 파괴의 시작은 일제다. 이는 일본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만행중 하나다. 일본은 우리의 언어와 성명, 역사를 단절시켰다. 우리 고유 신앙과 미풍양속을 미신이라고 없애버렸다. 지하 매장 문화재는 도굴꾼을 시켜 도굴해 일본으로 가져가 버렸다. 뿐만 아니라 도시를 확장하고 도로 건설과 개간, 토지정비를 한다며 귀중한 유적지를 뭉개 버렸다.
일본은 서울의 성곽을 마구 허물었다. 남대문과 동대문을 제외하고 다른 문루를 모두 부숴버렸다. 지방의 중요도시의 문루와 성곽도 헐어버렸다. 경복궁 건물을 모두 헐어 버리고 폐허로 만들었다. 덕수궁도 축소해 없앴다. 본래 덕수궁과 맞닿아 있던 경희궁은 통째로 없애 버렸다. 지방의 여러 유서 깊은 고적도시의 좋은 유적을 일부로 없애버렸다. 유적 중앙에 길을 내는 등 일본의 극악한 적폐는 이루 말할 수도 없다.
우리나라에 골동상이 많이 둥장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그 전에도 서화를 모으고 감상하는 경우는 많았다. 특히 성현과 선대의 서간을 모아 첩책과 책을 꾸며 보관하는 예는 수없이 많았다. 옛 기물을 수집하는 수장가도 있었지만 17세기까지는 그 수효가 많지 않았다. 거간(居間)은 있었으나 가게를 차리는 경우는 드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8~19세기부터 감식안이 높은 수장가도 많아졌다. 가게와 거간이 늘고, 여항인과 평민도 고미술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조들은 집안의 가보를 팔고 산다는 것을 조상에 대한 불경이요 집안의 수치라고 생각했다.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할 수 없이 어느 집안의 가보급 물건이 나와도 원 소유주는 절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만약 어떤 집 사당에서 모시던 초상화를 팔면 거기에 쓰인 제찬이나 초상화 주인공의 이름을 지우고 팔았다. 그 외의 기물도 출처를 모르게 감추는 것이 관행이었다. 우리 고미술 시장이 일반에까지 널리 형성된 것도 일제 침략시대였다.
#인곡유거 -인왕산 골짜기의 그윽한 집
인곡유거는 겸재가 관아재와 이웃해 살던 후반 생애의 생활 모습을 그린 자화경이다. 인곡유거는 지금 신교동과 옥인동을 나눠놓은 세심대 산봉우리를 등지고 남향해 있던 집이다. 그 집을 동쪽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그린 것이 이 그림이다.
인왕산 주봉은 모두 생략해버리고 뒷동산인 낮은 봉우리만 그려 언뜻 인왕산 밑 동네임을 실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담묵으로 우리고 다시 물칠해가면서 담묵의 미점을 성글게 찍었다. 또 수목이 골마다 우거진 둥근 바위 산봉우리를 연상케 함으로써 인왕산 자락을 감지할 수 있게 했다.
그림 속 꼽패집의 등쪽 모서리 방에는 사방관을 쓰고 도포를 입은 선비가 서책이 쌓인 서가 곁에서 책을 펴놓고 앉아 있다. 활짝 열린 방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툇마루 지게문 곁에는 띠살문으로 된 평범한 방문이 보인다. 그 앞에는 삿자리 모양으로 엮은 울타리가 보인다. 이엉을 얹은 토담이 둘러쳐져 후원을 만드는 초가지붕 일각분이 기분좋게 표현됐다. 그 안에는 큰 버드나무와 오동나무 그리고 기타 잡목들이 서 있다. 버드나무 위로는 포도인지 머루인지 모를 덩굴이 기품 있는 잎새를 달고 감아 오르고 있다.
<사진=한국미술발전연구소>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