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적 4개월 만에 자술서 들고 자진출석…사전교감說 확산

[일요서울 | 김재현 기자] 검찰은 지난 7일 채동욱(56) 전 검찰총장에게 혼외 아들이 있다고 결론내렸다. 임모(55) 여인의 아들 채모(12)군이 채 전 총장의 아들이라고 확인한 것이다. 이 사건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세월호 참사 여파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정치권과 재계 일각에서는 이 사건과 관련해 여러 뒷말이 무성하다. 일단 검찰수사결과 발표 내용이 시원치 않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 채 전 총장을 도운 주변 인물들과 임모 여인 측에 입금된 자금의 실체, 그리고 채 전 총장 혼외자 사건을 둘러싼 권력개입 의혹 등이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의혹이 사실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
이 때문에 검찰 수사에도 권력의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허공을 맴돌고 있다. 아울러 채 전 총장 스폰서로 의심되는 모 기업에 대해서도 검찰 수사 직전 청와대가 이를 막았다는 소문이 청와대 주변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채 전 총장을 둘러싼 여러 고소·고발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한 서울중앙지검은 “채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의혹이 진실하거나 진실하다고 보는 것이 상당하다”고 밝혔다.
검찰은 관련 증거로 채군의 어머니 임씨가 채군을 임신한 2001년 산부인과 진료기록과 채군의 초등학교 학적부, 지난해 작성된 채군의 유학신청 서류, 2003년 7월께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 등을 들었다.
검찰은 채 전 검찰총장의 혼외 아들 의혹을 명백하게 밝힐 수단인 유전자 검사를 하지 못했지만 여러 경험칙에 근거해 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채 전 총장이 임신 단계부터 출생, 성장과정, 유학까지 중요한 대목마다 아버지로 표기되거나 처신해왔고 임씨도 채 전 총장을 채군의 아버지로 대하는 행동을 해왔다”며 “친자관계는 유전자 검사에 의하지 않고는 100%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간접사실과 경험칙에 의해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은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교육문화·고용복지수석실이 공공기관 전산망을 통해 채 전 총장의 뒷조사를 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정당한 감찰활동이었다고 보고 불기소처분했다.
검찰은 혼외아들 의혹이 보도된 이후 민정수석실이 채군 모자의 가족관계 등록정보와 출입국내역 등을 수집한 사실도 확인했으나 같은 이유로 기소하지 않았다.
앞서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조기룡 부장검사)는 혼외아들로 지목된 채모(12)군의 개인정보 불법유출 사건을, 형사6부(서봉규 부장검사)는 채군 어머니 임모(55)씨의 변호사법 위반 등 관련 사건을 조사해왔다.
검찰이 제시한 서류의 ‘남편’ 또는 ‘아버지’ 항목에는 ‘채동욱’ 또는 ‘검사’라고 기재된 것으로 조사됐으며, 또한 검찰은 채군의 돌 무렵인 2003년 7월께 세 사람이 찍은 ‘가족사진’도 제출했다.
또 검찰은 임씨가 임신 8개월 무렵 자신의 어머니에게 “아빠가 채동욱 검사”라고 말했으며 채군 역시 유학원 담당자에게 ‘아버지의 직업이 검사’라고 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드러난 진실 찜찜한 속내
검찰이 발표한 내용 가운데 모 기업의 채 전 총장 스폰서 의혹부분은 빠져 있다. 이를 두고 청와대와 검찰 주변뿐만 아니라 재계에서도 여러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일부에서 검찰의 기업수사에 부담을 느낀 청와대가 해당 기업 수사에 제동을 건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이 같은 추측은 검찰이 발견한 뭉칫돈 때문이다.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채 전 총장과 임 여인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 채 전 총장의 혼외자로 지목된 채모군 계좌로 억대의 뭉칫돈을 입금한 삼성 계열사 전 임원 A씨를 구속했다.
채 전 총장의 고교 동창으로 혼외자 의혹과 관련된 실체를 규명하는 데 열쇠를 쥔 것으로 주목을 받아 온 A씨가 구속되자 검찰의 수사가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수사는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A씨가 임 여인과 채군에게 억대의 뭉칫돈을 건넨 사실을 검찰이 확인하자 그는 4개월 넘게 잠적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횡령혐의를 순순히 인정하는 자술서를 들고 자진출석해 검찰을 당황케 했다. 이 과정에 대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검찰은 지난 4월 19일 삼성 계열사 임원을 지낸 A씨를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횡령 혐의로 구속했다. A씨는 2010년과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2억원을 채모군 계좌로 입금한 사실이 확인된 직후, 연락을 끊고 잠적해 의혹을 키웠다. 특히 삼성 측이 회삿돈 17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A씨를 검찰에 진정하면서, A씨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삼성은 A씨가 채군에게 입금한 돈이 회사에서 빼돌린 17억원 중 일부라며 수사를 의뢰했다.
검찰은 A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추가로 석연치 않은 정황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 등을 통해서는 A씨가 보낸 돈이 2억원인 것으로 보도됐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뭉칫돈이 채군 계좌에서 발견됐다는 말이 파다하다.
이에 검찰은 A씨 뿐만 아니라 그와 연결된 기업에 대해 본격 수사를 준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거액의 뭉칫돈이 발견되자 개인의 도움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판단, 기업이 A씨를 통해 거액의 자금을 전달한 것 아니냐고 의심한 것이다.
하지만 검찰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해당 기업에 대한 수사를 제대로 추진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여러 말들이 나오고 있는데, 청와대와 검찰 동정에 밝은 한 소식통에 따르면 검찰이 A씨를 수사하면서 그와 연결된 기업 수사를 준비하는 과정에 청와대의 수사 자제요청이 있었다. 이는 수사 선상에 오른 기업이 수사를 피하기 위해 청와대 측에 줄을 댔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검찰 주변에서 뭉칫돈을 수사하면 기업 비자금 수사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가 실렸으나 수사가 흐지부지되면서 여러 의혹과 더불어 ‘청와대 요청설’이 확산되고 있다.
검찰 수사에 위협을 느끼고 잠적했던 A씨가 갑자기 나타난 과정도 석연치 않다. 검찰의 수사망을 따돌리고 4개월 넘게 잠적해 온 A씨가 삼성이 주장한 혐의 대부분을 인정하는 자술서를 들고 자진출석한 것을 두고 청와대-기업-A씨 사이에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A씨는 지난 4월 15일 삼성이 주장한 혐의를 상당 부분 인정하는 자술서를 들고 검찰에 자진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A씨에 대한 조사를 마친 뒤 다음날 바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법원은 A씨에 대한 구속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거쳐 지난 4월 18일 밤 10시45분께 영장을 발부했다. 소명된 범죄혐의가 중대하고 도주 우려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검찰에 따르면 A씨는 2010년과 지난해 8월 각각 1억2000만원과 8000만원을 채군 계좌로 입금했다. 검찰은 A씨가 입금한 돈의 출처가 삼성계열사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삼성물산에서 근무하다가 1999년 퇴직한 A씨는 삼성물산이 출자한 자회사 케어캠프로 자리를 옮겨 2012년 3월까지 부사장으로 일했다.
검찰은 구속된 A씨를 상대로 횡령 규모와 사용처, 채 전 총장이 자금의 출처를 알았는지 여부 등에 초점을 맞춰 수사를 벌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이와 함께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의혹과 관련, 관련자들 일부가 기소됨에 따라 사안은 이제 법원으로 넘어갔다.
지난 9일 법원에 따르면 개인정보보호법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조오영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실 행정관(55)과 조이제 전 서초구청 행정지원국장(54), 국정원 직원 송모씨 등 3명에 대한 재판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심규홍)에 배당했다.
또 공동공갈과 변호사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내연녀 임씨에 대한 사건은 같은 법원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범균)에, 횡령 혐의로 구속기소된 채 전 총장의 고교동창 이모씨 사건을 형사합의 24부(부장판사 김용관)에 각각 배당했다.
법원은 이씨 사건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건에 대해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해 단독 재판부가 아닌 합의부로 배당했다.
검찰은 지난 7일 채 전 총장의 혼외자 의혹 관련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총 8명을 재판에 넘겼다.
검찰에 따르면 조 전 행정관 등 3명은 채 전 총장의 혼외자로 지목된 채군 등의 개인정보를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조 전 행정관은 지난해 6월 조 전 국장에게 부탁해 채군의 가족관계등록부상 개인정보를 제공받았다. 이 시기에 송씨도 조 전국장으로부터 채군의 개인정보를 제공받고 채군이 다니던 초등학교 관계자에게서 채군의 재학 사실과 아버지 이름이 ‘채동욱’으로 기재된 사실 등을 넘겨받았다.
임씨는 지난해 5월 가정부였던 B씨와 그 아들에게 ‘채 전 총장과 아들의 관계를 발설하지 말라’고 협박해 3000만 원의 빚을 면제받은 혐의다. 또 유흥주점 직원들과 짜고 자신과 채 전 총장과의 관계를 이용해 형사사건 청탁 명목으로 두 차례에 걸쳐 1400만 원을 받은 혐의도 있다.
앞서 채 전 총장의 혼외자 논란은 지난해 9월 한 언론사의 보도가 나온 이후 시작됐다. 당시 채 전 총장은 혼외자식 의혹 보도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강하게 부인했으나, 결국 파장이 확산되자 공식 퇴임한 바 있다. 채 전 총장은 부인과 딸이 참석한 퇴임식에서 “부끄럽지 않은 남편과 아빠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검찰은 청와대가 채 전 총장 주변을 조직적으로 뒷조사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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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현 기자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