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오십 한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MCM을 글로벌 패션 브랜드로 재도약시킨 성주그룹(회장 김성주)이다.
성주그룹은 1990년 이태리 구찌의 프랜차이즈 계약, 1991년 프랑스 디자이너 소니아리키엘의 프랜차이즈 계약등을 잇달아 성사시키며 한국 명품시장에 등장했다.
해외 명품 수입에서 시작한 사업은 이후 라이센스 제품 기획과 생산으로 확대됐고, 이제는 세계 명품 브랜드인 MCM의 글로벌 사업을 전개하면서 점차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현재 성주그룹은 MCM 브랜드를 갖고 있는 성주디앤디, 막스 앤 스펜서 라이선스 사업을 하는 성주머천다이징, 그리고 비영리법인인 성주법인으로 구성돼 있다. 연간매출은 4000억 원대를 넘어섰다. 이 모두가 자신의 한계를 도전하고, 관행과 비리에 도전해 얻은 성과다.
대성산업 창업자인 고 김수근 씨의 막내딸로 태어난 김성주 회장은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다. 그런 김 회장이 부잣집 딸로서 당시 보편화되고 평범한 길이었던 ‘좋은 신랑을 만나서 시집가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가 평범함을 버리고 험난한 가시밭길을 탁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커다란 계기가 있다.
불공평함 바꿀 결심하다
김 회장의 인생에 첫 번째 커다란 전기가 찾아온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그녀는 반장을 맡고 있었는데 앞자리의 친구가 며칠째 학교에 나오지 않아 담임선생님과 함께 친구의 집을 찾아가게 됐다.
길을 물어서 골목길을 헤매며 찾아간 김 회장은 움막집에 살고 있는 친구를 발견하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돈이 없어서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누워 있는 친구를 보면서 그녀는 사회가 너무 불공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 친구를 보고 자신이 부유한 가정에 만족하고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불공평한 사회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김 회장은 사업을 하며 돈을 벌어서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하면 이런 불평등이 조금이라도 사라지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김 회장이 사업을 결심한 첫 번째 이유다.

여성차별에 대한 도전
김 회장의 어린 시절, 당시 한국 사회는 뿌리 깊은 유교사상에 젖어 있었다. 여성은 오로지 가정에서 남편을 보필하고 자녀를 키우는 것이 가장 큰 덕목이요,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됐다. 따라서 여성으로서 사업을 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 회장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 여성은 사업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외국에서는 여성들이 정계, 재계에 진출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왜 우리나라는 불가능한 것일까?’
이런 의문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한 후 김 회장은 그런 여성차별에 맞서기 위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유학자격고사에서 10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하자 그는 아버지를 설득해 마침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김 회장은 미국에서 작은 하버드라고 불리는 앰허스트대학교에 입학해 하루 3~4시간만 자며 공부에 열중했다. 교수의 강의를 녹음했다가 정리한 다음 친구의 노트를 빌려 비교하면서 외울 정도였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던 중 그녀가 사업을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그녀는 유학 도중 이탈리아계 미국인 학생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결혼을 결심하자 진노한 그녀의 아버지는 그때부터 유학비를 보내지 않았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학교를 포기해야 될 형편에 이르자 김 회장은 학교를 포기할 수 없어 사업을 시작했다.
모든 도전을 이기다
그 후 복학해 천신만고 끝에 대학을 졸업한 김 회장은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런던정경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뒤 한국에 돌아왔다.
그런데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자 반대에 부딪쳤고, 결국 다시 앰허스트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처럼 치열한 시간을 보낸 끝에 그는1996년 미국 앰허스트대학교가 기금 마련을 위해 제작한 ‘학교를 빛낸 5인’이라는 홍보 비디오물에 출연하기도했다. 그녀는 노벨상 수상자 2명과 함께 그 비디오에 출연했고, 2000년에는 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앰허스트대학교 최초의 여성이 됐다.
이후 그녀는 귀국해 패션 전문업체인 ‘성주인터내셔널’을 설립했다.
여자의 몸으로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사업을 결심한 후부터 그녀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업에서 남녀 구분이 없어야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회사 내에 사업 부서를 만들어 능력 있는 남성들을 뽑았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을 정도였다. 여자 사장 밑에서 어떻게 일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밑으로 오라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오라고 해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김 회장은 여성 CEO로서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점도 있다고 말한다. 일단 성주인터내셔널이 판매하는 제품의 고객은 80%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 CEO가 유리하다고 말한다. 직접 옷을 입어보고 핸드백을 들어보면서 여성 입장에서 무엇이 잘못됐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영에서도 수직적인 질서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적인 회사 분위기를 만들 수 있어서 유리하다.
김 회장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은 여성들이 남성 영역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남성들이 하지 못하는 분야, 남성들보다 훨씬 더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진출해 쌍두마차 체제로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첫 번째 도전의 성과
김 회장은 여성도 사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성공을 통해 보여줬다. 그렇게 김 회장은 국내보다는 국제적으로 더 많이 알려진 CEO가 됐다.
1997년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차세대 지도자 100인에 포함됐으며 2011년에는 아시아위크 선정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2003년에는 CNN 선정 ‘새천년 리더’, 월스트리트저널이 선정한 ‘주목해야 할 여성 기업인 50인’에 뽑히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통업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주목을 받았지만 한국의 관행은 절망감을 심어줬다. 사업 초기에 만난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를 잘해야 사업에 성공할 수 있다. 첫째는 술 접대를 잘해야 하고, 둘째는 뇌물을 잘 바쳐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상황에 따라 거짓말도 잘해야만 한다”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김 회장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요, 당시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관행이었다.
당시 해외에서 제품이 들어와 세관을 통과할 때는 뇌물을 줘야만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백화점에 입점하더라도 월정액을 주지 않으면 직원들이 윽박지르고, 몇 십억 원의 매출을 올려도 쫓겨나기 십상이었다. 이것은 당시 기업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는 비밀이었으며 그러려니 하며 그런 관행을 따라야만 하는 것으로 모두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 회장은 그런 관행을 깨트리고 투명경영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뇌물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면서 그는 거절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게 말했다. “당신이 돈이 없어서 아이에게 우유도 사서 먹이지 못한다면 돈을 주겠다. 그렇지 않다면 나라를 위해서도 줄 수가 없다”

두 번째 도전의 성과
그런 김 회장에게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모욕과 고통이 뒤따랐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런 순간에도 또 한 번의 결심을 했다.
‘돈을 벌기 위해 탈세를 하고 이중장부를 만들지 않겠으며, 쉽게 해결하기 위해 뇌물을 바치지 않겠다. 그렇게까지 해서 돈을 버는 사업가는 되지 않겠다’
김 회장은 자신의 그러한 행동에 대해 실 보다는 득이 더 많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평가대로 투명경영을 통해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당시 만연한 관행과 부정에 대한 도전으로 투명경영을 해온 김 회장의 성과로는 우선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막스 앤 스팬서’의 국내 판권 경쟁에서 국내 대기업을 비롯해 40여 곳을 제치고 이겼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상으로 평가되었던 싸움에서 중소기업 성주인터내셔널이 이긴 것은 그녀의 소신이 인정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후에 왜 성주인터내셔널을 뽑았느냐는 물음에 맥스 앤 스팬서는 이렇게 말했다.
“투명경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명경영의 성과가 빛이 난 또 하나의 사건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때의 일이다. 김 회장은 IMF 외환위기로 인한 자금난으로 300억 원이 부족해 부도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김 회장은 구치 판권을 무려 270억 원에 매각해 위기를 모면했다.
당시 한 사업 분야를 270억 원이라는 거액으로 매각한 회사는 성주인터내셔널이 유일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경영이 ‘투명’했기 때문이다. 인수 회사에서는 한국 기업이 탈세를 많이 하기 때문에 약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세 차례나 조사를 반복했다. 그러나 인수회사는 성주인터내셔널에서 제출한 서류와 조금의 차이도 발견하지 못했다. 특히 성주인터내셔널은 감가상각 부분까지 있는 그대로 반영했다. 이중장부가 없으니 속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김 회장은 급성장한 CEO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꾸준히 성장을 멈추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안주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나갔다.
성주그룹을 대표 패션브랜드가 된 MCM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MCM은 성주그룹의 대표적인 라이센스 브랜드였다. 1991년 라이센스 계약 당시 MCM 독일 본사로부터 세계 최초로 국내 생산권을 따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다 2005년 MCM은 독일 본사를 인수했다.
이후 서울과 독일 뮌헨에서 MCM의 재탄생을 알리는 패션쇼를 개최했다. 또 쇼룸을 오픈하면서 ‘지적이고 심플하며, 견고하고 실용적인 80년대 스타일’이라는 본래의 디자인 철학을 간직하면서도 시대적 감성을 녹인 새로운 21세기적 디자인을 선보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후 MCM은 단시간 내에 세계 35여 개국에 매장을 내고, 국내 시장엔 면세점을 포함해 60여 개의 매장을 열었다. 또 국내 럭셔리 브랜드 중에서 매출순위 1~2위를 다투는, 그야말로 럭셔리 업계의 리더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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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박시은 기자>
<출처=대한민국 최고의 CEO│지은이 이주민│미래북>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