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시효 만료 앞둔 ‘대구 아동 황산테러사건’
공소시효 만료 앞둔 ‘대구 아동 황산테러사건’
  • 이지혜 기자
  • 입력 2014-05-02 10:05
  • 승인 2014.05.02 10:05
  • 호수 1044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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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49일, 그리고 지키지 못한 마지막 약속

6세 소년 태완군 “범인 혼내줘, 잡아서 열 밤 때려줘”
목격자 없어 경찰 수사 난항…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나

[일요서울 | 이지혜 기자] 학원을 향해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기던 어린 소년에게 정체불명의 남성이 황산을 들이부었다. 전신 3도의 화상과 두 눈을 잃은 소년은 49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 소년 김태완(6)군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뒤집어쓴 물이 황산인 줄도 몰랐다. 고통스러워하는 김군에게 엄마 박모씨는 “나쁜 사람 잡아서 꼭 혼내줄게. 사과하게 해줄게”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사건의 목격자가 없어 경찰 수사에 진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경찰이 ‘재수사’를 결정했다. 과연 김군과의 마지막 약속은 지켜질 수 있을까.

1999년 5월 20일 오전 11시께 대구시 동구 효목동의 어느 골목길에서 김태완(6)군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명을 듣고 뛰어나온 엄마 박모씨는 반쯤 녹은 옷을 걸친 채 온 몸이 타틀어가면서 전봇대에 기대 앉아있는 김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군의 머리와 눈썹은 그을린 듯 희미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김군은 박씨에게 “뜨겁다”고 말했다. 학원을 가겠다며 집 밖으로 나선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발생한 참담한 사건이었다.

꿈 많은 어린 소년 집 떠난 지 10분 만에…

그날은 김군이 1주일에 한 번씩 학습지 과외를 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온몸에 황산을 뒤집어 쓴 김군은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황산이 얼굴에 쏟아져 눈과 코, 입안이 모두 녹아내린 상태였다. 김군은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생존율 5%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 고통과 싸우며 힘들게 버티던 김군은 “골목길에서 아저씨가 일부러 뜨거운 물을 부었다”고 입을 열었다. 정체불명의 남성이 골목길에서 김군에게 검정 비닐봉투에 들어있는 황산을 들이 부은 것이다. 어린 김군은 황산을 알지도 못하고 단지 ‘뜨거운 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또 김군은 박씨에게 “엄마 그거 아나? 뜨거우니까 앞이 잘 안보이더라. 집으로 가려고 하니까 옷이 찢어졌다. 잘 안 보여서 벗겨진 신발 들고 전봇대 밑으로 내려왔다”고 말했다. 당시 김군의 가슴 아픈 모습은 방송을 통해 온 국민이 지켜봤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형에게 “엄마가 장난감 사준다는데 나 혼자 사도 되나?”라고 묻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꿈 많던 어린 소년 김군은 사건이 발생한 지 49일 만에 사랑하는 가족을 뒤로한 채 세상을 떠났다. 김군은 사망하기 전 이웃집에 살고 있는 A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사고를 당하기 전에 골목길에서 A씨를 봤다고 진술했다. A씨는 사건 발생 직후 김군을 병원으로 옮긴 당사자였다. 그러나 경찰 수사는 진전이 없었다. 대낮에 발생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목격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사건이 발생하고 15년 뒤인 현재까지 김군에게 황산 테러를 가한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공소시효 만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볼 때 이 사건은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을 확률이 높다.

“잘 가 태완아 먼 훗날 다시 만나자”

김군의 마지막 가는 길. 엄마와 아빠는 “나쁜 아저씨 꼭 잡아서 혼내줄게”라고 약속했다. 김군도 생전에 “(범인 잡아서)혼내 줘. 잡아서 열 밤 때려줘”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범인은 잡히지 않고 야속한 시간만 흘러갔다. 김군의 모친 박씨는 사건 발생 2년 뒤부터 19차례에 걸쳐 웹 사이트에 ‘49일간의 아름다운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김군의 병상일지를 올렸다. 김군과 같은 희생자가 다시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김군이 대중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도록 박씨는 당시의 아픈 기억을 다시 되짚었다.

병상일지에 따르면 김군이 황산을 뒤집어 쓴 그날 밤 박씨는 물 담은 양동이를 들고 사건 현장을 헤맸다. 황산이 물에 닿으면 뿌옇게 변하는 것을 이용해 범인의 흔적을 쫓기 위해서였다. 황산은 골목 어귀에서 사라졌다. 그곳은 나중에 김군이 A씨를 봤다고 말한 장소였다. 박씨는 온 동네 쓰레기통을 모두 뒤졌지만 끝내 황산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뒤 김군은 뜨거운 물을 뒤집어썼던 그날의 기억을 말하기 시작했다. “골목에서 A씨가 지나가는 것을 봤는데 그가 사라지고 잠시 후 가면을 쓴 낯선 사람이 나타나서 뜨거운 물을 부었다”,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A씨가 내 이름을 불렀다”는 자세한 이야기였다. 박씨는 김군의 말을 영상과 음성으로 남겼다.

이 사건에서 주목할 점은 범인이 김군의 뒤에서 김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입을 벌리게 한 뒤 얼굴에 황산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군의 담당 의사는 “고개를 뒤로 젖힌 상태에서 약품을 부은 듯 머리 뒤로 약품이 흘러내린 흔적이 남아있다”면서 “약품이 입에 닿으면 입을 다물게 된다. 하지만 김군의 입안은 약품으로 온전히 녹아있다. 눈과 입에 집중적으로 약품이 가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 죄 없는 어린 아이에게 이토록 잔인한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풀리지 않은 의혹수사 재개할 필요 있다”

용의자로 지목된 A씨는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김군의 가족을 찾아와 돈을 빌려달라고 여러차례 사정했지만 거절당했다. 충분한 범행동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또 당시 담당 형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군의 상태와 황산의 원액으로 볼 때 가해자도 손이나 발등, 옷 어딘가에 화상을 입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군의 사건이 발생한 직후 달려 나간 박씨와 그녀의 언니는 A씨의 팔과 다리에 상처가 난 것을 목격했다. A씨는 그냥 다쳤다며 둘러댔지만 가족들은 김군의 진술과 A씨의 상처를 보고 용의자로 의심, 경찰에 A씨의 옷을 검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2차례의 조사를 통해 증거가 없다며 A씨를 무혐의로 풀어줬다. 2차례의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 “사건 발생 시간에 집에 있었다”는 A씨의 진술이 진실로 나왔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엄연히 목격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서 인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그 시각 김군은 혼자 있지 않았다. 친구 이모군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군의 진술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군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아동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담당형사는 “의사전달이 안 되는 사람이 이야기 하는 것을 진술로 인정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이에 박씨 측이 이군의 지능수준이 정상이고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검사 결과를 제출했지만 경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박씨와 대구지역 시민단체는 지난해 11월 검찰에 재수사를 요청했다. 이들은 “아직 진상을 알 수 없는 가운데 내년 5월이면 황산 테러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난다”며 “당시 나온 의혹들에 대한 수사가 충분히 못했기 때문에 수사를 재개할 필요가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이들의 요청에 의해 지난해 12월 사건을 담당한 대구동부경찰서에서 재수사가 시작됐다.

상해치사인가 살인인가

사건 발생 당시 경찰은 범인에 대해 ‘상해치사죄’를 적용했다. 상해치사죄의 공소시효는 10년에 불과하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김군의 사건을 재조명했던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경찰은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끝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상해치사죄를 적용한다면 이미 2009년에 끝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박씨 측은 범인에 대해 ‘살인죄’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살인죄의 경우 공소시효는 15년이다. 전문가들 역시 가해자의 혐의가 ‘상해치사’인지 ‘살인’인지 여부는 범인을 잡은 뒤 조사를 통해 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따라서 이번 경찰의 수사 재개는 가해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꿨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사건에 관련된 의혹이 풀릴 수 있을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이유는 눈앞으로 다가온 공소시효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15년 뒤인 오는 20일에 ‘황산 테러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된다. 그 이후로는 범인을 잡아도 법적으로 처벌이 불가능하다.

죄 없는 어린 아이가 황산을 뒤집어쓰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모는 아이에게 범인을 꼭 잡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들에게 냉혹했다.

남은 기한은 15일, 이들의 마지막 약속이 늦게라도 지켜질 수 있길 바라며 재수사 결과를 기다려본다.
jhooks@ilyoseoul.co.kr 

이지혜 기자 jhooks@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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