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 | 조아라 기자] 우리나라 발레계를 논할 때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UBC) 단장을 빼놓을 수 없다. 불모지에 가까웠던 한국 발레가 채 반세기도 되기 전에 비약적 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와 UBC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발레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비전과 열정은 오늘날 UBC의 밑거름이 됐다. 수석발레리나에서 이제는 100여 명이 상주하는 최고 수준의 발레단 단장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문훈숙 단장. 한국 발레 수준 향상은 물론 활발한 해외 투어로 ‘발레한류’를 이끌고 있는 그를 [일요서울]에서 만나봤다.
▲ 주역 발레리나로 UBC에 입단했고, 이후엔 단장이자 유니버설문화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다. 30주년을 맞이한 감회가 어떤가.
- 30년. 돌이켜보니 참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지금은 70여 명의 무용수와 40여 명의 스태프가 상주하고 있는 최고 수준의 발레단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창단 당시인 1984년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많은 변화와 발전을 이룬 것 같아 뿌듯하다. 지난 시간 동안 UBC와 함께 한 모든 무용수들과 스태프들이 최고가 되겠다는 열정과 꿈을 가지고 흘린 땀과 눈물,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이런 기쁘고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 모든 분들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이다.
▲ UBC가 한국 발레계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나.
- 발레단 창단 직후 조지 발란신의 작품을 공연하면서 공연계 최초로 저작권의 개념과 기준을 가지고 해외 안무가 및 아티스트와 교류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1992년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단 예술 감독이던 올레그 비노그라도프와의 만남을 통해 당시 마린스키 발레단 최고의 발레 트레이너들과 함께 일하며 우리나라에 최초로 러시아 발레의 전통을 소개할 수 있었다는 점은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다. 우리의 교류로 국립발레단이 러시아 볼쇼이발레단과 인연을 맺게 돼 국내에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개할 수 있었던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인 안무가들의 명작을 초연하며 국내 관객에게 컨템포러리 발레 및 드라마 발레의 아름다움을 소개할 수 있었다. 또 발레 교육 메소드도 정착시켰다. 러시아 마린스키 발레의 레퍼토리를 공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바가노바 발레 메소드를 습득하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발레 교육기반을 세울 수 있었다.
▲ 국내 최대 민간 발레단을 경영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은 없었나.
-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UBC가 창단됐던 1984년도 한국은 그야말로 발레의 불모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발레를 한다는 자체가 어려웠다. 무용수, 특히 남자 무용수가 많이 부족해서 외국에서 데려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발레단을 발전시키기에는 공연의 횟수도 턱없이 부족했다. 무용수의 수준뿐만 아니라 의상, 장치, 조명, 공연 진행, 관객개발 모두가 열악한 상황이었다. 1992년도에 당시 마린스키 발레단 올레그 비노그라도프 예술 감독에게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고 싶다고 했지만 안 된다고 했다. 아직 발레단 수준이 부족하다면서. 1996년에 미국으로 해외 공연을 가겠다고 했을 때도 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우리는 추진했다. 나중에 그분이 한국인의 열정과 의지에 오히려 감동받았다고 하셨다. 그동안 어려운 상황은 많았지만 이를 각고의 노력과 강한 의지로 극복했다.
▲ 유니버설발레단은 고전발레부터 모던발레까지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클래식 발레만 고집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세계 발레계의 추세는 클래식 발레 외에도 모던 발레를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한국 발레가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모던 발레를 공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고전 발레의 기본을 다졌고, 2001년부터 모던 발레 작품을 올리기 시작했다. 모던 발레가 생소한 단원과 관객을 위해 처음에는 쉬운 작품을 올렸다. 차츰 단원들의 기량과 관객 수준이 높아지면서 점점 난도 높은 작품을 하게 됐다. 이제는 두 시간 길이의 모던 발레인 ‘멀티플리시티’도 공연할 정도가 됐다. 단원들도 모던 발레를 통해 더 많이 성숙해졌고 관객층도 더 두터워졌다고 생각한다.
- ‘심청’은 애드리언 델라스 UBC 초대 예술감독이 안무하고 구상한 작품이다. 외국인이다 보니 효를 주제로 한 심청의 얘기를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그는 이것을 UBC만의 독창적인 레퍼토리로 만들어 해외로 진출할 것까지 생각했다. 난 ‘심청’에 이어 ‘춘향’, ‘흥부와 놀부’ 등 3부작을 만들어 우리나라 문학에 담겨 있는 한국 고유의 효·정조·형재애 등의 아름다운 정신을 담은 작품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2007년 ‘춘향’을 전막 초연했다. ‘심청’을 27년에 걸쳐 지금까지도 수정·보완을 거쳐 완성도를 높여가듯이 ‘춘향’도 UBC 창단 30주년을 맞아 새롭게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내년에는 해외 유명 안무가와 함께 고전 명작을 새로운 각도로 해석한 신작을 올릴 준비를 하고 있다.
▲ ‘심청’, ‘춘향’ 등의 작품이 한국 발레의 레퍼토리를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해외 관객들의 반응은 어떤가.
- 지난 27년간 ‘심청’으로 많은 나라에서 공연을 했다. 외국인들이 전혀 모르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곳마다 갈채를 받았다. 발레 작품 대부분이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는 데 비해 ‘심청’은 ‘효’를 주제로 하고 있어 새로움을 주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기 때문에 심청이와 아버지가 만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외국인들도 눈물을 닦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012년 대만에서 ‘심청’을 본 관객분이 보낸 글을 받은 적이 있다. 한국을 좋아하지 않지만 발레 작품이 아이들 교육상 좋을 것 같아서 관람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분이 공연이 끝난 뒤엔 ‘지금까지 본 공연 중 최고’라고 했다. 무용수들의 표정, 춤, 무대장치, 의상 등 어느 하나 정성을 쏟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아서였다. ‘심청’이라는 발레 작품 하나가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 발레단이 3년간의 세계 투어를 마쳤다. 세계 투어에 나서게 된 계기는 무엇이고, 이 투어가 발레단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하다.
- 초기 해외투어에서는 한국의 인지도와 한국의 발레단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그래서 1986년 한국 발레단 최초로 해외 투어에 나선 것이다. 이후 국제사회로부터 UBC의 수준을 인정받아 북미와 유럽으로도 진출할 수 있었다. 2011년부터는 한국 발레가 세계 발레에 기여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월드투어를 실시했다. 9개국 11개 도시에서 공연을 했다. UBC의 창단이념인 ‘예천미지(천상의 예술로 세상을 아름답게)’를 실천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 UBC의 고유 작품인 ‘심청’이 발레의 본고장 러시아 모스크바와 프랑스 파리에 초청돼 ‘한국 발레 역수출’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초청자가 현지 모든 경비를 부담하는 등 초청조건도 개선됐다. 이제는 우리나라 발레 수준을 많이 인정받게 됐다. 활발한 해외투어와 현지 언론의 평가로 국내 발레단 최초로 ‘발레한류’도 개척했다. 일본에서는 발레와 아이돌의 합성어인 ‘발레돌’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현지 팬 층이 두터워졌다.
앞으로의 목표는 더 좋은 초청조건을 받아 해외공연을 하는 것이다. 또 우리가 만든 창작발레를 수출하는 것이다. 아직 할 일이 많다.
▲ 문 단장은 ‘영원한 지젤’로 불린다. 이 외에 개인적으로 아끼는 다른 작품이 있는가.
- ‘지젤’에는 순수함, ‘돈키호테’ 키트리에게는 열정, ‘라 바야데르’ 니키아에게는 성숙한 여인, ‘백조의 호수’에는 매혹적인 흑조 오딜과 순수한 백조 오데트의 양면성 등 모든 작품들이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이런 작품들을 통해 내 안에 있는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가 더 좋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는 작품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20대는 ‘지젤’과 ‘심청’이 좋았다면 30대 초반에는 ‘키트리’, 30대 후반에는 ‘니키아’가 좋아졌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변하듯이 좋아하는 작품도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 같다.
- 내 손길을 필요로 하고 나를 의지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만큼 이제는 내가 아들과 딸에게 의지를 하게 되는 면도 있다. 아들을 키우면서 힘들 때도 많았지만 그 과정을 함께 겪으면서 사랑이 더 깊어졌다. 사실 부모가 아이들을 키운다고 하지만 때로는 아이들이 부모를 성장시키는 것 같다. 지금은 하루하루 바쁘게 지내고 있어서 보통 엄마들처럼 많은 것을 챙겨주지 못하다보니 늘 미안하고 애틋한 마음이 많이 든다.
▲ 따님 경우엔 세 살 때 발레 ‘심청’에도 출연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도 발레리나로 성장하기 위해 준비 중인지 궁금하다.
- 그렇다. 어느새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됐다. 발레에 푹 빠져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고 단련하는지 모른다. 처음에는 발레하기에 좋은 체격이 아니라서 많이 말렸다. 하지만 아이가 의지를 가지고 발레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내가 감동을 받았다. 요즘 엄마들이 아이들을 적게 낳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고 하는데 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느꼈다. 쉬운 길보다는 조금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도 갈 수 있도록 돕는 게 아이를 위해 더 좋은 것 같았다. 아이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스스로를 지키고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만들어줄 수 있어서다. 아이를 격려해주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부모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 앞으로 발레단의 계획은 무엇이며 이루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 경영을 하다 보니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 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조직 내에 있어도 서로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들을 어떻게 융화시켜야 하는지를 많이 고민하고 있다. 서로 같은 목적의식을 갖고 나아가게끔 할 수 있도록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끝나지 않는 숙제라고 생각한다. 또 내실을 다지는 효율적인 경영에 치중해 발레단 자체의 기반을 더욱 견고히 하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발레단이 만들어 놓은 전통, 스타일, 수준을 차세대 주자들이 잘 유지하고 1세대가 없이도 더욱 잘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발레단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chocho621@ilyoseoul.co.kr
<사진제공=유니버설발레단>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