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0명 탈 수 있는 구명 뗏목은 무용지물
5997톤이던 선박이 6825톤으로 무거워져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16일 오전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들은 국민들은 하루하루를 침묵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부모만큼은 아닐지언정 한 명이라도 더 살아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은 간절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들려오는 사건의 진상은 국민들을 실망하게 만들었다. [일요서울]에서는 사건과 관련된 주요 숫자를 통해 세월호 침몰 사건을 되짚어 봤다.
44
세월호 침몰 사고는 박근혜 정부 들어 일어난 최대 참사다. 동시에 44년 만에 터진 최악의 해난사고다.
그동안 해난사고 가운데 가장 많은 사망자를 기록한 사건은 1970년에 일어난 부산-제주 정기여객선 남영호 침몰 사건이다. 남영호는 침몰 당시 정원 초과와 높은 파도로 338명 탑승객 가운데 12명만 살아남고 326명이 숨졌다.
다음으로는 1993년 10월 10일 발생한 위도 페리호 침몰사건이다. 위도 페리호는 위도-부안 격포항을 오가는 여객선으로 위도 북서쪽 3킬로미터 지점에서 침몰해 292명이 숨지고 말았다.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 사고는 아직 정확한 사망자 수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사망자와 실종자를 모두 더하면 잠정 302명이다. 생존자가 나오지 않는 한 위도 페리호 침몰 사건보다도 더 큰 참사로 기록될 전망이다.
안타까운 점은 이번 사고 희생자 대다수가 학생들이라는 점이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경기 안산 단원고 2학년생과 교사들 대다수가 아직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52
세월호 운항기록에 따르면 16일 오전 8시 48분 세월호는 오른쪽으로 급선회 했다. 이후 속도가 19노트에서 8노트로 급속히 감소했고 ‘쿵’ 소리와 함께 기울기 시작했다. 8시 55분 세월호는 제주관제센터에 “지금 배 넘어간다”며 해경에 연락해 달라고 통보했고 승객들에게 “밖으로 나오면 위험하니 승객들은 방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안내 방송을 했다. 2분 뒤 8시 57분에 제주관제센터는 해경에 구조요청을 했고 배가 기울어졌다.
9시부터 세월호와 제주관제센터간 통신이 이어졌고 제주관제센터는 “구명조끼 착용하고 배를 버릴 준비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5분 뒤인 9시 5분까지 세월호에서는 “이동하지 말고 안전한 선실에서 기다려라”라는 방송만 반복됐다. 결국 학생들은 이 말을 믿고 대피 준비를 하지 못했고 결국 피해가 늘게 됐다.
9시 50분경 세월호 선장과 기관사 등 선원 6명은 학생들을 배에 남겨둔 채 배에서 탈출해 구조됐다. 세월호에서는 10시 15분에서야 처음으로 “여객선 침몰이 임박했으니 승객들은 바다로 뛰어내리는 상황에 대비하라”는 대피 통보를 했다. 10분 뒤 배는 90도 이상 기울어졌고 11시 20분경 세월호는 완전히 침몰하고 말았다. 8시 48분 세월호가 급선회한 뒤 침몰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52분이었다. 선장이 판단을 정확히 하고 승객들을 빨리 탈출 시켰더라면 이 시간 동안 더 많은 승객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475
세월호에 탑승한 탑승인원은 최종 475명으로 확인됐다. 당초 정부는 물론 해운사에서 발표한 최종 탑승인원은 최초 477명이던 것이 459명으로 줄었다가 다시 462명으로 늘었다가 다시 13명이 늘어 최종 475명으로 확정됐다. 일부 화물 운전기사들이 선표없이 배에 승선하는 과정에서 명단 파악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선사 측 해명이다.
해경은 논란이 거세지자 정확한 승선인원을 파악하기 위해 인천항여객터미널의 개찰구 CCTV를 통해 승선자 수를 일일이 확인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탑승자 수가 이틀 동안 4차례나 변경되자 언론사와 피해자 가족 등이 혼란에 빠졌었다.
500
침몰한 세월호를 수색하고 생존자를 찾기 위해 투입된 잠수부는 500명이 넘는다. SSU 해난구조대, UDT 해군특수전 부대, 해양경찰, 소방대원, 민간구조단 잠수부를 모두 합한 숫자다.
하지만 선체 수색 과정에서 조류가 생각보다 강하고 수면 밑 시야가 수십 센티미터밖에 확보되지 않아 수색에 어려움을 겪었다. 실제 2인 1조로 선내 수색을 할 계획이었지만 실제 안으로 진입한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다.
17일 오후 2시경에는 민간 잠수사 3명이 침몰한 세월호 생존자를 수색하기 위해 물 속으로 내려갔다가 실종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20분 만에 근처 어선과 다른 민간 잠수부들에 의해 발견돼 구조됐다. 당시 사고 해역에는 초속 10.2m의 강한 바람과 파고가 1.5m로 높아진 상태였다.
2010년 3월 서해 백령도 앞바다에서 천안함이 침몰했을 당시 고 한주호 준위(53)가 실종 장병들을 찾겠다며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끝내 숨졌다.
1150
세월호에는 25인승 구명뗏목 46대가 비치되어 있었다. 1,150명이 이용할 수 있는 규모다. 하지만 침몰 당시 정상 작동된 구명뗏목은 전체 46대 중 1대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명뗏목은 선박이 침몰하면 일정 수압에 의해 자동 팽창되는 튜브식 탈출 보조기구다. 구명뗏목에는 비상식량과 낚시도구까지 구비돼 있는데다 천막을 올려 입구를 닫아 해수 유입도 막을 수 있어 겨울철이 아니라면 최대 10일까지도 버티게 해 주는 구조 장비다.
장비 점검 불량으로 이용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문제가 제기됐었으나 지난 2월 안전점검에서 모두 정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해양경찰도 구명뗏목의 불량 가능성보다는 세월호의 침몰 진행 상황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세월호는 왼쪽으로 기울며 선체 왼쪽이 수면에 닿은 뒤 서서히 침몰했다. 오른쪽 선측의 구명뗏목이 작동되기에는 수압이 약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경은 설명했다.
5997
세월호는 1994년 일본에서 건조됐다. 18년 동안 가고시마와 오키나와 구간을 카페리 여객선으로 사용한 후 중고여객선으로 한국에 매각됐다. 그동안 한 차례 기름 유출 사고가 있었으나 선박 충돌 사고나 좌초 사고는 없었다.
승선정원은 일본에서 운행될 당시 804명으로 배 무게는 6586톤이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온 뒤 승선정원이 921명으로 늘었고 무게도 6586톤에서 6825톤으로 239톤이 늘었다. 객실 부분이 증축됐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1994년 일본에서도 건조된 뒤 한 달 만에 개조해 무게가 589톤이 늘었던 만큼 두 차례 개조를 거치면서 당초 5997톤이던 선박이 6825톤으로 828톤이나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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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