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경륜·연구실적 갖춘 학자를 배제하는 ‘문화재위원회’
[정양모 교수의 '문화재 산책'] 경륜·연구실적 갖춘 학자를 배제하는 ‘문화재위원회’
  • 조아라 기자
  • 입력 2014-03-31 14:51
  • 승인 2014.03.31 14:51
  • 호수 1039
  • 6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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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문화재를 경시하는 당국자들

문화재관리국 시절 문화재위원회는 사적분과, 동산문화재분과, 무형문화재분과, 건축문화재분과, 자연문화유산분과 등 5~6개 분과로 구성됐다. 위원수도 각 분과마다 8~9명 정도다. 분과별 상임 비상임 전문위원도 10여 명씩 있었다. 문화재청으로 승격한 것은 노무현 정권 때부터다. 문화재청이 되면서 청의 규모도 커지고 문화재위원회의 규모도 커졌다. 분과수도 10여 개나 됐고 위원수도 10명 이상, 전문위원도 20여 명씩 됐다. 각 분과가 갈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분과가 생겨나는 등 위원회의 활동범위도 매우 커졌다.

위원회 분과가 늘어나고 위원수가 많아지면서 문화재와 거의 관계 없는 젊은 운동권출신 위원이 임명됐다. 또 마음에 안 맞는 위원과 바른말을 하고 잘못된 것을 꼼꼼하게 지적하는 위원 등은 연령이 많다는 이유로 제외됐다. 정치성향이 같은 사람끼리 분과 위원이 되거나 문화재청장과 친소관계에 따라 기존 위원들이 연임된 경우도 생겼다. 여러 개 분과를 겸직해 임명되는 사람도 있었다.

원래 각 분과위원장과 전체위원장은 문화재위원 간 호선으로 선임된다. 하지만 청으로 승격된 후에는 청와대와 청장의 관계가 긴밀해져 분과위원장과 전체위원장도 거의 청장의 절묘한 전횡으로 형식적으로만 선출됐다. 문화재관리국 시절엔 문화재 위원 인선을 국장과 장 차관 실장이 했다. 문화재청장 시절에는 청장 주도하에 이루어지되 청와대와 정치권의 입김이 커졌다. 문화재위원 구성과 인선은 어떻게 하면 보다 합리적이고 객관성이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문화재위원회는 위원과 전문위원의 인선이 매우 중요하다. 각 분야에서 정말 최고의 실력과 경험을 겸비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인재만이 추천 임명돼야 한다. 문화재청과 권력기관이 친소관계에 의해 이뤄진다면 문화재 정책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인문학은 과학과 달라서 오랜 연구경험과 경륜이 필요하다.

그런데 위원회에 최고의 연구업적과 경륜이 있는 사람은 거의 제외되고 연구업적은 있지만 경험과 경륜이 부족한 인재가 대부분이라면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정말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큰 뜻을 저버리고 그저 우리는 문화재를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해 문화재청을 두고 또 문화재위원회를 운영한다는 전시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간에 수많은 문화재가 훼손되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던 것도 그 증좌의 하나이다. 전국각지의 지정유적과 지정문화재조차도 수시로 훼손 파괴되고 있다. 개간·개발·도굴·자연재해·방화·부실표구 등 보존처리의 부실, 취급주의, 도난, 불법해외유출, 불법약탈 유입 등으로 인한 문화재 파손 및 훼손이 수없이 발생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훼손 멸실의 예를 몇 가지만 들겠다. 우선 국보급 문화재인 화순 쌍봉사 대웅전 화재가 있다. 이 대웅전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목탑식으로 된 너무나 아름다운 건물이지만 화재로 멸실됐다. 금산사 대웅전 화재, 남대문 화재, 불국사 석가탑 도굴미수와 그에 이은 파손, 양양 낙산사의 대화재 등 수 도 없다.

이들 문화재의 훼손은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는데 왜 못했을까. 이에 당국자가 이렇게 답했다. “새로 지으면 되고 고치면 됩니다. 몇 달이면 이전 건물보다 더 좋게 새로 만들 수 있습니다” 라고 했다. 이것은 대답이 아니다. 문화재를 매우 경시하고 무시하는 태도다.

건축정신과 세밀한 대목과 소목의 솜씨, 불가사의한 내부구조는 차치하더라도 쌍봉사 대웅전의 겉모습이라도 과연 제대로 복원됐을까. 양양 낙산사의 그리도 아름다운 경관이 십분의 일이라도 원형대로 복원됐을까. 절대로 아니다. 타서 녹아버린 동종, 터지고 깨진 석탑과 대웅전, 타서 없어진 기타 문화재를 되살릴 수 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하고 깨닫고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시일이 많이 걸리더라도 우선은 보존 대책을 세워야 한다. 또 그 대책을 수없이 보완해 국가문화재 보존을 위한 백년대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 주체는 문화재청이고 문화재위원회가 돼야 한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 <한국미술발전연구소>

▲ 채제공 초상(73세진으로 추정)

채제공은 영·정조대 국가에 큰 공헌을 한 문신이다. 그는 정조대에 탕평책을 적극 추진하고 정치·경제·사회·군사·행정·법무·교육·외교·예교·토목·건축 등 여러 관직의 실무와 수장을 두루 겸하고 삼정승에까지 이른 관료이자 큰 학자다. 그의 초상은 시복본 금관조복본 흑단령포본(대례복본)과 유지초본 삼점이 함께 있어 조선후기 초상화연구의 매우 귀한 자료이다.

이 흑단령포본은 화사 이명기의 시복본(1792년작)과 같이 이명기의 작으로 추정된다. 좌안팔분 전신좌상으로 사모에 대례복을 입고 쌍학흉배에 서띠를 두르고 화문석위에 교의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얼굴과 옷 주름의 음영처리로 입체감을 표현해 서양화기법도 눈에 뜨이는 걸작이다. 중후한 노 재상의 풍모를 갖추었으며 예리한 두 눈의 표현이 그의 재능과 능력과 예리한 통찰력을 보는 듯하다.

 

▲ <한국미술발전연구소>

▲ 우암 송시열 선생 74세진

우암의 초상화는 십 여종이 전해 내려오지만 그중에 화격이 가장 높은 것은 바로 여기 소개하는 74세진과 정조 2년에 이모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이다.

우암은 명나라를 하늘같이 섬기면서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요 정치가여서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그를 숭앙하는 유학자가 많았다. 그의 초상은 각지의 서원과 영당에 모셔졌지만 아쉽게도 원본이 없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모두 후의 이모본이다.

이 초상은 김창업이 그렸다. 초상의 우상에는 김창협의 찬문이 있다. 좌상에는 권상하의 찬문이 있다. 그 아래에는 채지홍이 썼다는 발문 등의 문구가 있다.

상당히 과장됐지만 당당한 풍채를 지닌 이 초상의 안면은 갖은 풍상을 의연히 이겨낸 노학자의 모습이 담겨 있다. 또 노회한 노 정객의 노송과 같은 표일한 모습과 그 얼굴의 깊은 주름, 수풀 같은 눈썹과 성성한 흰 수염을 그대로 화폭에 옮겼다.

이 작품은 좌안칠분상으로 후대의 이모본이기는 하나 우암의 드높은 지략과 기상을 알 수 있는 명작이다.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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