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혐의’ 유우성 사건 검찰 공소장 분석
‘간첩 혐의’ 유우성 사건 검찰 공소장 분석
  • 오두환 기자
  • 입력 2014-03-24 11:08
  • 승인 2014.03.24 11:08
  • 호수 1038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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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입북·정보전달 과정·북한 보위부 책임자까지 상세히 적혀 있어

검찰, 있는 증거도 제대로 분석 못해
시간 없는데 새로운 증거는 어떻게 찾나

유우성씨가 지난 12일 증거위조 의혹 수사 관련 참고인 신분으로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검찰청에 출석하고 있다. <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지난해 2월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탈북자 출신의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를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은 유씨가 처음에는 간첩이 아니었지만 이후 북한 보위부에 회유돼 남한에서 간첩활동을 해왔다고 밝혔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입수한 탈북자 정보도 북한으로 빼돌린 혐의도 받았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해 8월 22일 1심 재판에서 유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국정원을 통해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유죄증거 가운데 일부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년이 지난 지금 당시 유죄증거 조작의혹은 점점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 유력한 증거였던 유씨의 2006년 5~6월 북·중 출·입경기록이 위조로 기정사실화 되면서 나머지 밀입북 혐의에 대한 수사도 부실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일요서울]에서는 단독 입수한 검찰의 공소장을 분석해 봤다.

“피고인은 준의사로 재직하면서 노임 및 배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지본적인 생활유지에 어려움을 겪자, 중국을 오가면서 밀수꾼과 연계하여 북한산 도자기·송이버섯·냉동노루 등을 중국에 내다파는 밀무역에 종사하였고, 또한 비교적 북한의 통제가 심하지 않은 재북 화교 신분을 이용하여 국내 거주 탈북자들과 그들의 재북 가족과의 전화통화 및 대북송금을 주선해 주고 중개 수수료를 받는 일에 종사하였다”
이 글은 검찰이 법원에 제시한 공소장에 써 있는 유씨의 경력 내용이다. 공소사실이 적혀있는 피고인의 경력페이지에는 유씨의 출생지는 물론 학력, 탈북방법, 입북방법들이 자세하게 적혀있다.

대북송금 브로커 의혹

공소장에 따르면 2004년 4월 25일 국내에 입국한 유씨는 재북화교 신분을 숨기고 ‘유광일’이라는 이름의 북한인이라고 주장해 탈북자로 정착했다. 하나원을 거쳐 대전에 정착한 뒤 2005년 3월 대구가톨릭대 약학부에 입학했다가 휴학을 했다.

이후 복권방, 일용노무자, 보따리상을 하다 2005년 처음으로 같은 탈북자 출신 최영미씨의 부탁으로 북한에 있는 최씨의 가족에게 한국 돈 150만 원 상당을 전달해줬다. 유씨는 이 일을 계기로 중국에 있는 외당숙 국상걸과 북한에 있는 아버지 유진룡과 연계해 재북가족에게 금품을 전달하고 중개수수료를 받는 불법 대북송금 브로커 활동을 시작했다.

유씨는 ‘프로돈’이라고 불리는 불법 대북송금 브로커 활동을 통해 2007년 7월부터 2009년 8월까지 총 1659회에 걸쳐 약 26억 원 가량을 북한으로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유씨가 챙긴 수수료는 30%인 약 4억 원 정도로 알려졌다. 유씨는 이미 법원에서 2010년 기소유예처분을 받았었다. 하지만 최근 ‘간첩 혐의 증거 조작’ 사건이 불거지면서 검찰에서는 다시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수사재개를 검토하고 있다.

밀입북·공작원 활동 의혹

유씨가 서울시청 복지정책과 생활보장팀 계약직으로 재직한 것은 2011년 6월 9일부터다. 2011년 2월 연세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후 곧장 취직을 했고 2012년 3월부터는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입학해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유씨는 연세대 재학시절부터 북한 출신 대학생으로 구성된 남북한 대학생 모임 ‘통일한마당’, 탈북자 출신 대학생 모임 ‘비전NK’ 등에서 활동해 왔다.

공소장에 따르면 유씨는 2005년 이후 2006년 모친인 조인화의 사망으로 두번째 밀입북을 시도했다. 중국에 있는 외삼촌 조보국 부부와 함께 브로커 조하여에게 북한통행증을 부탁했고 이들 부부와 아들의 호구증을 근거로 통행증을 발급 받기로 모의했다. 이후 유씨는 북한에 있는 아버지와 통화해 보위부에 조치를 취하기로 논의했다.

유씨는 이런 과정을 통해 중국인 ‘유가강’ 명의의 북한통행증을 발급받았다. 결국 같은 해 5월 23일 밀입북해 함북 회령시 성천동에 있는 피고인의 집에서 모친의 5일장을 치르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유씨는 5월 하순 두만강을 도강해 북한으로 다시 들어갔다. 결국 입북 이틀 후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됐고 부친 유진룡, 여동생 유가려와 함께 회령시 보위부 조사실에 수용됐다. 이곳에서 유씨는 보위부 직원들에게 탈북사실과 북한에 다시 들어온 경위, 간첩활동 등에 대해 자백했다.

공소장에는 이곳에서 7일간의 조사 후 3일에 걸쳐 유씨가 회령시보위부 사무실에서 대남사업교육 및 정신교육을 받고 한국 침투 후 탈북자 신원자료 수집 등 공작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적혀 있다. 검찰은 유씨에게 공작원 활동을 제안한 사람이 회령시보위부 반탐과장 김철호라고 구체적으로 적었다.

유씨는 2006년 6월 초 회령세관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갔고 같은 달 22일 중국북경공항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했다. 이후 유씨는 국상걸을 통해 2006년 8월 회령시보위부에서 노트북 3대를 사달라는 연락을 받고 1대를 국내에서 사서 국씨에게 국제특급우편으로 발송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세 번째 밀입북은 2007년 8월에 이뤄졌다. 유씨는 연세대학교와 북경사범대학교 간 교환학생 자격을 얻은 후 다른 학생들에 앞서 7월 27일 인천항에서 국제여객선을 타고 28일 천진항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내다 유씨는 8월 중순경 두 번째 밀입북 경로와 같은 방식으로 북한으로 들어갔다. 이후 유씨는 두 차례 더 북한에 밀입북했다.

탈북자 정보 수집 의혹

검찰은 유씨가 한국에서 2007년부터 탈북자 정보를 수집해 북한에 전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공소장에 따르면 유씨는 연세대학교 중문학과 3학년에 편입한 2007년경부터 연세대학교 내 탈북자 출신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동아리 ‘연세대 통일한마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이후 2008년경 ‘새롭고 하나 된 조국을 위한 모임’ 회원에 가입했고 탈북자 아카데미 활동을 왕성하게 벌여 나가며 소속 탈북자 신원정보를 확보했다.

또 ‘영한우리’에 가입해 90여명에 달하는 회원들의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했으며 2009년 8월 24일에는 우양재단 노모씨로부터 탈북자 출신 안보강사인 평화강사 18명의 신원정보가 담긴 명단을 입수했다. 같은해 9월 21일 경에는 북한인권시민연합으로부터 ‘2009 UN 보고서를 위한 정치범, 고문, 여성, 아동 증언’ 자료를 입수하여 26명의 탈북자 신원정보를 보관했다.

이후 유씨는 길림성 연길시 소재 연변국제무역빌딩 인근 PC방에 있던 여동생과 QQ메신저로 접속 파일을 USB에 저장하도록 한 뒤 전송된 파일은 삭제하게 했다. 유씨의 여동생은 이후 아버지를 통해 회령시보위부 반탐부부장 김철호에게 연락한 후 오빠가 밀입북했던 루트대로 북한에 들어가 김철호에게 USB를 전달했다고 적었다.

공소장을 살펴보면 유씨의 여동생 유가려씨는 2011년 5월 중순경 중국비자를 발급받고 김철호로부터 “중국에 가서 오빠에게 연락하여 자료를 받아오라”는 지시를 받고서 회령교두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왔다. 이후 유씨는 추가로 동생을 통해 탈북자 정보를 북한의 김철호에게 넘겼다.

유씨는 2011년 6월 9일 서울시청 복지정책과 생활보장팀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되면서 얻은 60명의 탈북자 신원정보도 동생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검찰의 공소장을 살펴보면 유씨는 2012년 1월 23일 유진룡과 회령 집에 머물며 회령시보위부 사무실을 방문해 반탐부부장과 회합했고 추가지령과 함께 표창을 받았다고 적혀있다.

동생 밀입국 의혹

공소장에는 유씨가 2012년 10월 26일 고모 유진미의 집에서 29일까지 환갑잔치를 치르는 동안 동생에게 한국 침투에 앞서 “제주도 공항에서 탈북자라고 말하면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게 된다. 국정원에서 조사 받을 때 복잡하게 이야기하지 말라. 오빠는 2006년 5월경 어머니 돌아가실 때 회령에 들어온 이후 다시 온 적이 없고 오빠가 보위부 일을 한다는 것은 절대로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국가정보원 합동신문조사 대응요령에 대해 알려줬다고 적혀있다.

새로운 증거가 필요해

이후 유가려씨는 2012년 10월 30일 중국 상해 푸동공항을 출발해 같은 날 오후 3시 제주공항에 도착해 한국에 잠입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같이 귀국했던 유씨는 입국심사대로 향하는 유가려씨로부터 중국여권과 지갑을 회수하고 입국심사대에서 탈북자 ‘유광옥’으로 주장하라고 일러준 다음 여권 소지여부에 대해서는 위조여권으로 입국한 후 여권은 쓰레기통에 버린 것으로 모의했다고 적혀있다.

유씨는 한국 입국 뒤 2004년 8월 북한이탈주민으로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돼 탈북자 정착금, 생계급여, 교육지원금 등의 명목으로 총 25,653,170만원을 지급받았다. 검찰은 이 또한 문제삼고 있다. 순수 탈북자가 아닌 화교출신이 신분을 속였으니 문제라는 것이다.

애초 검찰은 1심 무죄 판결 이후 2006년 5~6월 출입경기록을 추가로 제출했다. 하지만 지금 출입경기록은 위조여부 문제로 사실상 쓸모없는 증거가 돼 버렸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간첩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으니 검찰은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법조계 관계자는 “검찰이 유씨의 간첩 혐의에 대해 추가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 사실상 힘들어졌다. 이렇게 된다면 공소유지가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공소유지 불가능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freeore@ilyoseoul.co.kr
 

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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