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윤영달·박성경 등 모두 한마음 한뜻?
경영권 승계 사전포석일까…연봉 공개도 부담
[일요서울 | 강휘호 기자] 재계에도 징크스가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업이 중요한 공사를 결정할 때, 논리와 계산 이외의 요소는 조금도 반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하고 철저하게 분석한 뒤 과학적인 근거에만 입각해 일을 진행하지 않겠냐는 설명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도 때론 미신 아닌 미신에 시달린다. 일부 재계 관계자들은 “가끔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길한 징조들이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거칠 것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징크스가 따라 다닐까. [일요서울]이 알아봤다.

일반적으로 기업 내부에는 주주총회, 이사회, 감사 등 3개의 기관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이사회는 주주총회소집과 대표이사 선임권, 국내외 주요투자, 채용 등 회사 경영 전반을 의결하는 권한을 갖는다. 그리고 그 구성원을 등기이사라 지칭한다.
그런데 지난해를 기점으로 재벌 총수를 비롯한 오너일가들이 등기이사직에서 사퇴하는 모습이 빈번해지고 있다. 더욱이 그야말로 그룹 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미련 없이 자리를 내놓는 모습은 매우 의아하게만 보인다.
실제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해 그룹 대표 계열사인 롯데쇼핑 대표이사에서 물러났고,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신세계와 이마트의 등기이사직을 내려놨다. 또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현대제철 등기이사직을 사임했고,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한화, 한화케미칼의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이 외에도 일일이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담철곤 오리온 회장, 이화경 오리온 부회장,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 박성경 이랜드그룹 부회장 등이 그 주인공이다. 아울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아예 등기이사에 등재되지 않고 있다.
재계의 사정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일종의 마가 꼈다거나 벗어날 수 없는 징크스에 휘말린 것 아니냐는 흉흉한 소문이 무겁게 다가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중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이 자리를 뜬 인사들이 대부분일뿐더러 기업의 사건사고와 시기가 겹치는 인사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재벌家의 숨은 욕심
그동안 대부분 총수들이 등기이사 사퇴를 발표하면서 책임경영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 상징적인 의미의 이사직 사퇴 등 비슷한 맥락의 공식 견해를 밝혔다. 또 일각에서는 자신의 그룹을 둘러싼 논란이 일어 이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실제는 이와 다소 다른 이유들이 숨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먼저 재계의 일부에선 책임 경영 ‘회피’로 인한 인사이동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즉, 총수들이 법적 책임에 휘말리는 걸 피하기 위해 등기이사직을 내놓은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동시에 갑을논란, 골목상권 침해 등으로 유통 및 식품 기업에 대한 규제가 갈수록 강화되는 상황에서 연봉 공개 의무까지 더해짐에 따라 법적 책임 등을 피하려는 총수들의 수작이라는 비판까지 일고 있다.
금융위원회가 내놓은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법에 따르면 올해부터 연봉 5억 원이 넘는 상장사 등기이사들은 보수 공개를 의무화해야 한다. 이를 눈치 보던 총수들이 법 시행을 앞두고 개별 보수 공개를 하지 않으려 꼼수를 부렸다는 지적이다.
더불어 전문경영인에게 등기이사직을 떠넘겨도 회사 지배력은 크게 훼손되지 않기 때문에 미련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 등기이사가 아닌 오너 일가는 회사경영과 관련된 주요 결정에 참여하는 가운데 기업 경영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 보수도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은 경영권 승계다. 등기이사 자리는 재계 오너 경영권 승계의 마지막 관문으로 통한다. 기존 총수들이 차지하고 있던 등기 이사 자리를 2세 또는 3세 경영인에게 물려주기 위한 사전 포석 단계로 등기이사 사퇴를 진행 한다는 설명이다.
그 일례로는 이건희 삼성 회장, 정몽구 현대차 회장 등이 있다. 이들이 주요 계열사의 등기이사직을 사퇴할 때면 여지없이 후계 경영 승계가 가속화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돌곤 했다.
다만 재미있는 부분은 후계 자리를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2·3세 오너들 사이에서 등기이사 기피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분위기다.
재계 3세 부회장 시대를 연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그랬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그랬다. 경영권 승계에 대한 외부시선 부담이란 진단부터 앞서 언급된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과 맥이 닿고 있다.
한마디로 경영권 승계를 받아야 하는 재계 2·3세 입장에서 자칫 경영권 승계구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감수하고 등기이사직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을 두고 시민단체와 재계의 시선은 다소 엇갈리고 있다. 등기이사직 사퇴 자체가 책임회피라는 주장과 오너로서의 책임은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한 경제시민단체 관계자는 “등기이사직은 집단소송제 등과 얽혀 많은 책임을 짊어진 자리다. 법적 책임을 빠져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떳떳한 경영을 하기만 한다면 경영권 승계 차원에서라도 등기이사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반대로 재계의 한 관계자는 “등기이사를 포기한다는 자체가 책임회피라는 말에 동의하지 못한다”며 “경영 상 선택과 집중의 문제일 뿐, 오너로서 사회적 책임을 진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한편 이번 달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법이 시행되고, 재계를 둘러싼 사건이 또 다시 발생한다면 그때는 양측의 주장 중 누구의 말이 맞는지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단순한 우연에 따른 징크스일지 책임론과 재벌들의 계산법이 깔려 있던 것인지도 이목이 집중된다.
hwihols@ilyoseoul.co.kr
강휘호 기자 hwihol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