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전남·광주 등에서 950여명 활동
부동산·벤처사업·주식투자 등으로 자금 모아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2012년 2월 서울 강남의 한 예식장에서 조폭들의 ‘전쟁’이 일어날 뻔 했다. 사건의 발단은 결혼식에 참석한 서울 조폭이 호남에 근거지를 둔 조폭에게 “니들 요즘 너무 설쳐”라는 말을 내뱉으며 시작됐다. 이 소리를 들은 호남조폭은 “4조 맛도 모르는 놈들이!”라며 대꾸했다. 당시 이 한마디에 서울 조폭들이 불끈해 예식장에 있던 조직원들을 소집해 호남 조폭을 집단 폭행했다. 얼마 뒤 호남 조폭들이 보복하겠다며 각종 ‘연장’을 챙겨 집단 상경하기에 이르렀다. 다행히 ‘전쟁’까지 가는 불상사는 없었다.
2010년을 전후해서 서울, 인천 등지에서는 지방조폭들과 서울조폭들의 잦은 다툼이 일었다. 과거와 달리 서울 조폭들의 세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지방조폭들은 이틈을 타 서울로의 상경을 시도하고 있다.
지방조폭이 가장 많은 지역은 호남지역이다. 호남지역의 조폭들은 부산지역 조폭들과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조폭으로는 전북의 나이트파, 월드컵파, 백악관파, 그랜드파와 전남의 수노아파, 서산파, 백호파 등 총 24개 파다. 광주의 8개 파를 포함하면 30개 파가 넘는다. 조직원수는 약 950여명에 이른다.
범죄와의 전쟁 이후 기업화 된 조폭
월드컵파와 나이트파는 전주지역 1~2위를 다투는 조직이다. 세력이 큰 만큼 타 조직과 잦은 마찰로 경찰이 주시하고 있다.
월드컵파는 1983년 폭력써클로 시작했다. 당시 전주시 중앙동 월드컵나이트클럽을 기점으로 조직을 구성해 지금의 이름이 붙었다. 나이트파는 전주월드컵파에 대항하기 위해 1982년 결성됐다.
전주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이들 조직들은 1990년대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기 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검은색 정장에 고급 세단을 타고 다녔다. 조직 자금을 만들기 위해 조직원들은 “업소를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구역에 있는 업소를 돌며 업주로부터 월정금을 받았고, 자신들의 구역을 침범하는 타 조직은 거침없이 응징했다.
특히 조직 가운데 월드컵파와 나이트파의 세력다툼은 치열했고 이로 인해 도심 한복판에서 유혈 난투극이 끊이질 않았다.
전주 한성여관 살인사건, 명동여관 살인사건 등 이들의 세력다툼은 1984년까지 이어지다가 전주백화점을 중심으로 유흥가를 양분하면서 세력균형이 이뤄졌다.
하지만 지방은 한계가 있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둘 지역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전북 조폭들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인구와 지역세 등 모든 면에서 타 지역에 비해 열악했고 나이트와 호텔, 주점 등 돈이 될 만 한 시설도 손에 꼽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울을 제2의 고향이자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이른바 ‘주먹’과 ‘깡다구’라는 무기를 앞세우며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서서히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또 기틀을 마련한 이들은 조직의 세를 넓히기 위해 '싸움 좀 한다'는 고향후배들을 하나 둘 데려왔다.
그 결과 규모가 큰 나이트와 룸 살롱, 오락실 등을 인수하거나 지분을 갖게 됐고, 사업도 유흥업에서 건설업 등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조폭의 기업화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의 결과였다.
1990년대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대대적인 조폭 소탕에 나서자 지역 조폭들은 활동 영역에 변화를 줬다.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유흥업소를 운영하거나 관리했던 기존 활동에서 벗어나 부동산과 금융시장으로 영역을 넓혔다.
‘보스'와 ‘형님'이라 불렸던 조직 간부급들은 조직원들에게 ‘회장님' ‘이사님' 등으로 불렸고 대외적으로는 ‘00건설 대표', ‘00벤처기업 사장' 등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그러나 기업형 폭력조직으로 업그레이드됐을 뿐, 사업가로 행세한 이들의 불법행위는 지속됐다. 회사자금 횡령, 주가조작, 사채 등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조폭 조직은 변해도 보복 방법은 변하지 않아
기업화된 나이트파는 주식에도 손을 댔다. 2008년 1월 행동대장 윤모씨와 행동대원 강모씨는 시세조정으로 주가가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코스닥 회사 정보를 입수한 뒤 관련 회사의 주식을 매입했으나 예상과 달리 손실을 봤다.
이후 이들은 손실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정보제공자를 납치, 옷을 벗긴 후 창밖으로 떨어트릴 듯한 자세를 취하고, 허벅지를 짓밟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손실을 전액 변상해주지 않자 최초 주식정보를 제공한 일명 ‘작전세력’ 김모씨와 ‘알선책’ 오모씨 등을 집요하게 협박해 결국 1억2000여만 원을 갈취했다.
나이트파는 서울 답십리파와 앙숙관계다. 지난 2010년 10월에 대구의 한 결혼식장에서 답십리파 조직원이 나이트파 조직원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 당시 답십리파 조직원은 “전라도 애들이 서울에 올라와서 너무 설친다”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말은 들은 나이트파 조직원들이 집단 폭행을 가했다.
이후 답십리파는 나이트파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다. 복수는 2011년 6월 4일 서울 강동구 한 웨딩홀 돌잔치 자리였다. 당시 이곳에서는 폭력조직원 자녀의 돌잔치가 열렸는데 이곳에 참여한 나이트파 조직원 한 명을 답십리파 조직원이 폭행해 전치 12주 중상을 입혔다. 2010년 사건의 보복이었다.
그러자 같은 날 밤 전주 나이트파 조직원들이 다시 보복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답십리파 조직원들도 비상연락을 통해 조직원 소집명령을 내렸고 평소 친분이 있던 서울지역 다른 폭력단체 조직원들까지 불러 모았다.
이들은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의 한 호텔 근처에 모여 회칼, 야구방망이 등으로 무장하고 나이트파와 싸움을 위해 대치했다. 다행히 경찰이 정보를 입수하고 경찰차 15대를 출동시켜 해산시켰다.
이 밖에 지난 2000년에는 벤처사업과 오락실 등을 운영하면서 각종 이권에 개입해 폭력을 행사한 익산 배차장파와 군산 그랜드파 조직원들이 검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또 익산 구시장파 조직원은 연예인을 협박해 수억 원을 갈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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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