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아원, 중학교 중퇴, 접시닦이에서 경찰청장까지
충북지사 출마說, “경륜·행정경험 사회에 쓰고 싶어”
대한민국 경찰은 외롭고 고군분투하는 직업
[일요서울 | 홍준철 기자] 고아원 생활, 중학교 중퇴, 접시닦이 소년에서 9급 공무원 합격, 이후 한전 합격, 다시 나와 행정고시 합격해 상공부 근무, 재차 경찰직으로 전직해 경찰청장까지, 이렇게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바로 김기용 전 경찰청장(58)이다. 지금은 청소년 육성사업회 고문으로 비행청소년을 선도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 2월20일에는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는 출판기념회를 개최해 책 판매대금 1000만 원을 청소년육성회에 쾌척하는 등 청소년 육성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이런 김 전 청장이 주목받게 된 것은 충북지사 출마설이 흘러나오면서부터다. 김 전 청장은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아직 반반이다”고 전제하면서도 “출마를 하면 새누리당으로 경선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내가 가진 경륜과 행정 경험 등 내 역량을 이 사회를 위해 쓰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다”고 출마를 배제하지 않았다. 또한 김 전 청장은 힘들었던 삶의 전환점에서 늘 ‘더 큰 꿈’을 꾸고 또 성공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에게 “스스로 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도 일으켜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2월26일 청소년 육성사업회 사무실에서 한 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 전문이다.
▲ 충북 도지사 출마설이 나오고 있다.
아직 결정을 못했다. 생각할 일이 많다. 출마를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신중해야 한다. 조만간 결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마하면 새누리당으로 한다. 경선도 마다하지 않겠다. 출마를 하겠다 생각을 가진 것은 경륜과 행정경험의 내 역량을 이 사회를 위해서 쓰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하는 일인 청소년 육성 사업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사나 다른 관직을 통해서 경륜을 쓰고 싶다. 지금까지 내 삶이 들이대는 삶이고 맨땅에 헤딩해 혼자 결심하고 책임지면 됐다. 그러나 지사나 선출직은 가족 친척 친구 다 같이 흥망이 물려 있다. 심사숙고해야 한다. 내 생각만 해선 안된다. 하고 싶지만 잘못되면 다른 사람까지 고생한다. 출마여부는 반반이다.
▲ 한국청소년 육성회에서 하는 일은.
불우한 청소년을 돕는 일이다. 장학사업과 잘못된 길을 가는 학생들에 대한 선도 사업 두 줄기가 큰 사업이다. 선도 사업을 주로 맡았는데 대안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이나 강연을 하고 있다. 범죄소년을 대상으로 사랑의 교실을 운영해 교육을 시키는 데 특강을 맡고 있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살아라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자서전을 쓴 계기가 이번에 제 경험을 토대로 강의를 하면 울림을 받는 것 같다. 내 얘기가 잘못된 길을 가는 친구들에게 자극과 도움을 주겠다는 취지로 자선전을 썼다.
▲ 자선전을 보면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어떠했는지.
곤궁했고 궁핍했다. 학교를 제대로 못 다녔고 그래서 접시도 닦고 신문도 팔고 공장에도 다녔다. 제가 중학교 못 다녔다. 1학년 마치고 중퇴했다. 2, 3학년 때 직장을 전전했다. 접시 닦으면서 당시 16살 때 월 4000원 정도 받았다.
▲ 중학교 중퇴 이후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전수학교(중학교 및 고등학교 과정 교육기관)를 다녔지만 오래 다니지 못했다. 학원에서 칠판을 닦으면서 고학을 했다. 이른 바 기도였다. 검정고시, 대학교 예비고사를 보고 대학교 입시를 봤다. 하지만 입시에 실패해 9급 공무원의 길을 걷게 됐다.
▲ 9급 공무원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데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친구가 있었다. 둘이 함께 봤다. 그 친구는 떨어지고 나만 됐다. 인생이 그렇다. 2~3년 근무하다가 어린 생각에 ‘이거는 아니다’ 미관말직을 지키려고 공부한 게 아니다. 큰 뜻을 펼치기 위해선 성공을 해야 했다. 그 후 7급 공무원 공부를 하다 퇴직금이 다 떨어졌다. 독서실 비용도 없어서 우연찮게 신문에 난 한전 입사 공고를 보고 들어갔다. 만2년 근무를 했는데 거기서도 ‘여기서 이렇게 인생을 종치는 것은 아니다. 뭔가 큰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한전내에서도 상승의 기회가 차단되어 있었다. 검정고시, 방통대 다니니 학연, 지연이 없어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고시공부를 3년 6개월간 해 행정고시에 패스했다. 상공부에 들어가 5년을 근무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경제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생각으로 사무관으로서 일했다. 하지만 구체성이 없었다. WTO협상팀에도 들어갔고 중소기업기술개발계획에 참여했는데 이 사회에 기여하고 이바지하는 데 막연했다. 실질적으로 국민들에게 피부에 와닿고 도움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 경찰 입문 계기는 무엇인가.
과거에 경찰과 인연이 있다. 강도사건을 접한 경험과 내 동생이 연루돼서 소년원에 간 경험도 있다. 경찰로 가서 일을 잘하면 억울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구나 해서 전직을 결정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자, 최선을 다해보고 안되면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 경찰로 옮겼다. 좀 지르는 성격도 한몫했다.
▲ 이후 1992년 경찰계에 투신해 충남 경찰청장, 경찰청장까지 올랐다. 고속승진인가.
20년 동안 총경, 경감, 청장 너무 빠르거나 느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순경에서 경정 가는데 20~30년 걸린다. 경무관 치안감 2년 반 했다. 빠른 것은 아니다. 치안감에서 경찰청장 가는데 초고속 승진했다. 2년 만에 치안정감 경찰청 차장 3개월 만에 경찰청장이 된 것은 유례가 없다.
▲ 경찰직에 있으면서 중점을 둔 게 있다면.
경찰청장의 미션은 그 당시 처한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내가 청장이 됐을 때는 오원춘 조선족 토막 살인사건으로 경찰이 전국민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던 때였다. 또한 강남 모 경찰서에서 부패고리가 발견돼 경찰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시기였다. 신뢰 회복이 가장 큰 숙제였다. 또한 경찰이 국민들로부터 미움을 받으니 추락한 사기를 끌어올려야 했다. 과거에는 경찰이 감찰을 통해 관리감독을 강화해 직원들이 일을 제대로 하게 했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났다. 경찰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고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교육을 중시했다. 국민들에게 헌신 봉사하는 경찰,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의미에서 역점을 둔 사업은 제대로 된 각자의 역량을 강화하고 열의를 높여서 사명감을 진작시키면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치안서비스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초심찾기, 중심잡기 운동을 벌였다. 직제와 예산도 편성해서 경찰교육대계를 세우고자 하는 포부가 있었다. 하지만 제가 중도에 사퇴해서 절반의 성공으로 남게 됐다.

▲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오원춘 토막 살인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사건으로 경찰이 무기력하고 무능하다는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됐다. 오원춘 사건이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줘 결국 경찰 총수가 옷을 벗게 됐다. 보통 1년에 살인사건이 4~5백건이 나는데 하나의 살인사건으로 총수가 옷을 벗은 것은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왜냐면 피해자가 28살된 여성인데 오원춘이라는 사이코패스한테 시내에서 10시에 납치됐다. 근데 여자가 방에 감금된 상태에서 오씨가 화장실 간 사이 112로 전화를 했는데 경찰들이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 어디냐 묻고 여자가 답했는데 다시 물어보고 경찰이 위치를 재차 얘기해달라 했다. 그런데경찰이 위치추적권이 없어 위치 추적을 못했다. 결국 형사들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 탐문을 했는데 신고장소를 못찾았다. 그 다음날 찾았는데 신고자는 이미 죽었다. 이 여자가 경찰에게 구조되기를 기대하면서 휴대폰을 켜놓고 있었는데 결국 폭행 당한 후 죽임을 당했다.
또 시신은 250갈래로 찢어놓고 인육을 팔려고 했다는 보도가 나와서 국민들로부터 공분을 샀다. 경찰이 무엇하는 조직이냐, 선량한 유부녀가 살려달라고 구조요청을 했는데 그것을 구조도 못하고 10만경찰이 뭘했느냐고 비판을 받았다. 결국 경찰이 위치추적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특이 이 사건은 비리가 아닌 무능이고 열의 문제였다. 그래서 112 신고 시스템도 바뀌고 인력도 충원되고 여러가지 개선이 됐다.
두 번째는 국정원 대선개입 선거법 위반사건이 기억에 남는다. 시민단체로부터 고발이 돼 검찰 가서 조사를 받았다. 당연히 무혐의 처리됐다. 김용판 전 서울지방청장은 기소됐고 전 기소되지 않아 사건이 종결됐다. 어쨌든 경찰이 그런 일로 경찰 총수가 조사받은 것 유쾌하지도 않거니와…(휴대폰 문자 오면서 대화가 끊어짐)
▲ 이 사건으로 옷을 벗은 것 아니냐.
이것 때문에 옷을 벗은 것은 아니다. 경찰을 그만둔 이유에 대해서 이 자리에서 밝힐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가 잘못해서 그만둔 게 아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에 자리에 물러났다. 제가 하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이 그 이후에도 1년 동안 정국을 소란스럽게 했는데 저로선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수도 없이 회의 때 강조했고 수도 없이 지시가 내려갔다.
서울경찰청도 선거개입을 위해 뭔가를 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1심 재판에서 무죄가 나왔다. 2심 재판중으로 재판부에서 판단할 문제지만 저는 당시 경찰청장으로 경찰이 선거에 개입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거나 해야될 일을 안 하거나 그런 일은 없다고 본다.
▲ 대한민국에서 경찰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나라에서 직업으로써 경찰은 힘들다. 경직되고 긴장된 삶의 연속이다. 24시간 동안 경찰 간부는 퇴근해도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관할구역에서 분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술을 먹어도 긴장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또한 직무 수행중에도 국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못 받고 있다. 그 부분에서 외로운 직업이고 고군분투하는 직업군이다. 소방은 불꺼주면 고맙다는 소리는 듣는다.
경찰은 도둑놈 100명이 들어 10명을 잡아도 90명 못잡았다고 원망을 듣는다. 옛말에 한 도둑을 열 명이 못막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국민들로부터 지지와 성원을 못 받아 외롭다. 경찰 조직도 매우 경직돼 있다. 완전히 각개전투다. 경찰은 3교대하면서 같은 부서에 있어도 얼굴보기 힘들다. 조직 내에서도 힘들고 조직 밖에서도 힘들다. 경찰은 힘든 직업이다. 자선전에서 다시 경찰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난 안한다고 썼다.
▲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의 산 증인 같다. 젊은 청년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 좀 해달라.
살아오면서 힘들 때 가졌던 생각 중에 ‘스스로 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도 일으켜주지 않는다’ 고대 로마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에 나와 있는 말이다. 스스로 서려고 노력해야 한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누구에게 기댈 필요가 없다. 스스로 제대로 서면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생긴다. 본인 스스로 넘어지는데 누가 세워주겠느냐 제 이력을 봐라 학연, 혈연, 지연이 변변한 게 없다. 사돈에 팔촌까지 9급 공무원 한 명도 없다.
용감하게 스스로 설 생각을 갖고 살면 옆에서 ‘기특하다’, ‘도와줘야겠다’, ‘다른 사람은 울타리가 있는데 저 사람은 없다’고 해야 도움 줄 사람이 생긴다.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도 내 역량이 아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한테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받았다. 그것을 갚아야겠다. 기회사다리라는 방송통신대, 검정고시 사회에 도움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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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철 기자 mariocap@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