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Ⅰ오두환 기자] 역대 최악의 신용카드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KB국민, 롯데, NH농협 등 카드 3사에 3개월 영업정지 조치가 내려졌다. 하지만 3개월 영업정지 불똥이 텔레마케터들에게 떨어졌다. 카드 3사에 3개월간 영업 조치가 내려짐에 따라 해당 3사의 카드모집인 4천여 명이 오는 5월 16일까지 영업 활동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결국 카드 3사는 텔레마케터의 생계 보장을 위해 고용을 유지하고 평균 급여의 60% 수준을 지급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하지만 대부분 계약직인 텔레마케터들의 생계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JTBC를 통해 ‘매 맞는 텔레마케터’ 등 텔레마케터들의 열악한 처우와 비인격적인 대우 등이 보도되면서 텔레마케터들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월급 300만 원이 하루아침에 ‘수입 0원’
나이 많고 학력 낮아 이직하기도 어려워
지난 16일 JTBC는 ‘전진배의 탐사플러스’를 통해 ‘전화기 뒤에서 매 맞는 텔레마케터’ 편을 방송했다. 방송에는 상식 이하의 대우와 체벌을 받는 텔레마커터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전파를 탔다.
방송에서는 한 사무실에서 텔레마케터로 보이는 여성들이 자신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보여줬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자”라는 말을 하며 스스로 자신의 뺨을 때리는 모습은 보기에 안타까울 정도다.
하지만 화면 속에 등장한 팀장은 강도가 약하다며 더 강하게 때리라고 말했다. 그래도 만족스럽지 않았던지 이 팀장은 텔레마케터의 뺨을 직접 때렸다. 뺨을 맞은 텔레마케터는 맞을 때의 충격으로 온 몸이 휘청거렸다. 하지만 팀장은 “부모답게 굴어. 빨리 오더 해. 한 시간 내로. 파이팅 해. 맞을래?”라며 업무 지시를 했다.
이 영상은 지난해 4월 촬영된 것으로 실제 텔레마케터들이 해당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을 몰래 찍은 것이다. 방송 속의 팀장은 우산대를 이용한 구타도 서슴지 않았다. 팀장의 폭행 모습은 팀원들의 머리와 가슴 등 닥치는 대로 이어졌다.
방송에서 인터뷰를 한 피해자 박모씨는 “이 영상은 팀장이 절 때린 것의 100분의 1도 안 돼요. 방망이로 진짜 사람을 미친 듯이 때리고 사람을 저기서 저기까지 머리가 다 흐트러질 정도로, 쓰러질 정도로. 영상이 다 그거예요. 매출 없으니까 때려. 진짜 그거예요”라며 자신들의 실상을 낱낱이 공개했다.
현재 팀원들은 이 여자 팀장을 고소했고, 이 팀장은 팀원들에 대해 맞고소한 상태다.
이 방송이 전파를 타자 텔레마케터의 처우에 대한 개선 목소리와 관심이 급증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텔레마케터들의 전화를 받거나 직접 통화하는 시민들로서는 방송 내용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텔레마케터 약 42만 명 성과급으로 돈 벌어
텔레마케터는 전화로 고객을 관리하거나 새 고객을 유치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보통 전화를 걸어 영업을 하는 아웃바운드와 걸려오는 전화를 담당하는 인바운드 두 분야로 나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텔레마케터가 약 42만 명 가량된다. 이 가운데 보험, 카드, 통신 분야에서 일하는 텔레마케터는 최소 6만~8만 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대부분은 금융회사에 소속돼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상품 가입을 권유하는 아웃바운드 텔레마케터다.
텔레마케터들은 대부분 외주업체 소속이다. 그러다보니 처우가 좋을 수 없다. 대부분 여성들인 데다가 10명 중 8명 이상이 월 소득 200만 원 미만이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텔레마케터의 70〜80%는 40세 미만에 고졸이나 전문대졸 학력자이다.
전화영업 금지 조치 이후 텔레마케터의 신규 채용이 중단되고 일부 외주업체와 보험대리점들이 이들을 해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텔레마케터 상당수는 지난달 말부터 강제 휴가나 교육에 들어갔다. 금융당국이 금융사에 “텔레마케터 고용을 유지하고 기본급을 지급하라”고 권고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텔레마케터들의 고용을 유지한다 해도 이들은 기본급보다 성과급 비중이 훨씬 크기 때문에 영업(TM)을 제대로 못하면 생계유지가 어렵다는 점이다. 해고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을 하지 않으면 성과급을 못 받기 때문이다.
영업정지 이후 수입 반 토막 ‘생계 막막’
2005년부터 9년 동안 텔레마케팅 업무를 해 온 보험설계사 이모(38)씨는 당장 한 달 급여가 100만 원 이상 깎이게 됐다. 각종 수당과 성과급을 합쳐 한 달 250만 원이었던 급여가 전화영업 금지 이후 기본급인 150만 원 수준이 됐기 때문이다.
유치원에 다니는 두 자녀를 둔 이씨는 당장 유치원비부터 걱정이다. 두 자녀의 유치원비만 해도 한 달에 약 80만 원이 나가는 상태다. 한 달에 200만 원씩 갚아야 하는 전세대출금도 문제다.
이씨의 지인인 최모(53)씨는 대학에 다니는 두 자녀를 둔 가장이다. 이중 둘째는 올해 대학에 들어갔다. 등록금만도 500만 원 가까이 돼 큰 부담이었는데 영업정지 사태를 맞아 어쩔 수 없이 지인에게 돈을 빌렸다. 최씨는 “텔레마케터 직업이 안정적이지 못해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기도 어려웠다. 제2금융권에서 고금리 대출을 추가로 받자니 갚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다행히 지인에게 융통을 했지만 당장 갚을 길이 막막하다.
경력 10년차인 김모(50)씨는 영업 제한 조치가 시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월평균 300만 원 정도의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한 푼도 못 벌고 있다. 병든 노모까지 모시고 있는 상황인 데다 아내도 전업 주부라 걱정이 크다.
김씨는 “기본급도 없는 상태였다. 하루 종일 고객들과 통화하면서 영업을 해 성과를 내야만 수당을 챙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정말 막막하다”며 “회사 동료들 중에는 생계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시간제 알바를 구해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 나도 알바를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규제 완화만으로 고용불안 해결 안 돼
금융당국은 지난달 24일 모든 금융사에 대출, 카드, 보험 등 신규 모집 시 전화, 이메일, SMS 등 비대면 채널을 27일부터 3월 말까지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의 행정지도를 내렸다. 당초 목적은 불법정보 유통시장을 차단하자는데 있었다.
그러나 텔레마케터 고용불안 등 부작용 가능성이 제기됐고, 당국은 영업정지 기간을 단축하기로 한 결정을 지난 4일 발표했다. 텔레마케팅 비중이 높은 보험사부터 순차적으로 영업을 푼다는 계획이다. 고객 동의여부가 확실한 DB를 당국에 제출한 보험사들은 14일부터 영업을 다시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텔레마케터들의 고용불안은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보험사의 경우, 지난 14일부터 텔레마케팅 영업이 재개됐지만 현장에서 업무가 이뤄지는 곳은 거의 없다. 24일부터 영업재개를 앞두고 있는 카드사도 마찬가지다. 영업이 재개된다고 해도 과거와 같은 적극적인 마케팅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메리츠화재, 한화손해보험 등은 영업을 재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아웃바운드 영업은 제한된 상태다. 이렇다보니 업무에 복귀한 텔레마케터들도 미비하다. 다른 보험사들도 이번주부터 속속 영업을 재개하고 있다. 하지만 형식에 그칠 뿐이라는 전망이 많다.
보험사들이 텔레마케팅 영업에 소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수집된 고객정보가 합법적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보험사는 자사 데이터베이스 보다 카드사 등의 제휴 데이터베이스 의존도가 높다.
또, 보험사들은 금융당국에 ‘CEO 확약서’를 제출한 만큼 TM영업 재개 후 민원 등의 부작용이 발생할 경우 CEO가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도 갖고 있다. 고객정보 유출 이후 텔레마케팅 영업에 대한 고객들의 시선이 부정적으로 바뀐 점도 영업을 힘들게 하고 있다.
한편 오는 24일부터 영업이 재개되는 카드사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은 이번 주까지 카드사 CEO로부터 개인정보 활용 확약서를 받고 카드사 준법감시인 회의를 소집해 텔레마케팅 영업 재개에 따른 실무적 절차를 안내할 예정이다.
카드사의 경우 보험사와 달리 대부분 자사의 고객 정보를 토대로 텔레마케팅 영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정보의 적법성 확인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하지만, 실제 고객에게 전화를 거는 아웃바운드 영업을 재개하는 것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문제는 고객정보 유출 이후 아웃바운드 영업에 대한 고객들의 인식이 나빠졌다는 점이다. 결국 텔레마케터들이 적극적인 영업을 하기가 예전 같지 않을 전망이다. 고객들에게 신임을 잃은 마당에 텔레마케터들이 얼마나 높은 실적을 올릴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영업실적이 오르지 않으면 결국 텔레마케터들은 수입도 얻기 힘들다.
한편 카드사의 한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현재 금융환경과 현실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정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는지 몰라도 너무 동떨어진 정책들을 내놓고 있다”고 푸념했다.
또 최근 논란이 됐던 텔레마케터들에 대한 영업정지 지시건은 애초에 안건도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카드사들의 정보유출 후속 대책을 논하던 중 지나가듯 나온 의견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금융위원장이 “그럼 영업을 못하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고 이것이 바로 정책으로 연결됐다. 현장을 모르는 한 사람의 말 한마디가 6만 명이 넘는 카드·보험사 관련 텔레마케터의 생명줄을 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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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환 기자 freeore@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