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마흔 세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모음과 나눔의 정신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한글과컴퓨터(회장 김상철)다.

한글과컴퓨터는 자국어 워드프로세서를 독자 개발하고, 전 세계에 몇 안되는 최고 수준의 연구개발 인력을 보유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국민 기업이다. 한글과컴퓨터는 ‘한글’뿐만 아니라 한컴 오피스, 인터넷 오피스 환경을 위한 다양한 소프트웨어 기반 제품을 개발했다. 특히 ‘한컴 오피스 2004’의 출시는 외국 제품에 의해 독점되고 있던 국내 오피스 시장에 선보인 경쟁력 있는 국산 제품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한글과컴퓨터는 2004년 미주 법인 ‘한소프트USA’ 설립을 시작으로 공격적인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섰다. 미주법인은 교포를 대상으로 한글 교육 웹서비스 ‘아리수 한글’판매, 교육용 소프트 유통사와의 판매제휴, 국제정보통신박람회 출시 및 제품 판매도 추진했다. 또한 일본 매킨토시 사용자 공략을 위해 일본법인 설립까지 진행했다.
한국인의 자랑, 한글
이처럼 한글과컴퓨터는 우리에게 국민적 자긍심을 갖게 해준 기업이다. 그러나 이찬진 전 사장이 한글과컴퓨터를 창립한 이후 여러 어려움도 많았다. 한글과컴퓨터가 외국 자본에 매각될 상황까지 벌어진 적도 있다. 한글과컴퓨터를 살리자는 국민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동안의 시련은 한글과컴퓨터에게 있어서 토대를 단단히 할 수 있는 계기였다.
Microsoft Word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국어 워드프로세서를 가지고 그것을 지켜 온 나라가 우리나라다. 또한 그걸 가능하게 한 회사가 한글과컴퓨터다. 한글과컴퓨터의 역사적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은 뒤늦게 자국의 워드의 중요성을 인식해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자기나라 말을 그렇게 사랑하는 프랑스도 자국어 워드프로세서가 없다. 왜 그럴까? Microsoft에서 쓰기 좋도록 완벽하게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좋은 게 있으니까 만들 생각을 안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시장논리다.
한국에서는 개인 유저는 물론이고 공공기관도 대부분 ‘한글’ 프로그램을 쓴다. 한글은 아직도 85~90%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왜 그럴까? Microsoft보다 먼저 한글이 워드프로세서로서 자리를 잡은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이다. ‘워드프로세서를 바꾸는 것은 마누라를 바꾸는 일보다 힘들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 한 발 앞서간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하다.
한글과컴퓨터는 국민에게 자긍심을 줬던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많은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여러가지 악재들이 겹쳤고, 한글과컴퓨터도 IMF 소용돌이를 피해가기는 힘들었다. 한글과컴퓨터가 어려움에 처했던 가장 큰 이유는 정확한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살려야만 했던 한·컴
한글 프로그램 하나만 믿고 버티면 당연히 망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변화하는 정보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한글과컴퓨터는 Microsoft Word보다 먼저 뛰어난 한글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시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은 뒤쳐졌다.
결국 회사는 무너졌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기업이 됐다. 그게 불과 2003년, 10여 년 전의 상황이다. 게다가 경영권 분쟁까지 생겨 주인 없이 떠도는 회사가 됐다.
그때 한글과컴퓨터에 투자를 하겠다고 선언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백종진 전 대표다. 백 전 대표는 투자 선언 후 많은 사람들이 반대를 했다고 밝혔다. 한글과컴퓨터의 미래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들의 말은 모조리 사실이었다. 좋은 인력들은 이미 다 빠져나간 상태였고 Microsoft Word가 표준화되면 한글 프로그램은 쉽게 역사의 무대로 사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 전 대표는 한글과컴퓨터 인수를 결정했다. 어떤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한글과컴퓨터 브랜드 가치 때문이었다.
백 전 대표는 “지금도 변함없이 한글과컴퓨터를 인수한 것을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가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손으로 자국어 워드프로세서를 지키게 됐다는 것이다. 즉 ‘정보 자주독립’을 실천했다는 설명이다. 정보화 사회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프로그램은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잇다.
한글은 Microsoft가 한국 시장에 들어오기 수년 전에 이미 HWP라는 파일로 수천, 수척 개의 정보를 담아냈다. 개인의 기록은 물론 교육기관, 검찰 등 모든 공공기관에 한글로 만들어진 파일이 저장돼 있다. 한글과컴퓨터의 경쟁력은 거기에 있다.
Microsoft를 넘어 세계로
이후 한글과컴퓨터는 ‘정보 자주독립’의 실현을 가장 먼저 실천에 옮겼다. 국산 소프트웨어를 지켜나가자는 취지였다. 그 다음 중점에 뒀던 것은 한글과컴퓨터를 단순한 패키지 소프트웨어를 파는 회사에서 인터넷 서비스웨어를 공급하는 회사로 바꿔나간다는 전략이었다.
기업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이윤 창출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업의 ‘영속성’이다. 한글이라는 소프트웨어 하나로 기업의 영속성을 유지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 당시만 해도 한글과컴퓨터는 한국에서만 알려지고 한국에서만 유명한 회사일 뿐이었다. 따라서 한글과컴퓨터의 세계화는 백 전 대표의 인수 이후 또 다른 경영 화두로 떠올랐다.
이후 한글과컴퓨터의 행보는 한글 프로그램 하나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사업의 방향을 한글 군과 오피스 군, 솔루션 군, 인터넷 군 등 다각화했다. 한글과컴퓨터는 강력한 한글 워드프로세서인 ‘한글 2004’를 비롯해 오피스 프로그램인 ‘한컴 오피스 2004’,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인 ‘한컴 슬라이드 2004’ 등 Microsoft 프로그램들과 비교해 성능이 떨어지지 않는 제품들을 골고루 개발했다.
한글과컴퓨터의 이러한 제품들은 Microsoft 제품과 비교해 우수한 가격 경쟁력을 지님과 동시에 성능 면에서는 더 간편하면서도 Microsoft 프로그램의 기능들을 대부분 갖추고 있어 시장 반응이 좋았다.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만해도 사람들은 대부분 비웃었다. 이미 훌륭한 제품이 나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자금을 투자해 새 제품을 만드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부적절한 종속적 사고다. 비슷한 제품이 경쟁해야 경쟁을 통해 품질이 개선되고, 소비자에게도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줄 수 있다.
글로벌 한국기업 향한 발걸음
한글과컴퓨터는 한글 소스 코드를 전 세계에 공개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당시 “그걸 공개하면 어떡하냐”며 사람들이 물어왔다. 하지만 한글과컴퓨터는 “다른 나라들이라고 자국어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싶은 욕심이 없겠는가?”라며 반문했다. 그래서 한글과컴퓨터는 그런 나라들을 대상으로 소스를 공개할 생각을 가졌고, 80%만 공개한다고 밝혔다. 물론 무료공개는 아니었다.
한글은 어느 나라 언어로도 버전을 만들 수 있다. 기술 이전 세미나를 하자 알제리나 모로코 같은 나라는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지키고 방어하기에만 급급하면 세계화의 길은 그만큼 멀어진다. 한글과컴퓨터가 소스 코드를 과감히 공개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한글 프로그램을 세계로 수출하고, 각 나라들이 자신의 워드 프로세서로 자국어를 저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비슷한 예는 또 있다. 애플 사의 아시아 부사장도 한글과컴퓨터를 방문한 일이 있다. 매킨토시 때문이었다. 자기들이 만든 매킨토시를 한국에서 판매하려고 하는데 한글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시장조사에서 많은 한국 유저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윈도우즈 기반의 소프트웨어를 매킨토시 기반으로 바꾸는 데에는 엄청난 자금과 인력이 필요했다. 자금은 그들이 다 부담하겠다고 했다. 소유권 또한 한글과컴퓨터 것이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매킨토시에 한글 프로그램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한글 소스 코드의 공개가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했다. 이때 한글과컴퓨터는 과감히 애플사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시장을 보다 넓게 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판매량에 급급하면 발전과 진전은 그만큼 더뎌진다고 생각했다.
영원한 1등은 없다
한글과컴퓨터는 세계를 경영하기 전에 가장 먼저 자신을 경영하는 일을 중요시 여겼다. 그 중에서도 성실과 실력, 스피드 세 가지 항목을 강조했다.
성실성은 비즈니스맨이 갖춰야할 모든 덕목 가운데 단연 첫 번째에 해당한다. 약속과 시간을 어기는 사람들은 목표한 바를 이루는 데 상당한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둘째로 요구되는 덕목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실력이다. 우선 독서를 많이 해야 한다. 전공과목은 물론, 꿈과 직결된 서적들을 읽을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스피드다. 비즈니스 세계에선 의사결정이 곧 회사 이익과 직결되고 그것이 CEO 책임으로 돌아간다. 오래 망설일 필요가 없다. 한 번 결정되면 신속하고 빠르게 실행해야한다.
한글과컴퓨터는 ‘영원한 1등은 없다’는 말을 새기며 여전히 자기 경영과 다양한 도전을 하고 있다. 2010년 인수합병 시장에 다시 한 번 매물로 나오며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클라우드·사진편집 소프트웨어 등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성장에 속도를 냈다. 그 결과 2011년 매출 573억 원, 영업이익 214억 원을 기록하며 매출 400억 원대의 천장을 깨고 최고 실적을 냈다. 또 사이버테러 인력 양성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08년부터 시작한 국제해킹방어대회 겸 보안콘퍼런스 ‘코드게이트’는 국내 보안인력을 키우고 노하우를 전수하는 최대 규모 보안대회 중 하나가 됐다. 현재 한글과 컴퓨터는 성공한 소프트웨어 롤모델을 지속적으로 양성하고자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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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박시은 기자>
<출처=글로벌 스탠더드│지은이 아주대│㈜샘터사>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