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마흔 두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온 블랙야크(회장 강태선)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하나, 등산 관련 시장에서 규모가 10%에 불과했던 등산 의류 쪽에 주력하는 것이었다. 강 회장이 처음 서울에 상경해 가장 먼저 접한 일은 이모님 밑에서 배운 의류사업이었기 때문에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히말라야의 혼 블랙야크
하지만 사실 당시엔 쉽게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때는 등산의류도 등산장비의 일종으로 생각돼 전문 산악인들이나 입는 옷으로 통했다. 그래서 디자인보다 기능 위주라 모양새도 굉장히 투박했다. 그 개념을 그대로 들고 가면 시장이 커질 수가 없기 때문에 필패(必敗)였다. 등산의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창조해야하는 숙제가 있었던 셈이다.
강 회장은 전문 산악인뿐만 아니라 등산 동호인 또는 일반인들도 등산의류를 즐겨 입게 만들려면 어떤 점이 보완되어야 할지 생각했다. 모든 사업과 아이디어는 기존 제품이나 서비스가 미처 충족시키지 못한 니즈(needs: 고객의 요구)들을 채워주는 데서 출발한다. 강 회장은 등산의류 시장에서 채워지지 않고 있는 니즈를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다. 기존 등산의류업체들의 ‘산에서는 까딱 잘못하다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에 빠지는데 모양 신경 쓸 새가 어디 있냐’는 생각을 뒤엎겠다는 것이었다. 강 회장은 등산의류도 옷이니 이왕이면 예쁘고 멋지게 입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고민할 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새로운 브랜드가 필요했던 것. 만약 스타벅스에서 웰빙시대에 맞춰 한방차를 판매하겠다고 하면 고객들이 좋아할까?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스타벅스는 커피로 이미지가 굳어져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동진레저는 전문등산용품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곁다리가 아니라 등산의류를 전문으로 하는 새로운 브랜드를 내세우는 것이 바람직하게 여겨졌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마침 강 회장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등반대의 짐을 지고 걸어가는 검은 색 ‘야크’였다. 강 회장은 옛날 겨울 한라산에 올랐을 때 원정대 선배들로부터 야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늘 궁금해 하다가, 이번 히말라야 원정에서 실물을 처음 보고 신기하고 반갑게 여기고 있던 터였다. 그때 마침 곁에서 걷고 있던 엄홍길 대장이 불쑥 말을 건넸다.
“브랜드 이름으로 야크는 어때요?”
이심전심(以心傳心). 엄홍길 대장도 산악인으로서 늘 야크에 대해 애착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엄홍길 대장뿐만 아니라 모든 산악인들은 다 등반의 동반자 야크를 사랑했다. 강 회장은 이만한 이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히말라야 혼을 상징하는 검은 소 ‘블랙야크’를 브랜드명으로 결정했다.
고지 앞에서 닥친 IMF
블랙야크는 런칭 이후 바로 동진레저의 얼굴이었던 프로 자이언트를 제치고 대표브랜드로 우뚝 섰다. 매출 비중이 블랙야크 80%, 프로 자이언트 20%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회사는 다시 순조로운 성장흐름을 탄 듯 했다.
블랙야크는 한중 수교가 이뤄진 직후 외국공장까지 설립했다. 대련(다롄) 공장 설립에는 당시 돈으로 30만 달러가 들어갔다. 아직까지 업계가 휘청이던 시기여서 결코 적지 않은 투자였다. 그런데 결과가 썩 좋지는 않았다. 중국시장에서 전혀 예상 못한 문제점들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한창 물건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갑자기 공장에 들어오는 전기가 끊긴 적이 있었다. 이유는 공장에서 너무 많은 전기를 사용해 인민들이 사용할 전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곳에선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공장에 물건을 실으러 차가 너무 많이 들락날락해서 인근 도로들이 망가졌으니 그 보수비용을 내놓으라는 것. 대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항변하면 아예 도로를 막아버리고 출입을 못하게 했다. 그 뿐만이 아니고 현지직원들의 윤리수준도 문제였다. 걸핏하면 원단을 빼돌렸던 것이다. 결국 블랙야크의 첫 중국 진출은 내외적으로 총체적인 어려움에 부딪치며 2년 만에 철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블랙야크는 그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1996년 50만 달러를 들여 다시 천진(톈진)에 생산라인을 설치했다. 이미 실패로 얻은 경험이 있는데다 천진은 대련보다 기반시설도 좋아서 다행히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예측하지 못 한 대사건이 터졌다. IMF외환위기. 이른바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사태가 1997년 말에 발생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외환보유고가 바닥나고 대마불사(大馬不死)라던 대기업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블랙야크도 다시 극심한 위기에 처했다. 제품 판매량이 떨어진 것은 물론이고 현금회수도 원활하지 않았다. 아무리 산을 오르려면 오르막과 내리막을 두루 거쳐야 한다지만 뭐가 좀 될 만하면 닥쳐오는 위기에 강 회장도 조금씩 지쳐갔다.
중국공장에 들어가는 비용부담도 폭증했다. 환율이 2배 이상 치솟으면서 중국 투자의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안팎의 중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럼에도 강 회장은 어렵게 뿌리를 내려가던 지금 다시 중국 시장을 포기한다면 선도적인 입지를 갖추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중국 투자는 지속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와중에 전혀 예상치 못한 쪽에서 회생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IMF 당시 부도위기에 몰린 기업들은 일단 비용을 줄이기 위해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국내최대기업 삼성전자조차도 생존을 위해 전 직원의 1/5을 내보냈을 정도다. 차마 집에 먹고 살 길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가장들은 쓸쓸히 공터를 배회하다 편의점 컵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는 일이 늘어갔다. 그렇게 공터에서 시간을 때우던 가장들은 뭔가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섰고, 곧 산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왕 남는 시간, 등산이나 하면서 머리도 식히고 체력도 길러 후일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얼마 후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은 채 등산하는 사람들이 산을 뒤덮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급여가 나오지 않으면서 가장들의 실직 사실을 알게된 가정이 늘어나면서, 그동안 가장들이 정장 차림으로 등산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애달픈 정서가 온 사회와 가정을 휩쓸었다. 이후 아내들이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 보자며 손을 잡고 등산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곧 사회 전반에 퍼져 이제 온 산들이 부부동반 등산객으로 가득 찼다.
이 과정에서 평상복 차림으로도 불편한 등산에 마음이 짠해진 아내들은 남편의 손을 잡고 등산복 매장으로 향했다. IMF로 인한 구조조정이 등산복 신규매출 증가 시작의 계기가 된 것이다.
기적은 이어졌다. DJ 정부에 들어와 남북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최초로 금강산 관광이 개시됐다. 그러자 북한이 고향인 많은 어르신들이 금강산 관광을 신청했고, 그분들을 모시기 위해 자녀들도 함께 여행에 나서게 됐다. 그런데 북한과 금강산관광사업을 주관한 현대 측에서 관광객들에게 요구한 필수조건이 있었다. 금강산은 길이 험하고 미끄러우므로 안전을 위해 반드시 등산화를 착용하라는 것. 이 덕분에 등산화와 등산복, 등산 용품들까지 매출이 크게 늘었다. 모두가 죽겠다는 와중에 예상치 못한 호재가 연거푸 터진 것이었다.
과거 취사 및 야영금지 조치로 부도 직전까지 갔을 때 현대자동차의 침낭 대량주문으로 위기를 넘긴 것에 이어 현대가 블랙야크를 두 번 일으켜 세운 셈이 됐다.
중국시장 진출…결실 맺다
이후 블랙야크는 중국 공장을 유지하면서 매장까지 내기로 결정했다. 모든 아웃도어 브랜드를 통틀어 최초의 중국 매장이었다. 최초였기 때문에 중국시장에서 생소할 수밖에 없는 브랜드였지만 다양한 마케팅활동과 노력, 그리고 그동안 발전을 거듭해온 품질과 디자인 덕분에 땀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도 IMF위기 극복 이후 다시 경기가 살아나면서 직장을 잃었던 가장들이 속속 다시 일자리를 찾아 재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기가 살아났다고 해서 산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남편과 함께 산을 다니면서 등산의 즐거움을 알게 된 주부들이 계속 산을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는 아웃도어 산업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전기가 됐다. 아웃도어 구매의 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IMF를 기점으로 가정의 경제권이 여성에게 넘어간 것도 이러한 변화에 한 몫 했다.
여성들은 성향상 등산복에서도 맵시에 특히 신경 썼고, 이 때문에 블랙야크를 비롯한 등산복 브랜드들은 여성의 취향을 반영한 화려한 등산복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등산복에 패션화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것이다. 등산복을 평소에 활동복으로 입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산이 아니라 그냥 시장에 나가거나 운동할 때도 등산복을 입는 여성고객 덕분에 등산복의 대중화와 패션바람은 큰 트렌드가 됐다.
2000년 이후 아웃도어 시장은 매년 평균 20%를 넘나드는 고성장을 계속했다. 블랙야크는 그 중에서도 시장평균을 뛰어 넘는 선장을 거듭하며 2006년에는 본사를 확장 이전했다. 지하 10평 공장 지상3평 매장으로 시작한지 33년만이었다.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지만 ‘산을 사랑한다’는 초심을 잃지 않고 사업방향을 고심하는 긍정적인 사고는 지금의 블랙야크를 만든 밑거름이 됐다. 이후 지금의 독립법인 ㈜블랙야크로까지 승승장구하며 또다른 도약을 기약하고 있다.
<끝><정리=박시은 기자>
<출처=BLACK YAK│스토리 김성민·박산솔, 글 유창조 지음│IWELL>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