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정보 유출과 함께 보이스피싱이 다시 활기를 치고 있다. “고객님의 정보가 유출된 카드의 비밀번호를 바꾸겠습니다”라며 카드 비밀번호를 요구한다. 사람들은 ‘앗’하기도 전에 당하는 경우가 많다.
“카드 비밀번호 변경하세요”… 보이스피싱 잇따라
관공서·병원·납치범 사칭… “더 이상 당하지 않는다”
“OOO고객님 안녕하세요. 여기는 해피해피 은행인데요…고객님 당황하셨어요?”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 ‘황해’의 유행어다. 황해는 중국인이 휴대전화로 한국인에게 사기를 치는 ‘보이스피싱’(전화를 통해 불법적으로 개인정보를 빼내거나 돈을 빼앗는 범죄행위)을 소재로 한 인기 개그 코너다.
이처럼 보이스피싱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범죄행위다. 그러나 보이스피싱은 나날이 진화해 피해자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최근에는 금융정보유출과 함께 그에 알맞은(?) 보이스피싱으로 개인정보를 빼내고 있다.
“삐- 소리가 나면 비밀번호 눌러주세요”
최모(27)씨는 퇴근길에 XX도봉지점이라는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최씨에게 “어제 XX카드 홈페이지에서 유출 정보 조회하셨죠? 고객님 카드의 정보가 유출돼서 CVC번호랑 비밀번호를 아직 바꾸지 않았다면 위험합니다”라며 “창구에서 번호표 뽑고 기다리지 마시고 제가 지금 바꿔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은 후 최씨는 해당 카드 피해자신고센터에 전화했고 그런 번호는 없다는 대답을 받았다. 최씨는 “개인정보 유출된 것도 화나는데 보이스피싱까지 받으니 할 말이 없다”며 “게다가 어제 홈페이지에서 조회한 것까지 알고 있다니 소름이 돋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최근 발생한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된 보이스피싱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OO카드 직원이라며 개인정보를 확인하는 과정이 자연스럽다는 것이 피해자들의 증언이다. 그들은 피해자의 이름, 사는 곳, 카드번호, 유효기간, 휴대전화 번호, 주민번호까지 다 알고 있었다.
최근 바뀐 정책에 따른 보이스피싱도 있다. 직장인 신모(30)씨는 한 달 전에 주거래은행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은행 상담원은 고객 정보의 주소를 도로명 주소로 바꿔야 한다며 고객 동의를 거쳐 자동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상담원은 개인정보 확인을 위해 주민번호를 눌러달라고 했다. 이어 “개인정보는 본인 확인을 위해서만 사용되니 안심하십시오”라는 안내 멘트로 나왔다. 고객센터를 통한 개인정보 확인 시 익히 듣던 말이라 신씨는 전혀 의심 없이 주민번호를 눌렀다.
“네 고객님 신원 확인되셨습니다. 그럼 삐 소리가 나면 현재 비밀번호 4자리를 눌러주세요.” 이 말을 들은 신씨는 ‘주소 바꾸는데 비밀번호까지 필요한가’라는 의구심이 들어 “다음에 하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은행에 가서 확인한 결과 그 전화는 ‘보이스피싱’이었다. 신씨는 “상냥한 서울말씨의 상담원이었다.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 기계음도 똑같았다”며 “나날이 보이스피싱이 진화하고 있는 것 같아 어떤 전화든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남편을 죽이겠다. 3000만 원 내놔라”
지난 16일 오전 9시 50분께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는 A(43·여)씨는 “남편을 살리고 싶으면 돈 3000만 원을 입금해라”라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여보 살려줘”라는 남자의 비명소리도 들렸다. 놀란 A씨는 사실 확인을 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은행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다행이도 A씨 가게 종업원인 B씨가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A씨를 찾아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그때 A씨는 은행잔고가 부족해 신용카드를 가지러 가게로 되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후 A씨는 남편과 통화해 무사함을 확인했다.
배우자 또는 자녀를 납치했다며 돈을 요구하는 방식은 보이스피싱 초기부터 계속 있어왔다. 특히 대상이 학생인 경우 전화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악용했다. 이런 내용의 전화를 받고 상대방과 통화가 안 되면 사실로 믿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경우로는 병원에 입원했다며 수술비를 급히 입금하라는 사례가 있다. 지난해 안모(25)씨는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는 중에 황당한 전화를 받았다. OO대병원 직원이라고 밝힌 상대방은 안씨의 아버지가 귀가도중 교통사고를 당했다며 긴급 수술이 필요하니 병원비 200만 원을 입금하라고 말했다. 몹시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안씨의 아버지는 바로 옆에서 식사 중이었다. 안씨가 거칠게 화를 내자 상대방은 급히 전화를 끊었다. 안씨는 “만약 아버지가 옆에 없었다면 돈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지난해 전(前) 레슬링 선수 김남훈씨는 자신의 SNS에 재미있는 일화를 올렸다. 몇 해 전 있었던 보이스 피싱에 대한 이야기였다. “댁의 자녀를 납치했다”(상대방), “우리 애는 안전한가요?”(김씨 父), “일단은.”(상대방), “납치할 때 안 힘들었나요? 내 아들이면 힘들었을 텐데.”(김씨 父)”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있다는 속담처럼 보이스피싱이 아무리 진화해도 사람이 진화(?)하는 정도를 따라오지는 못한다. 김씨의 사례처럼 황당한 보이스피싱에 재치있게 대답하는 사람들 덕분에 오히려 보이스피싱을 하는 쪽에서 당황하는 경우도 있다.
A씨는 아들의 휴대전화를 며칠 사용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를 건 상대방은 A씨에게 “당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급히 장례식장을 빌릴 돈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기가 막힌 A씨는 상대방에게 “내가 지금 부활했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모(23·여)씨는 지난해 우체국 고객센터라는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나씨에게 “고객님의 우체국 계좌에서 200만 원이 인출됐습니다. 비밀번호를 바꾸셔야 합니다”라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나 대학생인 나씨의 계좌 잔액은 4만여 원에 불과했다.
보이스피싱을 눈치 챈 나씨는 “그거 제가 인출한 거 맞아요”라고 말했고 상대방은 말없이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나씨는 “만약 계좌에 돈이 있었다면 사기를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무섭다”면서도 “하지만 이런 사기꾼에게는 절대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jhook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