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①]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블랙야크①] 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의 ‘창업스토리’
  • 박시은 기자
  • 입력 2014-01-27 11:12
  • 승인 2014.01.27 11:12
  • 호수 1030
  • 5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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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시장서 한발 한발…글로벌 브랜드로 우뚝

한국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마흔 두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온 블랙야크(회장 강태선)다.

▲사진=뉴시스

강태선 블랙야크 회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교에 가지 않고 취업했다. 학비는 스스로 일해서 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년 정도 일하다 더 큰 도전을 위해 제주도에서 서울로 상경했다. 당시 남대문에서 옷 장사를 하던 이모님의 일을 도우며 강 회장은 장사에 눈을 뜨게 됐다.

현재는 동대문이 등산장비점의 메카로 통하고 있지만 원래 최초로 시장이 형성된 곳은 남대문이었다. 그래서 강 회장은 이모님의 옷가게에서 일을 하면서 틈틈이 시장을 돌며 각종 등산장비들을 구경하곤 했다. 워낙 산을 좋아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수요는 있을 것 같은데 공급되는 물품의 질이 좋지 않았다. 등산용품이란 게 대부분 미군 물품을 개조해서 만든 열악한 것들이었고, 그마저도 정식 매장이 아니라 좌판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자체개발 ‘삼대배낭’ 내놔

가끔 정식 등산용품들이 수입돼 들어오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높은 관세 때문에 가격이 엄청났다. 그렇다면 분명 품질과 가격을 함께 만족시킬 지점이 있어 보였다. 더군다나 경부고속도로 등 전국의 도로망이 확충되면서 산에서 캠핑하며 여가를 즐기는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있었던 터라 외부환경도 좋았다. 그래서 강 회장은 자신이 좋아하는 산과 관련된 아이템으로 사업을 해보기로 했다.

1973년 2월, 강 회장은 24살의 나이로 종로 5가에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등산용품 전문 매장 ‘동진사’, 후에 ‘동진산악’, ‘동진레저’ 등으로 이어지는 블랙야크의 시작이었다.

블랙야크가 ‘동진사’이던 시절 주로 등산복을 판매하다 처음으로 자체 개발 상품 ‘삼대배낭’을 내놓았다. 당시 대부분의 배낭이 미군 물품을 개조한 것이었다. 강 회장은 등산에 적합한 배낭을 직접 개발해 판매하면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야심찬 첫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처음 제작해본 제품이라 품질도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소재선택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했던 것이 주원인이었다. 면으로 배낭을 만들었는데 알고 보니 면은 땀을 흡수해서 산행 도중 점점 더 배낭을 무겁게 하는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러니 야심찼던 첫 상품은 시장에서 외면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진사였던 블랙야크는 삼대배낭의 실패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일쇼크까지 겪으면서 한동안 대단히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뼈아픈 실패는 강 회장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 현장의 요구를 담아내지 못한 제품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을 조금 안다고 해서 절대 자만하지 말고, 부지런히 산에 다니며 현장에서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계속 탐구하고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강 회장은 평일에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산에 오르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렇게 절치부심해서 새롭게 내놓은 것이 바로 ‘자이언트’였다. 자이언트는 강 회장의 최초 브랜드이기도 하다. 자이언트 배낭은 ‘동진산악’ 공장에서 자체 브랜드로 만들기 시작했고, 시장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삼대배낭의 실패와 깨달음이 귀한 자양분이 된 셈이었다.

강 회장은 자이언트 배낭이 시장에서 통한다는 것을 느끼자 제품군을 확장해 텐트와 오버트라우저(방수용 바지)까지 만들었다.

히말라야서 찾아온 손님

그 즈음 동진산악으로 히말라야에서 온 바이어가 찾아왔다. ‘린지 셰르파’라는 이름의 그 바이어는 동진산악이 만든 제품을 구매해서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산악인의 거리 ‘타멜’에서 판매하기로 하고 계약을 맺었다.

물량 자체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이 거래가 의미하는 바는 컸다. 자이언트가 히말라야 현지에서 세계 최고의 산악인들을 상대로 품질테스트를 받는 기회이기 때문이었다. 야구로 치면 고졸 신인 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에 가서 초일류 선수들과 함께 경쟁하고 배우게 된 그런 상황이다.

강 회장은 바이어에게 구입물량 외에도 여분의 옷과 용품을 챙겨주며 산악인들의 등반을 돕는 현지 셰르파들에게 제공해달라고 부탁했다. 돈을 안 받는 대신 등반할 때 직접 사용해보고 옷과 제품에 대한 피드백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가난 때문에 자비로 등산복과 용품을 구매할 수 없는 이들도 있었으므로 강 회장의 제안은 그들에게 대환영이었다.

덕분에 자이언트는 히말라야 셰르파들과 산악인들로부터 따끔하고 냉철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고, 이는 동진산악 제품의 수준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 인연은 자이언트 이후로도 쭉 이어졌다.

자이언트의 성공 후 1976년 후속타로 ‘프로 자이언트’라는 새 브랜드를 런칭했다. 침낭, 신발 등으로 제품군을 한층 더 늘렸다. 운도 따랐다. 서서히 고조되던 등산에 대한 관심이 1977년 고상돈 대원의 한국인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갑자기 폭발해 일순간에 등산 열풍이 불어 닥친 것이다. 그 덕분에 프로 자이언트는 말 그대로 ‘없어서 못 팔 지경’으로 팔려나갔다.

강 회장은 사업을 등산에 비유한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갈 때도 있다는 것이다.

프로 자이언트로 연속적인 큰 성공을 거뒀지만 어려운 상황도 함께 불어 닥쳤다. 1979년에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 일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고 흉흉한 사회분위기 탓에 팔자 좋게 등산장비를 사서 산에 다니는 사람들은 사라져갔다.

오르막 내리막 공존 사업

한껏 뻗어나가던 동진산악은 그 일로 다시 한동안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했다. 하지만 내리막을 지나면 또 오르막이 나오는 법. 2년 후인 1981년에 야간 통행금지가 풀리면서 다시금 시장에 활기가 돌았다.

이 조치는 많은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예전에는 통행금지 때문에 가까운 산만 얼른 올라갔다 내려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 장거리산행 및 야간산행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강 회장은 ‘무박산행’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무박산행 프로그램은 토요일 오후에 일을 마치고 바로 출발해 밤새 등산을 즐긴 후 일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무박산행은 직장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산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관련된 제품에 대한 관심도 자연히 커진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등산을 체험해보게 하는 일에 주력했다. 또 등산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 중 변변한 옷이나 장비가 없는 이들에겐 가게 물품과 옷을 빌려주면서 산행에 동참시키기도 했다. 일종의 체험마케팅이었던 것이다.

이후 등산 붐이 다시 불면서 등산용품들은 또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이 호황기 동안 처음 동진사에서 동진산악으로 바뀌었던 회사는 ‘동진등산장비총판’으로 다시 변경됐다. 사세확장도 일궈냈다. 특히 80년대 중반에 열린 3저 호황(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시기에는 정말 돈 세느라 밤잠을 못 잘 정도로 성장해서 아침에 눈을 뜨는 게 너무나 신나는 그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당시 3저 호황은 우리나라의 수출 증가율이 연 20~30%를 넘나들고, 국민총생산도 연 12~13%씩 성장했던, 말 그대로 자리만 깔아도 장사가 되던 때였다.

강 회장은 그 성장을 기반으로 1990년에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사옥을 짓고, 강남구 신사동으로 본점을 옮겼다. 사명도 ‘동진레저’로 변경했다.

그런데 호황이 끝나자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1992년 3월에 전국 국립공원과 주요 산에서의 야영 및 취사를 금지하는 법이 발표된 것이다.

경기침체야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일이지만 야영 및 취사금지는 등산장비의 수요 자체를 원천적으로 없애는 조치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등산객들이 산을 너무 어지럽히고 훼손시켜서 정부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어쨌거나 관련 업계는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아웃도어 시장의 90%는 등산용품이었고, 옷은 10% 미만이었는데 90%의 수요가 뚝 끊기니 도무지 버틸 방법이 없었다. 덕분에 등산장비업체의 76%가 문을 닫는 줄도산이 이어졌다.

동진레저 역시 부도가 나느냐 마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까지 갔다. 다행히 현대자동차로부터 노조원에게 지급할 3만2120개의 침낭 발주를 받는 기적저인 거래가 생긴 덕분에 간신히 호흡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동진레저의 1년 침낭 총판매가 1만 개 정도였으니 3만2120개라는 물량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다시 불기 시작한 등산 붐

현대자동차 덕분에 겨우 급한 불은 껐으나 여전히 앞길은 캄캄했다. 등산 붐을 따라 시장에 진출했던 대기업들도 코오롱 한 곳을 제외하곤 모두 버티지 못하고 철수한 상황이었다. 그러다 강 회장은 뜬금없이 히말라야 원정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회사에 있다고 해서 자금난이 사라지고 시장상황이 풀리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산을 사랑하는 초심으로 돌아가 돌파구를 찾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980년에 회장으로 취임한 후 이끌어온 거봉산악회 회원들과 히말라야 원정대를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산악회와 함께했던 후배 엄홍길 대장도 등반대장으로 동참했다. 당시 엄홍길 대장은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지만 이후 5년간 잇따른 등정실패로 슬럼프에 빠져있었다.

위기에 처한 두 사람이 떠난 히말라야에서는 새로운 브랜드를 내세우자는 뜻밖의 돌파구를 찾게 됐다. 바로 ‘블랙야크’로의 새로운 전환, 새로운 시작의 계기가 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시은 기자>
<출처=BLACK YAK│스토리 김성민·박산솔│글 유창조 지음│IWELL>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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