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마흔 한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미래 성장동력을 육성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한 ㈜코오롱이다.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도 경영의 글로벌화가 화두로 떠오른 지 이미 오래됐다. 잭 웰치의 언급이 아니어도 자유무역체제의 확산으로 이제는 특정한 국가 내에서의 경쟁력만으로는 기업의 이윤뿐만 아니라 존립마저 보장받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근래 세계 총생산의 20%가 글로벌 시장에서 생산·소비됐지만 2030년경에는 그 비중이 80% 정도까지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같은 전망이 현실화된다면 국내 기업들 가운데 그 기간까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기업은 얼마나 될까?
그 비중이나 시기가 다소 유동적이라 치더라도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화를 통한 생존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셈이다. 인식은 하고 있지만 ‘혁신’을 이뤄낼 준비가 된 기업이나 경영자는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글로벌 경영 추구의 목적은 사업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시키는 것과 기업의 이익과 시장 확보를 위해 전 세계에 분산돼 있는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확보하고 활용하는 데 있다고 요약했다.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급격한 재구조화를 추진해야 하는데 글로벌화는 다른 말로 재구조화의 과정인 셈이다. 코오롱은 그러한 재구조화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회사 경영실적이 그리 좋지 못한 상황에서 과감한 결단으로 구조조정을 함으로써 성공리에 ‘턴어라운드(Turnaround, 기업회생)’을 실현했다. 나아가 해외법인 설립과 현지화, 수출물량 확대 및 시장 다변화, 기술 역량 강화 등을 통해 명실공히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코오롱은 그간 자동차소재와 필름, 화학 등 아시아 생산 공장을 세계 시장 공략의 전초기지로 삼고 지속적인 투자를 해왔다. 이를 통해 경쟁력 있는 품목을 발굴, 육성해 미래 성장기반을 확보하는 전략을 추진해온 것이다.
중국 현지 생산체제 구축
그리고 또 다른 모색
시작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태국 기업과 합작으로 타이어코오드 제조 법인인 시암 타이어코오드를 설립했다. 이후 해외법인 설립에 박차를 가해 1991년에는 방콕 근교에 타이어코오드 제조 공장을 준공했다. 1994년에는 인도네시아에 코오롱INA를 설립, 인도네시아 현지의 PET필름 생산 공장을 준공했다. 이는 향후 급격한 발전이 기대되는 개도국 및 후발국가 시장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대비했다는 점에서 무척 의미 깊은 일이었다.
2000년 들어서 코오롱은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 시장에 대한 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특히 배영호 전 사장(현 코오롱인더스트리 고문·사진)은 사장에 막 취임했을 때 중국 내 투자를 적극적으로 실시해 코오롱이 중국 내 선도적인 산업소재 및 화학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차세대 성장기반을 새로 확충하고 신규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공격적인 경영에 나선 것이다.
코오롱의 난징 공장은 중국에 타이어코오드와 에어백의 현지 생산체제를 구축해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춘 대표적인 사례다. 2004년 중국 난징에 타이어코오드 공장을 준공하고, 이어 2005년 에어백 공장을 준공하면서 자동차용 소재 부문의 중국 시장 개척이 시작됐다.
하지만 설립 초기의 생산량으로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중국 내 수요를 감당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배영호 코오롱인더스트리 고문은 중국 내 시장경쟁력 강화의 중요성을 간파해 2006년 사장으로 취입한 즉시 타이어코오드 생산시설의 증설을 과감히 결정했다. 이후 2006년 2기 투자가 끝나면서 연산 약 1만2천 톤, 국내 생산량과 합쳐 연산 5만 2천 톤인 세계 3위의 규모로 성장하게 됐다.
이와함께 다른 사업 부문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도 동시에 진행됐다. 쑤저우에 위치한 페놀수지 공장은 코오롱이 화학사업 부문에서 처음으로 해외로 진출한 사례였다. 이후 미국의 화학회사인 조지아퍼시픽사와 기술 및 자본협력 관계를 맺어 선진기술과 생산 시스템의 도입을 추진했다. 연 2만 톤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지속적인 증설 및 고부가가치 제품으로의 생산 비율을 늘려 중국 내 1위의 페놀수지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한 것이다.
적극적인 해외 진출 결과 코오롱은 아시아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글로벌 산업소재 및 화학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또 그와 동시에 중국 시장 공략을 가속화할 수 있게 됐다.
노사 상생문화 확립이
성장의 밑거름
이전까지 코오롱이 이 같은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온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코오롱 노조는 강성노조로 잘 알려져 있었고, 노사대립으로 큰 홍역을 겪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잦은 노사분규로 흔들리던 코오롱은 현 코오롱인더스트리 배영호 고문이 2006년 사장으로 취임한 후 변화와 혁신으로 턴어라운드가 실현됐다. 이로 인해 회사는 안정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수익 성장을 실현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게 됐다.
이는 명확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바탕으로 기존사업의 경쟁력 제고 및 미래사업 육성을 통한 사업핵심역량 강화, 자산매각과 원가·비용 구조 개선을 통한 구조조정, 고도화·전문화를 추구하는 사업 포트폴리오 강화 등 경영 혁신의 결과였다.
또 법과 원칙 준수의 강력한 의지와 함께 포용력을 발휘해 경상북도 구미 지역의 대표적인 강성노조인 코오롱 노동조합과의 대립적 관계를 ‘항구적 무분규 선언’이라는 노사 상생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이끌어 냈다.
코오롱은 노사가 함께하는 상생동행협의회 등 노사화합을 위한 각종 제도 및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2006년 노동부로부터 ‘노사문화 우수기업상’에 이어 2007년 한국경제신문에서 수여하는 ‘사회공헌기업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런 변화에 힘입어 코오롱은 신기술·신소재 개발을 위한 R&D 분야 투자 확대, R&D 인력의 지속적인 확보, 국내외 유명대학·연구기관·지방자치단체 등과의 공동개발 노력을 병행할 수 있게 됐다.
코오롱은 이에 멈추지 않고 물 사업, 태양광사업 등 친환경사업을 중심으로 한 미래성장사업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는 지속적인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도입에 환경기업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성실히 수행해나가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코오롱이 영위하는 사업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어 해외법인과 해외지사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해외 경쟁력을 강화해 수출확대 및 글로벌 경영에 주력했다.
이렇듯 코오롱은 대내적으로 ‘항구적 무분규 선언’을 통한 노사 간 상생문화의 성공사례를 확립해 산업평화에 기여하고, 미래 사업육성을 통한 사업핵심역량을 강화했다. 대외적으로는 신흥시장 개척과 해외진출 확대 및 사회와 환경에 기여하는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해 나갔다.

거래물량 증가
노사화합은 안정된 거래선을 구축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노사화합 이후 노조위원장이 직접 거래선들을 방문해 안정된 노사관계 및 변화된 코오롱의 모습을 약속함으로써 거래선으로부터 신뢰를 얻은 것이다. 이를 통해 거래물량은 증가함은 물론 신규 구매계약이 체결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현재의 선진적인 노사문화를 구축하는 데는 배 고문의 역할이 컸다. 당시 사장이었던 배 고문은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서 ‘노사부부론’을 역설했다.
“남편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부인이 남편을 신뢰하지 못하면 집안이 잘될 수 없다. 남편은 열심히 돈을 벌고 아내는 남편을 믿고 살림을 잘 꾸려야 하듯, 노사는 서로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회사를 함께 이끌어간다는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노사화합을 이끈 또 하나의 축이었던 김홍렬 노조위원장은 “진정한 노사화합은 상생동행이라는 꿈을 적극적으로 실현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화답하면서 “상생동행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원가절감과 품질개선 등의 실천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높은 성과를 창출하고, 이를 통해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이 이뤄져야 진정한 의미의 상생동행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노사 모두 손을 맞잡고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코오롱은 이러한 노사철학을 바탕으로 상화 신뢰를 구축해 노사관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향후 100년 코오롱의 미래를 위해 노사가 상생 동행하는 새로운 기업문화의 틀을 정립할 수 있었다.
한편 당시의 배 고문은 원칙과 기본을 중시하면서 조직 구성원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업문화를 조성하는 데에도 주력했다. 사장실과 비서 숫자를 줄이고, 공장에서 운행하는 사장전용 차량도 처분했고, 사장 몫의 골프회원권도 팔았다.
대신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직원들을 위해 100만 원씩 총 20억 원을 격려금으로 지급했다.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으로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불필요한 낭비 요소는 과감히 줄이는 대신 직원들의 사기를 위한 투자는 아낌없이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그의 솔선수범은 노사관계를 변화시키는 시발점이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성공을 이끌어 온 배영호 사장은 1970년에 입사해 그룹 내에서 ‘전설’이 되다시피 한 이력으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시은 기자>
<출처=대한민국 초우량기업 10 中│김경준·국제경영원 지음│원앤원북스>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