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가 짧은 시간 안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과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이들 기업가들은 독특한 경영이론과 기법들을 창안했으며 한국의 기업풍토에 적합한 비즈니스 모델과 경영이론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은 인재제일주의를, 현대의 정주영은 생산의 혁신을, LG의 구인회는 인화모델을 각각 창안해 냈다. 현재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이들 1세대 창업자들의 도전과 혁신적인 창업정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요서울]은 한국 경제의 한 획을 긋고 있는 기업들의 창업스토리를 출판물 또는 기존 자료를 통해 다시금 재구성해 본다. 서른아홉 번째 창업스토리의 주인공은 무일푼 오징어 행상에서 시작해 5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드라마와 연극의 소재로까지 다뤄지고 있는 (주)자연의 모든것의 ‘총각네 야채가게’다.
이영석이 대학에 들어갈 때 전공을 선택한 과정은 간단했다. 사람들은 흔히 모이기만 하면 술을 마시거나 고스톱을 치면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이영석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제대로 놀 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왕이면 놀이를 전문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해보자는 생각으로 레크리에이션 학과에 지원했고, 그때부터 각종 놀거리를 기획하는 일에 골몰했다.
그것은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던 그가 사람들과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기획사에 입사했다. 일은 힘들고 보수는 적었지만 경험을 쌓고 일을 배운다는데 의미를 뒀기 때문에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어지럽게 흔들어놓은 일이 생겼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동료 직원들 앞에서 기획안 브리핑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며칠 밤을 새가며 만든 기획안을 선배에게 먼저 보여줬지만 기획안을 보던 선배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급기야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브리핑을 하지 못했고 그 실망감은 바로 다음날이 되자 충격으로 바뀌었다. 그 선배가 자신의 기획안을 그대로 베껴서 브리핑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영석은 그 길로 회사를 그만뒀다. 그때 그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은 딱 하나였다. 즐거우면서 정직한 일은 없을까? 고민하고 노력한 만큼 보상 받을 수 있고, 항상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그는 이따금 찾곤 하던 한강 둔치로 나갔다. 거기서 이영석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오징어 행상이었다. 한강을 찾는 사람들은 줄을 이었고 오징어 행상은 한 명뿐이었으니 시쳇말로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셈이었다. 하지만 오징어 행상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볼 뿐 장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이영석은 오징어 트럭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저…혹시 제가 이 오징어를 좀 팔아보면 안될까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영석을 바라보던 행상은 “그러시게”라며 선선히 승낙을 해주었다.
이영석은 오징어 행상에게 원가로 오징어 2만 원어치를 받고 싱싱한 오징어를 구별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확신과 자신감이 생겼다.
이영석은 오징어를 들고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방금 울릉도에서 올라온 오징어! 대한항공 타고 올라온 오징어! 새벽에 오징어 잡으러 갔다가 물에 빠질 뻔 했습니다! 오징어 사세요, 오징어!”
이영석의 커다랗고 익살스러운 목소리는 단번에 한강에 놀러 나온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그렇게 30분 만에 2만 원어치의 오징어를 다 팔았고, 손에는 4만 원이 쥐어졌다. 힘을 얻은 이영석은 다시 4만 원어치의 오징어를 받아 팔러 나갔다. 그리고 또 한 시간만에 다 팔아버렸다. 그의 손에 남은 건 8만 원이었다.
노하우의 특징은 발상의 전환
이영석은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람들과 놀이를 함께 즐기는 레크리에이션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이영석은 자신이 정말 잘할 수 있고 또한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어느 날 우연처럼 엉뚱한 곳에서 발견하게 됐다. 그리고는 바로 장사에 승부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그때가 1993년이었다.
이영석은 오징어 행상을 스승으로 삼아 1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의 기본을 배우고 독립했다. 기반을 닦았다고 봐도 무리는 없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영석은 1톤 트럭을 몰고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냥 도매점에 가서 물건을 떼어다가 적당히 목 좋은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하면 그만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표팀을 8강에 올려놓은 뒤 히딩크 감독이 했던 말처럼 여전히 배가 고팠다. 좋은 야채와 과일을 고르는 법, 신선하게 보관하는 법, 손님의 시선을 사로잡는 법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지만 누구 하나 그에게 다가와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각 분야의 최고들을 수소문해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수많은 장사의 노하우를 모두 직접 체득했다. 그가 지닌 노하우의 특징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고정관념과 기존의 관습을 먼저 떨쳐내야 한다. 그러면 지금 자신의 사고를 규정짓는 틀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때부터 익숙해 보이던 것들이 낯설어 보이기 시작한다. 그제야 발상을 전환할 준비가 된 것이다.
그가 처음 트럭 행상을 다닌 곳은 은마아파트 주변이었다. 오전부터 아파트를 돌며 확성기에 대고 아무리 소리쳐도 손님 한명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나오는 것을 봤다. 트럭을 세우고 살펴보니 그곳은 바로 성당 앞이었다. 오전 미사를 마친 사람들이 몰려나오는 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매주 미사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성당 앞에 트럭을 댔다. 그리고 단골을 확보하기 위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한 번도 어김없이 시간을 지켜 그 장소에 가 있었다. 시간이 맞지 않아 손님 한 명 찾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영석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다.
처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사람들도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이영석의 트럭을 만나다 보니 하나둘 관심을 보이며 찾아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가 손님의 입맛을 대변해 고른 품질 좋은 야채와 과일들을 사간 뒤로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아오는 단골도 점점 늘어났다.
이건 하나의 반전이었다. ‘트럭 행상도 점포가 될 수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의 불리함을 유리함으로 바꾸고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돌파구가 된 것이다.
좋아하는 일에는 목숨을 걸어라
단골들이 늘어가고 장사도 술술 풀리는 듯 했지만 위기도 있었다.
뜨내기인줄로만 알았던 그에게 노점상 가운데 덩치가 좋고 힘이 세 보이는 사내 셋이 다가와 다짜고짜 트럭에 실린 야채며 과일을 바닥으로 내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영석은 울컥 분노가 치솟았지만 그냥 참았다. 다음날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난 이영석을 본 상인들은 물건을 내던지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는 반항하지 않고 때리는 대로 모두 맞았다. 그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이영석은 은마아파트 담장 아래 노점상들이 늘어선 곳을 찾아갔다.
노점상인들은 젊은 게 독종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며칠을 버텼더니 노점상인들도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청 단속공무원들과 노점상인들 간에는 일종의 타협점이 있었다. 노점상은 단속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공무원도 일정한 수의 노점을 묵인해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다른 노점이 생기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점상인들은 이영석을 자신들의 손으로 해결하지 못하자 구청 단속반에 고발하는 강수를 뒀다.
단속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이영석은 트럭에 실린 야채와 과일들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게 한 번 빼앗긴 물품들을 찾아오려면 벌금을 20만 원이나 줘야했다.
그런데도 이영석은 물건들을 찾아서 다시 은마아파트 담장 아래로 나갔다. 또 빼앗기면 다시 벌금을 내고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또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자 구청 공무원들도 두 손 두 발을 들고 말았다.
결국 이영석은 끈질기게 버틴 덕분에 그곳의 노점상인들 뿐만 아니라 구청 단속반들에게도 암묵적인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오히려 그들이 찾아와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하고 갈 정도가 됐다.
다른 판로를 찾아 부평에 갔을 대도 이영석은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 다만 다른 점은 그들이 노점상인이 아닌 조직폭력배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영석에게는 그들 모두가 똑같았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에는 목숨을 걸었던 용기와 배짱이 그를 강하게 해줬다.
그는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 하지만 빚 좋은 개살구도 있으니 주의할 것!’이란 말을 마음 속 깊이 새겼다. 야채나 과일은 번듯한 겉모양이 많은 것을 좌우한다. 손님은 우선 눈으로 볼 때 싱싱하고 깔끔해 보이는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겉과 다르게 속으로는 썩어 있을 수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
이영석 역시 여러 차례 도매상들에게 속은 뒤 자신이 스스로 좋은 야채와 과일, 생선을 확인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가락시장의 무법자 칼잡이 출동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 내에 있는 청과시장에는 모두 다섯 개의 도매회사가 입주해 있다. 한국청과와 동화청과, 중앙청과, 서울청과, 농협 이렇게 다섯 개의 청과상마다 대략 250여 개의 점포가 딸려 있다. 총 16만 여 평에서 하루 15만여 명의 사람과 5만 여대의 차량이 출입한다. 가히 우리나라 최대의 농수산물 도매 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자연 사람들의 기운도 억세게 마련.
그 사이로 새파란 장사꾼, 과도 하나 들고 다니는 이영석을 고운 시선으로 볼 리가 없었다. 무턱대고 수박을 반으로 쪼개 맛을 보고 사지도 않고 가버리니 도매상인들 입장에서는 괘씸할 수밖에 없었다. 수박뿐만이 아니었다. 각종 과일들을 뒤집어보고 잘라보고 먹어보고….
그 탓에 이영석은 도매상인들에게 몰매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대들지 않았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다 맞았다.
이렇게 해서 이영석은 가락시장에서 가장 기가 세다는 점포에서마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점포들이 칼잡이 총각 사장을 알아보기까지는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상인들의 따가운 눈초리, 때로는 손찌검까지 견뎌가면서 얻어낸 인정이었다.
그렇게 그는 대한민국에서 평당 최고 매출을 올리는 신화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박시은 기자>
<출처=총각네 야채가게 中│김영한·이영석 지음│쌤앤파커스>
박시은 기자 seun897@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