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서울ㅣ이범희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올해 성탄절을 포함해 연말·연초에 생계형 사면을 제외하고 경제 범죄로 처벌받은 기업인들을 사면하지 않을 것이 확실시됨에 따라 재계의 고민이 깊어지게 됐다. 경기침체와 총수의 장기 부재로 기업경영이 악화된 상황에서 그나마 기대했던 희망마저 사라져 암울해하고 있다. 아울러 기업인 범죄에 대한 실형(또는 집행유예) 선고 후 사면해 주는 관행도 앞으로 사라질 전망이어서 가뜩이나 추운 겨울을 지내는 재계가 더 혹독한 나날을 예견하고 있다.
朴대통령 특사 없이 취임 첫 해 마무리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관행 깨져…재계 울상
박 대통령은 역대 정부와 달리 단 한 차례의 특별사면 없이 취임 첫해를 마무리할 것으로 보인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지난 16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연말 또는 연초에 사면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지금까지 들은 바 없다”며 “준비하는 기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 없으면 (사면은) 없다”고 밝혔다. 통상 특별사면을 위해서는 법무부가 한달 전부터 사면 대상자를 가리는 절차를 진행해야 하지만, 현재 추진하는 것은 없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석가탄신일과 8ㆍ15광복절에도 특별사면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후보 시절 “돈이 있고 힘이 있으면 책임을 안 져도 되는 모습이 만연한 상황에서 국민에게 법을 지키라고 한다면 법 질서를 확립할 수 없다”며 “대통령 사면권을 분명하게 제한해 남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박 대통령은 무엇보다 횡령·배임·탈세·외화유출 등 경제범죄로 처벌받은 기업인들에 대한 사면에 부정적인 것으로 전해져 기업 입장에선 당혹스러워한다.
이미 SK, 한화, 태광그룹 총수의 구속과 실형선고에 이어 CJ 이재현 회장까지 구속되는 등 대기업 총수에 대한 실형선고가 이어지는 것도 박 대통령의 엄벌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란 진단이다.
최태원 SK 회장과 동생 최재원 부회장은 계열사 펀드 자금 수백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각각 징역 4년과 3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상태로 항소심이 진행 중이며, 수천억 원대 횡령 배임 혐의로 기소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도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징역 3년에 벌금 51억 원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 역시 배임·횡령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다. 게다가 어머니 이선애(85) 전 상무와 함께 억대 약정금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 6월 태광산업 서울지역 대리점을 운영하던 홍모 씨는 “약속한 50억 원을 달라”며 이 전 회장과 이 전 상무, 태광산업 등을 상대로 1억1000만 원의 약정금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홍 씨는 “2005년 1월 대리점 운영을 종료하면서 회사 측과 주식대물변제합의서와 부동산대물변제 계약을 체결했다”며 “태광산업 주식 1만여 주 등을 태광 명의로 이전하고 토지 소유권 명의도 이전하는 계약을 하고 각 111억5000만 원과 150억 원 상당의 이익을 태광 측에 제공했다”고 주장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엄격한 잣대에 기업 위축 우려도
이재현 CJ회장은 탈세 및 횡령혐의로 기소돼 지난 17일 재판을 받기위해 처음으로 법원에 출석했다. 이 회장은 이날 오전 9시 43분께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청사에 회색 코트에 회색 목도리, 회색 비니모자를 쓴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바이러스 감염 방지를 위해 하얀색 마스크를 쓴 이 회장은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듯 지팡이를 짚고 비서실 직원의 부축을 받으며 공판이 열리는 법정으로 향했다.
대기업총수에 대한 ‘징역 3년-집행유예 5년’ 관행이 깨진 것이다.
대통령 측근들은 박 대통령의 기업인 사면 불가 원칙은 임기 내내 이어질 소지가 높다고 보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굳이 법으로 대통령 사면권을 제한하지 않더라도 박 대통령 스스로 사면에 관한 원칙을 갖고 지킬 것”이라며 “앞으로 두고 보라”고 강조했다.
반면 재계는 기업인 범죄 엄벌 분위기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기업인의 실패한 투자 결정이 배임·횡령으로도 판결날 수 있다”며 “현 정부의 엄격한 잣대가 오히려 기업경영에 악영향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한편 역대 대통령들은 집권 초기 국민통합 등을 명목으로 사면권을 행사했으나 비리에 연루된 정ㆍ재계 인사들이 대거 포함돼 국민 법 감정을 해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100일에 즈음한 2008년 6월 특별사면을 하는 등 임기 중 모두 일곱 차례 사면권을 행사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취임 첫해인 2003년 4월 석가탄신일 사면을 시작으로 임기 중 9차례 사면을 단행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도 각각 6차례와 8차례 사면권을 행사했다.
이범희 기자 skycros@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