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우리 얼을 빼놓은 일제
일본식 꽃꽂이·분재·
왜식정원 유행
지금은 너나없이 커피 마시기에 정신이 없어 녹차가 좀 줄어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녹차를 마시는 인구가 아직 많아 녹차 밭과 여러 가지 녹차 산업이 아직은 번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녹차 마시는 단체가 많고 학회도 많고 학술 세미나도 많고 차회(차모임)도 수 없이 많고 지역연합회 전국연합회도 규모가 크고 방대하다.
특히 대구지방에서 제일 성행하고 부산에서도 성황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일본과의 교류가 아주 빈번하다. 우리 차인그룹이 가기도 하고 일본 차인그룹이 오기도 하고 피차에 거기서 차회도 가지고 세미나도 하고 강연회도 한다. 그리고 차회를 주관하고 차를 격 있게 마시는 지도자를 사범이라 하고 일본에서 사범증을 받아오기도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 일본 차의 큰 단체가 매년 와서 큰 행사를 하고 여기에 한국 사람이 많이 참관·참여해 그들의 차회가 은연중 번창하고 있으며 일본 사범증을 따 가지고 여기서 차모임을 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우리는 예법의 나라였다 제례 외에도 궁중에서 각 가정에 이르기까지 예법과 범절이 있었지만 거의 다 없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차회를 하는 분들이 오래전부터 스스로 우리 예법을 연구하고 익히고 우리 차를 마시는 예절의 형식과 격식을 큰 차인 연합회마다 갖췄다고 한다. 그 예절의 꽤 까다로운 절차에 따라 차를 마시는 법도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예법을 가르치고 거기서 석·박사가 많이 배출돼 전국 규모의 차 문화협회와 차인연합회에서는 사범 자격증을 발급해 자격 있는 사범만이 차모임을 주관하게 됐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예법과 예절을 존중한 나라에서 차 문화를 통해서 우리의 전통문화인 우리의 예법과 예절이 이어지고 빠르게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처음에는 일본말차의 어렵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법도와 법식에서 영향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조선 문화가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그들은 일본의 혼이 담긴 차 문화를 보급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우리나라에는 누구도 녹차에 관심을 가지거나 더구나 차를 마시는 데 여러 가지 왜식의 격식대로라고 하면 근접도 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이를 따라서 녹차를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구수한 풍미가 넘치는 숭늉을 마셨다.
일제강점기만 하더라도 당당한 조선 문화가 자리 잡고 있어서 감히 일본의 차 문화가 범접을 못한 것이었다. 지금 성행하고 있는 꽃꽂이와 분재도 그러하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의례에서 거의 조화를 사용했다. 궁중의 수많은 참여자들이 모두 머리에 꽃을 꽂고 상차림에도 꽃을 꽂았고 전각의 기둥과 통로에도 모두 조화가 사용됐다.
외래 문화만을 위대하다
보는 사람들
그런데 그 조화가 생화 같았고 ‘밀’을 곁들이기도 해 벌과 나비가 날아왔다고 한다. 지금 일본식이라고 할 수 있는 생화 꽃꽂이가 꽃꽂이 예술로 성행하고 또 우리는 거의 없던 분재가 대성황을 이루고 있고 일본식 정원과 일본식 축대 쌓기가 일제강점기부터 있어온 것도 있지만 요즘 무차별로 성행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문화역량이 살아있던 일제강점기엔 감히 있을 수 없던 일이었다. 광복 후 우리 머리가 하얗게 비어 있었을 때 우리를 스스로 자조하고 자부심도 없고 외래 문화만이 위대하고 우리 것은 별것 아닌 촌스럽고 창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것은 고리타분하고 세계에 견줄 만큼 국제화되지 못한 것이라고 하던 때에 이러한 차 문화, 꽃꽂이, 분재, 왜식정원 등이 성행하기 시작된 것이다. 내가 1960년 초에 국립박물관 미술과에 근무하기 시작할 때 친구들이 나를 만나면 처음에는 멋모르고 박물관에 근무한다고 했다.
그러면 그때 고급 지식인들은 상대를 하지 아니하고 친구와 지인들은 하루빨리 문교부 본부로 가거나 타 부처로 가라고 아주 가련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저 친구가 아무도 찾는 이 없고 아무 것도 생기는 것도 없는데 저 박봉에 그 구석에서 무엇을 먹고 무슨 재미로 사는가 하고 안쓰러워하는 마음을 훤히 읽을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들 마음에는 당당한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 문화가 독창적인 아름다움과 세계와는 차별화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세한도
세한도는 우리나라 남종문인화의 대표적 화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 유배 생활 당시 그린 작품이다. 세한도는 추사가 존경하고 따르던 우선 이상적 선생이 청나라에서 보낸 귀한 글씨와 서적의 답례로 고마움의 뜻을 그림과 그 내력으로 적은 것이다. 세한도에는 겨울에도 의연히 시들지 않고 곧게 자라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갈필로 그려져 있다. 또 허술한 집 한 칸도 있다. 그 누가 유배 중의 어려운 역경에 있는 학자의 깊은 뜻을 전할 수 있을까. 세한도에는 그런 추사의 마음이 담겨 있다.
<정리=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사진=한국미술발전연구소>
조아라 기자 chocho621@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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