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8일 서울의 한 일간신문에 실린 정계 원로들의 시국과 관련한 충언(忠言)을 읽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말은 정계 원로답지 않았고 무책임했다.
김수환 전 국회의장은 “정치권이 자멸의 길로 가고 있다”고 경고하며 “여야가 하루빨리 타협하고 절충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도 “정치의 본질은 타협”이라며 “타협은 패배가 아니라 상생이며, 굴복이 아니라 승리라는 점을 여야 모두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계 원로들의 충언들 중 공통점은 ‘타협’과 ‘절충’을 역설한 데 있다. 일부 언론들도 타협과 절충을 강조했다. 물론 자유민주 국가의 의회정치는 타협과 절충을 통해 국가 이익의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여야의 상반되는 주장과 관련해 잘 잘못을 가려내지 않고 ‘타협’으로 적당히 ‘절충’해 버리면 독(毒)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원로들은 먼저 여야의 주장이 각기 옳고 그름을 지적했어야 마땅했다. 그렇지 않고 여야가 무조건 타협과 절충을 통해 옳지 못한 것도 수용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국가를 ‘자멸’로 몰아넣는 길이다.
꿀과 독이 든 두 물 중 독이 든 물은 버려야 한다. 그러나 ‘타협’하고 ‘절충’한다면서 독이 든 물도 섞어 마신다면 치명상을 입게 된다. 그래서 정치 원로들은 타협과 절충을 강요하기 전에 여야 둘 중 잘못된 점을 먼저 준엄히 꾸짖었어야 옳았다.
공자(孔子)는 정치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행위라고 했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결해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잘못된 것을 바로 잡지 못하고 타협으로 봉합해 버린다면 정치의 책무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야가 대결을 피하기 위해 타협과 절충의 산물로 채택된 것들이 얼마나 독이 되는가는 멀리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작년 4월 여야의 타협과 절충으로 통과된 ‘국회선진화법’과 지난 3일 여야가 타협으로 합의한 '국가정보원 개혁특위 설치‘가 그것들이다. 국회선진화법은 국회에서 법안 통과 선을 ‘타협’으로 ‘절충’해 종래의 50%에서 60%로 올렸다. 그 결과 새누리당은 19대 국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으면서도 60% 의석을 채우지 못해 법안들을 통과시키지 못한다. 국회는 ‘식물 국회’로 전락되고 말았다. 자유민주주의 선진국 어디에도 60% 요건은 없다. 타협과 절충 만능주의가 몰고 온 국가적 재앙이 아닐 수 없다.
그 뿐만 아니라 국정원 개혁특위 설치도 남재준 국정원장의 말대로 여야 합의대로라면 국정원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식물 국회’에 이어 국정원 마저 ‘식물 국정원’으로 내모는 망국적 타협과 절충이 아닐 수 없다.
정치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행위인데 우리나라의 타협과 절충 정치는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제도를 망쳐버린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꼴이다.
원로들은 무책임하게 ‘타협’하고 ‘절충’하라고만 할 게 아니라 잘잘못을 가려내 원로답게 후배들에게 쓴소리를 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천막당사 투쟁 등, 얼마 전까지 장외투쟁으로 국회를 마비시켰던 야당의 잘못부터 먼저 꾸짖었어야 옳았다.
원로들은 여야의 극한 대결을 가져온 국가정보원 선거 댓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유출, 정상회담 회의록 실종 문제들이 재판중이거나 수사 중이므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야당은 기다리며 국회를 먼저 정상화해야 한다고 꾸짖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 쪽으로부터도 반발을 사지 않기 위해 타협하고 절충하라고만 했다. 무책임하고 기회주의적인 말이었고 원로답지 못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바른말 하는 원로 정치인이 드물다는 게 슬프다.
정용석 교수 ilyo@ilyoseoul.co.kr